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내게 실망했어?2021.08.18.
‘설마 갈라드 령의 과수원에 그리핀이 나타난 건 전부 알테어가 꾸민 일인가?’
의미심장한 두 사람의 대화에 눈을 크게 뜨자, 알테어가 모르는 척 내 시선을 외면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 백작을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까지 사죄하시니 어쩔 수가 없군요. 백작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마수 소탕 의뢰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아내의 생각도 같을 거고요.”
“그, 그래 준다면 고맙겠네!”
“하지만 약속하셨던 것처럼 보수는 확실히 쳐주셔야겠습니다. 아무도 받지 않는 의뢰를 저희가 해결해드리는 거니까요.”
“물론이네, 물론이야!”
백작은 초라한 제 행색도 잊은 듯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백작이라는 지위를 내세워 거드름을 피우던 지난날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오늘 제대로 망신을 당했으니 다시는 시비 걸 생각을 못 할 거야.’
게다가 마수 문제가 언제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에일스포드를 완전히 적으로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이걸 전부 알테어가 계획한 거라면…….’
정말 대단해! 나는 감탄해서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소설 속의 알테어는 무력을 자랑하는 캐릭터였다. 이렇게 뒤에서 머리까지 굴릴 수 있는 타입인 줄은 몰랐다. 열심히 읽었던 소설의 숨겨졌던 설정을 발견하다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리핀만 쫓아내 준다면 돈은 얼마든지 주겠네!”
“돈이라…… 글쎄요.”
알테어가 여전히 내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보다 백작님께서 잘 아시겠지만, 저희 영지의 처지가 예전과는 썩 달라져서요. 보수로 돈을 받는 건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군요.”
“그, 그럼……?”
“과수원의 지분을 일부 넘기시죠.”
“뭐, 뭐, 뭐, 뭐라고?”
백작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내, 내가 마석 광산의 지분을 내놓으랬다고 지금 복수하는 겐가?”
“복수라니요. 저는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마침 백작님께서 보상으로 재산의 지분을 넘기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제게 알려주셔서, 좋은 상황에 활용하고 있는 거고요.”
“그,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저희야 뭐, 의뢰를 받지 않아도 그만이니까요.”
“그런…….”
태연한 알테어의 대꾸에 백작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물러나는 것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알테어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상대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기세가 보였다. 그렇다면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얼마를…… 원하나?”
“그리 큰 욕심은 없습니다. 딱 2할만 넘기시죠.”
“2, 2할이나?!”
“그냥 두면 과수원 전체를 버리셔야 할 텐데요.”
“그렇지만 2할은 너무…… 1, 1할 정도로 한다면…….”
“그러신가요. 그럼 1할로 하시죠.”
알테어가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1할을 생각하고 2할을 부른 것 같았다. 갈라드 백작도 그걸 알아챘는지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이야기는 흘러나온 뒤였다.
“그럼 두 분께서 나누신 이야기를 문서로 남겨둘까요.”
거래가 일단락되자 뒤에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파벨이 안경을 고쳐 쓰며 앞으로 나섰다. 안경 너머로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갈라드 백작을 훑었다.
“의뢰에 계약은 필수지요. 지난번에 구두로 계약했더니 어떤 분께서 신의를 저버리고 약속한 보수 대신 쓸모없는 땅을 던져주셔서 말입니다.”
“그, 그러게 그런 몹쓸 사람이 누구인지 원…….”
누가 봐도 자신을 비난하는 파벨의 이야기에 갈라드 백작이 헛기침하며 주위를 살폈다. 구경꾼들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걸 모르길 바라는 눈치였다.
“뭐, 괜찮습니다. 덕분에 지금 저희 영지가 큰 행운을 얻었으니까요.”
“그, 그렇지…… 축하하네…….”
자신이 놓쳐버린 행운까지 언급하자 갈라드 백작이 완전히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완전한 그의 패배였다. 갈라드 백작은 우아한 태도로 자신을 안내하는 파벨을 따라 터덜터덜 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그의 뒷모습이 아주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쩌지.’
너무 통쾌해!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늘 마음에 품고 살아온 터라 이런 통쾌함을 경험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어찌나 즐거운지 얼굴까지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기쁨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애꿎은 치맛자락만 꽉 붙잡았더니 옆에 서 있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를 굽혔다. 훌쩍 가까워진 그의 두 눈동자가 꼼꼼하게 내 안색을 살피자 그렇지 않아도 달아올랐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왜, 왜요……?”
“혹시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껌뻑이자 그가 다시 허리를 세우며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난 당하는 건 못 참는 성미야. 누가 내 식구를 건드리는 것도 싫고. 결코 고상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냥 이게 나야. 실망해도 어쩔 수 없어. 난 앞으로도 계속 거슬리는 건 걷어 차버릴 테니까.”
‘실망? 도대체 무슨 소리지?’
알테어가 꺼낸 말을 해석하는 동안 그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이대로 알테어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손이 먼저 움직여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실망 안 했어요!”
알테어가 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면 ‘역시 내가 소설에서 본 그 악역이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보복은 오히려 우아하지 않은가? 소심한 내가 평생 시도해볼 수도 없는 시원한 방식이라 조금 신이 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테어는 내 말이 미덥지 않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화가 났잖아. 얼굴이 벌게져서는…….”
“아, 아니에요! 그건 그냥…….”
“그냥?”
“속이 시원해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알테어의 시선에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배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높였다.
“얄미운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니까 통쾌해서 그랬어요!”
“……통쾌했다고?”
“저도 그렇게 고상하지는 않은가 봐요. 알테어가 갈라드 백작을 막 몰아붙이니까 아주 즐거웠어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인 듯 알테어가 입을 살짝 벌렸다.
“혹시 실망했어요? 내가 생각처럼 고상한 아내가 아니라서요?”
“헛소리.”
조심스러운 물음에 알테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도의 번듯한 기사들처럼 유려한 미소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어색한 그 미소가 나쁘지 않았다.
‘아냐. 단순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가……? * * * 마석 광산 개발은 순조롭고, 갈라드 령의 풍요로운 과수원 지분까지 얻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기쁜 소식에 에일스포드는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이런 소문이 제국 전역으로 퍼진 건지, 에일스포드에서 일할 사용인을 구한다는 공고를 내자마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마 보수를 조금 높게 책정해서 그렇겠지?’
유능한 사용인들은 한 가문에 오래 소속되어 일하기 때문에, 기존 직장과 비교되는 장점을 제시하지 않으면 데려오기 힘들었다. 동부의 작은 남작가에서 내세울 수 있는 메리트는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상당한 수준의 보수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그 부분이 유효했는지 파벨과 함께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추려보니 눈에 띄는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마리!’
마리는 바인 후작가에서 쭉 나를 따랐던 시녀였다. 내 처지가 달라지고 모두가 등을 돌렸을 때도 마리만은 배신하지 않고 곁에 남아줬다.
‘내가 후작가를 떠날 때도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인색한 숙부는 돈뿐만 아니라 사람 역시 데려갈 수 없을 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남겨 주신 신탁 재산만 가진 채 동부로 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마리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다니! 반가움이 얼굴에까지 묻어났는지 파벨이 내 안색을 살피며 빙긋 웃었다.
“바인 후작가 출신의 시녀더군요. 마님과 인연이 있을 거 같아 이력서를 위로 빼두었습니다.”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날 구박하지 않은 유일한 시녀예요. 마리가 아니었으면 버티기 힘들었겠죠.”
“……구박?”
파벨이 믿기 힘든 단어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마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서 그 부분이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리는 꼭 데려오고 싶어요. 친분이 있기도 하지만 정말 유능하거든요. 아직 어린 편이지만 시녀장을 맡겨도 잘해낼 거예요. 꼼꼼하고 차분해서 어딜 가나 신임받을 아이예요!”
혹시라도 파벨이 반대할까 싶어 마리의 장점을 줄줄이 늘어놓자, 그가 언제 미간을 찌푸렸냐는 듯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니 제일 먼저 고용해야겠군요. 시녀장을 맡겨 시녀와 하녀를 통솔하게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안나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마님!”
파벨은 그 꼴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가볍게 혀를 찬 뒤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부디 그 마리라는 분이 저 녀석도 통제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음…….”
나는 머릿속에 차분한 마리와 해맑은 안나를 나란히 세워 보았다. 아주 상극이었지만, 의외로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안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마님! 지금 여기서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어서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 왜?”
“아이참, 잊으셨어요? 오늘 재단사가 방문하기로 했었는데요.”
“아. 그게 오늘이었어?”
성의 보수며, 사용인을 고용하는 일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느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안나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파벨을 바라보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 않아도 이력서 검토가 끝나면 마님을 안내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녀석이 그새를 못 참고 달려와 버렸지만요.”
“이력서 검토는 나중에 하셔도 돼요! 얼른 예쁜 옷을 맞추러 가야죠. 성에 재단사가 오는 게 얼마 만인지…… 전 며칠 전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잤답니다.”
당사자보다 더 기대하고 있는 안나를 보니 나까지 들뜨는 것 같았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안나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부인.”
재단사는 이미 오래전에 도착한 건지 응접실에 온갖 샘플을 완벽하게 늘어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저하게 준비한 점은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왜…….”
‘걸려 있는 옷 샘플이 전부 여성복이지?’
의아함에 입구에서 들어서지도 못하고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금세 등 뒤에서 위압감 넘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져온 옷은 이게 다인가?”
고개를 돌리자 알테어가 날카로운 눈매로 걸려 있는 옷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테어의 옷을 맞추려고 재단사를 부른 건데, 여성복만 잔뜩 걸려 있으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저어…….”
뭔가 오해가 있어 옷이 잘못 준비된 모양이라며 재단사를 감싸려는데, 알테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가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회합에서 입을 승마복 외에 평상복도 모두 맞출 테니 다양한 여성복 샘플을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으응……?’
남성복이 아니라 여성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