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제대로 알려줍시다.2021.08.25.
마리는 싸늘한 남자의 앞에 서서 침을 꿀꺽 삼켰다. 에일스포드 성에서 자신을 부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역시 우리 아가씨가 날 찾으시는구나!’라고 태평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서둘러 달려 온 에일스포드 성에서 마리가 마주한 사람은 매서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차가운 인상 남자였다.
‘이 사람이 알테어 에일스포드.’
최근 영지 내에서 마석 광산이 발견되어 완전히 평가가 달라진 에일스포드의 영주이자 아가씨의 남편. 수도에는 엄청난 추남에다 사람 구실 제대로 못 하는 불구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직접 마주한 에일스포드의 영주는 뛰어난 예술가가 빚어낸 조각처럼 잘생긴 남자였다. 물론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무서운 인상이기는 했지만…….
“바인 후작가에 오래 있었다고?”
마리가 알테어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무심하게 툭 질문이 던져졌다. 서늘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지만, 마리는 능숙한 사용인답게 차분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 그렇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바인 후작가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저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일을 거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남작 부인이 되신 나디아 님을 오래 모셨습니다.”
“그럼 후작가의 사정을 잘 알겠군.”
“예.”
“일하던 가문의 이야기를 밖으로 흘리는 건 사용인으로서는 실격이지. 하지만…… 나는 꼭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똑바로 자신을 향하는 강렬한 시선에 마리가 견디지 못하고 홉 숨을 들이켰다.
“내가 바인 후작가에 대해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해. 이 일로 자네가 입이 가볍다고 평가할 일도 없을 거야. 그건 확실하게 약속하지.”
사용인들의 가장 큰 미덕은 침묵이었다. 가문의 은밀한 사정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하인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길 주인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묻지. 바인 후작은 정말 조카를 아꼈나?”
알테어의 질문에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마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바인 후작의 처사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많다. 하지만 그 일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털어놓아도 좋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과묵함에 매겨질 평가 때문이 아니었다. 바인 후작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일스포드 남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마리가 걱정하는 건 나디아였다.
‘내가 후작의 고약한 행동들을 털어놓는 게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까?
바인 후작가는 공작가와 위세를 견줄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었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나디아는 명백한 바인 후작가 사람이었고, 그것이 외부에서는 그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디아가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를 향한 시선은 완전히 뒤집히게 될 것이다. 지금 마리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 역시 어떤 방향으로든 행동을 바꾸게 될 테고. 마리는 이제 막 에일스포드의 영주를 만났다. 그를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송구합니다.”
고민 끝에 마리가 깊이 사죄했다. 감히 영주의 명을 거부했으니 호통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알테어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신중하군. 입도 무겁고.”
“…….”
“내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그 점은 사용인으로서 훌륭하지. 너에게는 시녀장 역할을 맡기려고 한다.”
꾸지람을 듣기는커녕 시녀장이라는 큰 역할을 맡긴다는 소리에 마리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녀장이라니…… 저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오늘 보아서 알겠지만 에일스포드는 이제 막 체계를 잡아가는 중이라 부족한 곳이 많다. 경험 많은 중년의 시녀에게 중책을 맡길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을 통제하기에는 남작 부인이 너무 선해. 오히려 휘둘릴 수도 있으니 네가 적격이다.”
의외로 나디아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은 알테어의 말에 마리가 눈을 빛냈다. 이 대화로 나디아를 향한 알테어의 호감을 일부 읽어낼 수 있었다.
“새로운 주인을 신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우선은 남작 부인을 잘 모셔라. 무리하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주며 살림 꾸려보도록 해.”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리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알테어가 그만 나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의 명에 따라 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마리가 문을 열고 나서기 전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영주님.”
머뭇거리며 나온 부름에 알테어가 마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마리가, 마침내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니, 마님을 위해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카산드라의 미소’라는 반지에 대해 조사해보셨으면 합니다.”
“카산드라의 반지?”
“예. 일개 시녀인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알테어가 의문에 가득 찬 상태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가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카산드라의 반지. 도대체 그게 뭐길래 그것에 대해 조사하면 바인 후작가에서의 나디아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는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원래 알테어는 계획보다 행동이 앞서는 타입이었다.
‘……블란에게 조사시켜야겠군.’
아마 오래 기다리지 않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 *
“마님. 여기서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 마리?”
환상인가 싶어 눈을 마구 비벼보았지만 눈앞에 선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딱 떨어지는 단정한 단발머리에 야무진 인상을 가진 것이, 아무리 보아도 마리였다.
“어떻게 마리가 여기에 있어?”
채용 목록에 제일 먼저 마리의 이름을 채워 넣기는 했지만 아직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다.
“영주님께서 먼저 불러주셨어요. 어서 마님을 도우라고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배려였다.
“집사에게 마리 네 이야기를 했거든. 바인 후작가에서 날 모셨던 사람이라고. 아마 그 이야기가 영주님께도 들어갔나 봐. 그래도 이렇게 널 먼저 불러줄 거라고는…….”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우물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니 마리가 익숙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나를 다시 자리에 앉혀주었다.
“영주님께서 마님을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옆에서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시던걸요.”
“저, 정말?”
그렇지 않아도 알테어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며 조금씩 편견이 흐려지고 있던 참이었다. 소설 속의 알테어는 무서운 악역이었지만, 현실의 알테어는 나를 아내로서 존중해주는 것 같았다.
‘그게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괜히 설레발치지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마리의 평가가 더해지니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영주님께선 내게 정말 잘해주셔. 얼마 전에는 옷도 잔뜩 사주셨고, 내가 열심히 한다고 칭찬도 해주셨고, 또 성의 보수나 사용인을 구하는 것도 전부 내 뜻대로 하라고 허락해주셨어.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마리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내 자랑이 이어질수록 어째서인지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저어…… 마님.”
마리가 흐려진 얼굴 그대로 조심스럽게 내 말을 막았다. 왜 그런가 싶어 눈을 껌뻑이며 마리를 바라보니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영주님과 그런 일은 없으셨나요?”
“그런 일?”
“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부부관계에 관한 것은 전혀 없으셔서…….”
부부관계라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무리 귀부인들이 시녀들과 부부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나누며 조언을 얻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런 일이 처음이라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민망했다. 스스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겉으로도 티가 났을 거다. 마리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빙긋 웃으며, 그러면서도 단호한 눈빛을 한 채 소파 앞에 무릎을 꿇어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평탄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부부관계가 아주 중요하답니다. 후계자도 생산하셔야 하고요.”
마리의 말이 옳았다. 후작가를 떠나는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하면서 그 부분을 가장 많이 고민했었으니, 나 역시 귀부인의 의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마리가 두 손을 꼭 잡아 왔다.
“전속 시녀는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누는 사람이니 편하게 말씀해주셔요, 마님.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그, 그게…….”
“혹시 각방을 쓰시는 건가요?”
“아냐.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어.”
“처음에는 그랬다니…… 첫날밤의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던 건가요?”
“좋지 않았다기보다는…… 내가 결혼식을 치르다 기절해버려서 아무 일도 없었어.”
“네?”
마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응. 첫날밤이 그렇게 지나가 버린 탓인지 그 뒤에도 계속…….”
“계속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늘 차분했던 마리가 펄쩍 뛰며 내게 물었다.
“영주님께선 별말이 없으셨고요?”
“응.”
“이제 막 에일스포드에 와서 깊은 사정까지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영주님께서도 상당히 후계자가 급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서두른 거고요.”
“아……?”
마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홀로 고민에 빠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내 머리도 빠르게 굴러갔다. 알테어가 바라는 아내의 역할을 두고 그에게 당당히 말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말씀만 해주시면, 뭐든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생각하시는 것보다 제가 아는 게 많거든요. 분명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모르면 공부할게요. 책을 봐도 되고,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해도 돼요.’
그 이야기를 듣고 알테어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었지.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정말로 그가 결혼한 이유가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미, 미쳤어!’
도대체 뭘 잘할 수 있다고, 열심히 하겠다고 한 거야! 겨우 가라앉았던 얼굴이 다시 화르륵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앞에 두고 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건 말이 안 돼요, 마님. 아무리 마님이 뭘 모르셔도 그렇지, 정상적인 사내라면 이렇게 어여쁜 신부를 두고 한 침대에서 얌전히 잠만 잘 수는 없다고요.”
“내가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배려해주신 걸지도 모르고…….”
“정말로 그런 거라면 마님께서도 알 걸 다 알고, 준비도 충분하다는 걸 알려 드려야겠네요.”
“그런 걸 어떻게 알려 드리는데?”
“그거야 다 방법이 있지요.”
마리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에 목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