20화. 컵케이크, 체리 사탕, 꿀벌, 푸딩.2021.08.11.
“영주님……?”
어쩐지 긴장된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며 알테어를 부르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호칭은 아직도 정리가 안 된 거야?”
“하지만 다들 영주님이라고 부르고…….”
“넌 ‘다들’이 아니잖아. 내 아내라고. 남편을 그렇게 부르는 아내가 어디 있어?”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틀린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원하시는 호칭이 있다면 그렇게 부를게요.”
“스스로 알아낸다며?”
“그랬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겠어요.”
“부모님이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답이 쉽게 나올 거 아냐.”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버지를 ‘후작님’이라고 불렀고, 수도의 다른 귀족들도 상대를 대할 때 격식을 갖췄다. 예의를 갖춰 서로 존중하는 부부야말로 수도 귀족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이었다.
‘하지만 동부는 또 다를지도 몰라.’
이곳에 와서 생각지 못한 문화 차이를 실감하는 중이었으니 부부 사이의 호칭 문제도 다를 수 있었다.
‘아! 그래도 개인적인 자리에서 두 분만 있으실 때는…….’
조금 다른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곤 하셨다. 하지만 알테어가 ‘그런’ 호칭으로 불리길 원한다니?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아 나도 모르게 묘한 표정으로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이상한 생각 중이지?”
“저희 부모님이 어떠셨나 떠올려보라고 하셔서…… 정말로 그런 걸 원하세요?”
“부부라면 당연한 거지. 앞으로는 너도 날 그렇게 부르도록 해.”
“저, 정말요? 정말 그렇게 불러요?”
“고작 호칭 가지고 왜 그런 반응이야?”
“그게…….”
“무조건 그렇게 불러.”
내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니 알테어가 지금 당장 불러보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테어의 눈빛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내, 내 컵케이크…….”
“……뭐?”
“체리 사탕…… 꿀벌…… 푸딩…….”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호칭을 나열할수록 알테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더 할까요……?”
조심스럽게 물으니 알테어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이 역시 이렇게 불리길 원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부모님이 서로를 그렇게 부르셨어?”
“공식적인 자리에선 예의를 갖추셨지만,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부르셨어요.”
“그게 어디가 편해……?”
알테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우리 부모님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셨어.”
“이, 이름이요?!”
물론 마음속으로는 알테어의 이름을 마구 부르고 있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소설 속 악역이 실존 인물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컵케이크보단 이름이 낫지 않아?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
“네.”
“지금 불러 봐.”
“나, 나중에 연습을 좀 한 뒤에…….”
“이런 것도 연습이 필요해?”
‘당장 불러 봐!’라는 말이 생략된 눈빛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힘차게 입을 뗐다.
“아, 알테어 님!”
“……알테어 님은 또 뭐야. 내가 네 상관도 아닌데. 그냥 알테어로 충분해.”
“네.”
알테어, 알테어. 나는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알테어의 이름을 되새겼다. 어색하지 않게 그의 이름을 부르려면 엄청난 시뮬레이션이 필요할 것 같았다.
“너는…….”
한참이나 연습하고 있으니 알테어가 어쩐지 머뭇거리는 듯한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
“너는 허락해주지 않는 건가?”
“네?”
“네 이름 말이야. 불러도 되는 거냐고.”
“그거야…… 당연하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생각해보니 알테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내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지 몰라서 너라고 불렀던 건가?’
악역 새싹 알테어가 고작 그런 걸로 고민했다고? 눈을 껌뻑이며 알테어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화악 얼굴이 붉어져서 내 시선을 피했다.
“뭘 그렇게 봐?”
말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그가 처음처럼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연습…….”
붉게 물든 알테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용기가 생겼다.
“알테어는 연습 안 해요?”
“무슨 연습?”
“제 이름 부르는 연습이요.”
“난 그런 거 연습 안 해도 잘해.”
“그럼 지금 해보세요.”
“지금…….”
알테어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해져 미소가 새어 나왔다.
“……나디아.”
헤실거리며 치맛자락을 만지고 있으니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너, 이 녀석, 저 녀석. 그런 식으로 불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에 어쩐지 손을 가만히 둘 수 없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니, 알테어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내가 너에게 어떤 아내의 역할을 원하는지 궁금하댔지? 그게 뭐든 잘할 수 있다고.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나?”
“물론이에요. 열심히 할 거예요.”
“씩씩하게 대답은 잘하네. 뭘 하게 될지도 모르고.”
알테어가 피식 웃더니 거리를 바짝 좁혀왔다. 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하자 겨우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너, 너무 가까워…….’
게다가 알테어는 상처에 약을 바르겠다며 상의를 벗은 상태라 더욱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알테어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단단한 팔이 나를 끌어당기더니, 침대를 향해 기울어지는 내 몸을 그대로 감싸 안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뜨자 알테어의 단단한 가슴팍이 시야에 가득 찼다.
‘헉!’
나는 놀라서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두운 와중에 내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만 귓가를 가득 울렸다.
‘알테어에게 안긴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자세라니!’
당황스러운 이 자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알테어의 상처를 건드릴 것 같아 얌전히 안겨 있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안겨 있는 것도 이상한데?’
슬그머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알테어와 눈이 마주쳤다.
‘헙!’
이번에는 눈을 제대로 감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 모습에 알테어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겁먹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커다란 손으로 천천히 내 등을 쓸어 내렸다.
“걱정하지 마. 뭘 더 할 생각은 없으니까. 오늘은 그저…… 온기만 나눠주면 돼.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피곤했거든.”
거짓말이 아닌 듯 알테어는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규칙적인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당황스러움에 쿵쾅대던 내 심장도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벗어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나는 포기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며 더욱 예민해진 후각에 익숙한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 나를 포근하게 감싸줬던 그 향기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이게 알테어의 냄새였구나.’
건조하지만 어딘가 포근한 느낌이 드는 향기였다. 어쩐지 마음이 편해져 스르르 수마가 몰려왔다. * * * 알테어가 마석 광산 주변의 고블린 서식지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개발이 본격화되자,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손님의 대부분은 마석 광산의 유통을 따내고 싶어 하는 상인들이었다. 귀한 마석을 유통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을 낼 수 있으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온 것이다. 덕분에 에일스포드 영지는 전에 없었을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대접하는 건 안주인의 일이니, 아무리 소심한 나라도 피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에일스포드 성의 일손이 극도로 부족하다는 거다. 여태까지는 사용인 셋으로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었지만, 에일스포드 영지가 발전하면 지금처럼 많은 손님이 드나들 테니 셋으로 일을 감당하긴 무리였다.
‘그걸 떠나서도 셋은 지나치게 적은 숫자야.’
자금 여유가 없어 뒤로 미뤄놨던 성의 보수도 차근차근 진행해야겠지.
‘이제는 돈이 잔뜩 들어올 테니까!’
에일스포드의 마석 매장량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수천 년을 발굴해도 매장량이 소진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시험 삼아 채굴한 마석이 일반적인 것보다 순도가 훨씬 높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고효율의 마석이라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알테어는 매일 상인들을 만나 납품 조건을 조율하느라 바빴다. 상인들이 잔뜩 쪼그라든 얼굴로 지쳐서 떠나는 걸 보면 역시나 알테어가 만만찮은 협상 상대인 것 같았다.
‘뭐, 상인들의 혀끝에 놀아나 손해 보는 알테어는 상상이 안 되니까.’
그쪽은 걱정 없었다.
‘그러니 나도 힘내서 할 일을 하자!’
마침 에일스포드에 상인들이 많이 머무르고 있으니 성을 보수할 재료를 사들이기 좋은 상황이었다. 알테어와의 협상으로 잔뜩 진이 빠져버린 이들을 상대하면 크게 힘쓰지 않아도 좋은 값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겠지.
‘악역이 아군이면 이렇게 든든하구나.’
소설을 읽을 때는 적군의 입장에서만 알테어를 봐서 이런 장점을 전혀 몰랐다.
“안나. 오늘부터는 영주님과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상인들을 내게 불러주겠어? 사들여야 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니 부지런히 상인들을 만나야 할 것 같아.”
“예, 그럼요! 그렇게 해야지요!”
안나는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내 옆으로 조르르 다가왔다.
“역시 드레스를 구입하시려는 거지요?”
“어……?”
“곧 동부 귀족들의 회합이 있으니까요!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드레스와 장신구를 제대로 갖춰야 해요.”
“그렇구나…… 그것도 있었지.”
마석 광산 문제에만 집중하느라 알테어가 당부했던 회합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냥을 한다고 했으니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라 승마복을 입겠지만…….’
오히려 수수한 옷에서 수준 차이가 심하게 나는 법이다. 드레스는 화려함으로 눈을 속일 수 있지만, 승마복은 그게 힘들었다. 소소한 장식까지 신경 써야 우스운 꼴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남자 옷은 더 까다롭지.’
장식할 요소가 많지 않아 옷감과 재단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하지만 알테어의 옷은…….’
결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패션의 완성은 외모라고, 훌륭한 알테어의 체격과 얼굴이 옷차림을 보완하는 수준이었다.
“그 문제 때문이라면 상인들이 아니라 재단사를 불러야 할 것 같아. 동부에서는 누가 제일 유명하지?”
“유명한 곳은 몇 군데 떠오르지만…… 아무래도 가격이…….”
“안나. 이제 가격은 중요하지 않아.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영주님의 체면을 제대로 살려야지.”
드물게 단호한 나의 말에 우물거리던 안나가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예! 그렇지요! 이제 예전과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재단사를 부르기 전에 영주님께 허락을 맡아야겠어. 내가 함부로 돈을 쓴다고 싫어하실 수도 있으니까.”
“에이. 영주님께서 그러실 리가요.”
안나가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나를 도와 소파에서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마님을 뵙는 건 좋아하실 것 같으니 지금 안내해드릴게요! 오전 일정은 모두 끝나셨으니 마침 쉬고 계실 거예요!”
“어어?”
지금? 내가 직접?
‘안나에게 대신 말해달라는 거였는데!’
하지만 이미 안나는 신이 나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소심한 나는 차마 그녀를 불러세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알테어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