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러게 왜 내 아내를 건드려?2021.08.15.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알테어의 집무실까지 함께 온 안나를 슬쩍 바라보자, 그녀가 내 눈빛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빙긋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두 분, 편하게 이야기 나누셔요. 제가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하지만 안나는 내 마음속 외침을 알아채지 못하고 조용히 문을 닫고 집무실을 떠났다. 고요한 집무실에 둘만 남으니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알테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어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으니 책상에 가득한 서류들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알테어는 업무량이 상당해서 꽤 피곤해 보였다. 매일 침실로 돌아와서도 곧장 잠에 빠져버리고는 했다.
‘기분 탓인지 얼굴도 조금 초췌해 보여.’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피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알테어가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지며 가볍게 헛기침했다.
“서류 보는 게 성미에 안 맞아서 그래. 차라리 마수를 쓸어버리라고 하면 편했을 텐데.”
“쉬면서 하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하시고요. 전 서류 보는 건 자신 있거든요.”
“영주의 업무를 떠넘길 수는 없지. 내가 할 일이야.”
알테어는 단번에 내 제안을 거절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내 걱정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 네 이야기를 해 봐.”
“제 이야기요?”
“네가 먼저 날 찾아올 정도라면 중요한 이야기겠지.”
“급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허락을 받을까 해서…….”
“허락?”
그 말이 거슬렸는지 알테어의 눈썹이 꿈틀했다.
“곧 동부 귀족들의 회합이잖아요. 아무래도 여러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옷도 맞춰야 하고…… 그러자면 상당한 자금을 쓰게 될 테니 미리 허락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성의 보수 문제도 있고요.”
알테어의 안색을 살피며 우르르 말을 쏟아냈더니 그의 표정이 갈수록 미묘해졌다.
“그건 내 허락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잖아. 성의 살림은 네 몫이니 내게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 없어. 게다가 이제는 자금 걱정도 할 필요 없으니까.”
한숨을 내쉰 알테어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밀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용을 보라는 의미인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 서류를 살피니 여러 조항이 정리된 계약서였다. 조금 전 서명을 마친 듯 잉크가 덜 말라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마석 납품 계약’이라는 단어였다.
“상단과 계약을 마친 건가요?”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고개를 번쩍 들자 알테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긍정했다.
“은여우 상단과 마석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어. 독점권을 위해 그쪽에서 계약금으로 5억 골드를 불렀지.”
“세상에…….”
은여우 상단이라면 제국에서 두 번째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 상단이었다. 제국 전역에 유통망을 가지고 있으니 아주 좋은 파트너였다. 게다가 5억 골드라면 부유한 바인 후작가에서도 몇 년 치 예산으로 사용할 정도의 큰돈이 아닌가?
“마지막까지 흑표범 상단과 경쟁이 붙었어. 덕분에 점점 조건이 올라서…… 우리에게 상황이 유리했어.”
은여우 상단이 제국의 두 번째라면, 흑표범 상단은 누구나 첫 번째로 꼽는 곳이었다. 오랜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상단이 에일스포드의 마석 광산을 두고 크게 맞붙은 모양이었다. 마석 광산 독점을 통해 흑표범 상단은 압도적 1위를 유지하고 싶었을 거고, 은여우 상단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고 싶었을 거다. 둘 중에서는 은여우 상단이 조금 더 절박했을 테니 결국 그들이 승자가 된 것일 테다.
“수익 배분도 우리가 팔 할, 은여우 상단이 이 할을 가지기로 했으니 아주 좋은 조건이지. 일반적으로는 육 대 사, 잘 쳐주면 칠 대 삼이니까.”
“정말 잘됐어요!”
알테어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부유해진 이 땅에서 나를 잘 챙겨줬던 에일스포드 사람들이 평온하게 살 수 있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테어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알테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기쁜 마음도 잠시 접고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위압적인 그림자에 어깨를 살짝 움츠리자 그가 안심하라는 듯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모두 네 덕분이다.”
갑작스러운 공치사에 눈을 껌뻑이자 알테어가 피식 웃으며 조금 거칠게 내 머리를 헤집었다.
“으아아?”
“이 작은 머리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어, 어지러워요……!”
나의 항의에 알테어가 손을 멈췄다.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고맙다. 이건 에일스포드의 영주로 하는 감사 인사야.”
“…….”
생각지도 못한 인사였다. 악역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다니. 감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어쩐지 내가 실제로 만난 알테어는…….’
소설 속의 악역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해서 알테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곧 앓는 소리를 내며 내게서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네가 그런 눈빛으로 날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져. 속이 간지러워서 어떡해야 할지 도무지…….”
“어어…… 그럼 쳐다보지 말까요?”
“그게 아니라……!”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알테어가 움찔하는 날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깊은 한숨이었다.
“……옷은 언제 맞추려고?”
“제작 기간도 생각해야 하니까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요.”
“파벨에게 말해두지. 일주일 안으로 재단사를 불러 달라고.”
“네!”
확실하게 허락도 받았으니 안심이었다. 빙긋 웃으며 알테어를 바라보자 또다시 알테어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다시 ‘속이 간지러워서’ 곤란한 모양이었다. 알테어를 곤란하게 하기는 싫었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창문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남작! 에일스포드 남작! 제발 나를 좀 만나주게!”
‘어라? 갈라드 백작이잖아?’
단순히 상황만 기시감이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방문자 역시 그때와 똑같았다. 얼마 전에 그렇게 꽁무니를 빼놓고 갑자기 왜?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알테어는 짐작되는 바가 있다는 듯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백작께서 만나달라고 하시니 나 같은 남작 따위는 고분고분 인사드리러 가야겠지. 안 그래?”
‘고분고분이라니…….’
사악하게 웃고 있는 이 얼굴의 어디가 고분고분이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내게 있을 리 없다. 동의한다는 듯 마구 고개를 주억거리니 알테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가볼까?”
* * * 알테어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니 입구에서 갈라드 백작이 초조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고,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은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단단히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에일스포드 성에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행색이었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흐르던 피부는 퍼석해 보였고, 볼은 움푹 패 초췌하게까지 느껴졌다.
“나, 남작!”
갈라드 백작이 알테어를 발견하자마자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알테어는 뻣뻣한 자세로 고개만 살짝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누추한 영지에 또 어찌 발길을 하셨는지.”
“누, 누추하다니. 에일스포드를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나.”
“기억을 못 하시나 봅니다. 5년 전에도 그러셨고, 얼마 전에도 그러셨고, 제게 보낸 서신에서도 그러셨는데요.”
“그, 그건……!”
백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알테어의 지적이 틀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난 일로 마음 상한 부분이 있다면 사과하겠네! 내 식견이 좁았어. 그러니 부디 마음을 풀고…….”
“아닙니다. 백작님의 식견이 어떻게 좁을 수 있겠습니까. 무려 백작님이신데요. 백작님의 말씀은 모두 다 옳지요.”
“그, 그러지 말고…… 부디…….”
내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갈라드 백작이 내내 저자세로 알테어의 눈치를 살폈다.
“제발 우리 영지를 좀 도와주게. 이대로 가면 마수들이 과수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올해 농사를 모두 망치게 될걸세! 화, 황실에 납품을 약속한 과일이 있는데…… 약속을 어기면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실 거야!”
그러고 보니 갈라드 령의 특산물이 포도였다. 알이 크고 달기로 유명해서 황제가 즐겨 먹는다고 했다. 갈라드 령의 부는 대부분 이 포도를 판 수익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포도를 키우는 과수원에 마수가 나타난 건가?’
그래서 에일스포드 령에 의뢰를 한 거고. 하지만 얼마 전의 사건으로 사이가 틀어진 터라 알테어가 의뢰를 거절한 모양이었다.
“갈라드 령의 사정은 딱하지만, 저는 얼마 전 용을 잡고 돌아오며 크게 다친 터라, 한동안 마수를 상대하는 의뢰를 받기 힘듭니다. 용병단을 찾아보시죠.”
“이미 찾아봤네! 하지만 그리핀을 상대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자들은 없었어!”
그리핀은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마수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들이라 보통 실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웠다.
“하필 그리핀이라니! 우리 과수원은 그리핀의 서식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갈라드 백작이 망연자실해서 비틀거렸다.
“내 희망은 남작뿐일세. 자네는 용을 때려잡을 정도로 강하잖은가. 자네와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이라면 그리핀도 가볍게 상대할 수 있겠지. 부디 내 의뢰를 받아주게!”
“흐음…….”
알테어가 고민스럽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시선을 받은 터라 놀라서 눈을 껌뻑이자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나디아. 당신 생각은 어때?”
“네?”
“내가 갈라드 령의 의뢰를 받아들여야 할까? 난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소중한 아내의 부탁이라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것 같군.”
“저어…… 그게…….”
나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어 머뭇거리며 알테어와 갈라드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왜 내게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바라는 대답이 있는 건가 싶어 알테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갈라드 백작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 남작부인!”
그때 우리 둘 사이에서 초조하게 눈치를 보고 있던 갈라드 백작이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제발 남작을 설득해주게! 남작이 돕지 않으면 우리 영지는 끝장일세!”
“이러지 말고 일어나세요, 백작님.”
“지난날의 무례는 전부 잊어주게! 내가 이렇게 사죄하겠네!”
당황해서 백작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성 주변에 몰려 있던 구경꾼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평소라면 이 정도의 구경꾼이 몰려들진 않았을 테지만, 때마침 마석 광산 문제로 여러 상인들이 에일스포드에 머무르고 있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지.’
백작이 남작부인 앞에 무릎 꿇으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는 소문은 금세 그들의 입을 타고 제국 전체에 퍼질 것이다. 과장스러운 상인들의 입담을 따라 백작의 우스운 꼴이 더욱 부풀려질 것도 뻔했다.
“흥. 그러게 감히 누굴 건드려.”
알테어가 비죽 웃으며 뒤를 지키고 있던 기사단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블란이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와 알테어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테어는 백작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쯤 했으면 정신을 차렸겠지. 과수원에 손을 써둔 건 그만 거둬라.”
“예, 영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