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저는 준비 됐어요.2021.08.29.
해가 떨어지고 밤이 가까워지자 불안한 예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이, 이, 이걸 입으라고?”
마리가 내민 옷을 보고 놀라서 뒷걸음질 쳤지만, 그녀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나를 드레스룸으로 이끌었다.
“아주 평범한 잠옷이에요, 마님.”
“이게 어디가 평범해……?”
“귀부인들께서는 다들 이렇게 입으시는걸요.”
“믿을 수 없어. 다들 이런 하늘하늘한 슬립을 입고 잔다고? 불편해서 어떻게 자?”
불신에 가득 차서 마리를 바라보니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벗게 될 텐데 편의성이 뭐가 중요한가요.”
“버, 벗어……!”
차마 밖으로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입을 떡 벌리니 마리가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드레스를 벗겨 주었다.
“밤을 보내는 건 전혀 무서운 게 아니랍니다. 부부라면 당연한 거예요. 여태까지는 시녀가 없어 이런 걸 신경 쓰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제가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셔요. 무사히 후계자를 얻으실 수 있게 돕겠습니다.”
마리의 차분한 목소리에 홀려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어느새 나는 하늘하늘한 슬립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울에 비쳐 보이는 내 모습이 어색해서 몸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거울 속의 여자는 차라리 벗은 게 덜 민망할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부끄러워져 두 손으로 몸을 감싸자 마리가 왜인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탁자에는 와인과 크래커, 신선한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방의 등불도 적게 밝혀 어둑한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이미 부부이신데 노골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마리는 철벽같이 논리를 지켜냈다.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곧 영주님께서 오실 거예요. 저녁 식사로 남성에게 좋은 보양식을 올렸으니, 아마 신호를 눈치채셨을 겁니다.”
이미 알테어가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민망했다. 자연스럽게 첫날밤을 치렀다면 오늘 같은 민망함이 덜 했을까? 아니, 그때도 비슷했을 거야.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은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리가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안심하라는 듯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어린 아가씨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셨는지 모르겠네요. 결혼해 남편도 얻으셨고 앞으로는 아이도 낳아 더 많은 가족이 생길 테니, 더는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외롭다는 말에 민망하고 떨려서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다정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는 쭉 혼자였다. 외로움을 잘 감췄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 있던 마리마저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마리. 나는…… 여기가 좋아.”
“그러셔요?”
“응.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남편이어서 놀랐지만, 겪어보니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되는 것도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고…….”
이어지는 이야기에 마리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소설 속에 등장했던 미래의 알테어가 무시무시한 악역이라는 걸 모르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튼 난 여기서 잘 해낼 거야. 영주님께서 후계자를 바라서 결혼하신 거라면…… 그것도 최선을 다하고 싶어.”
물론 아이를 가지는 건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냐. 약한 생각 하지 말자, 나디아! 자주 시도하면 확률이 더 높아질 테니까 노력도 중요하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의욕을 불태우니 마리가 웃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요. 우리 아가씨는 뭐든 열심히 하시지요.”
“응!”
“우선 저는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혹시 필요한 게 생기시면 설렁줄을 당겨 주세요.”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말로…….’
올 테면 와라, 알테어!
* * *
“영주님.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저녁 식사?”
“예. 안으로 들여도 될까요?”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주방장의 목소리에 알테어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테어는 때맞춰 식사를 챙겨 먹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먼저 요청하지 않으면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방에서도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식사가 준비됐다.
“우선 들어와.”
알테어는 의아한 기분으로 주방장을 안으로 들였다. 일거리가 많아 애쓰는 걸 보고 파벨이 따로 당부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샌드위치 정도를 준비했으려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창한 요리가 하나둘 탁자에 준비되었다. 알테어는 얼떨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 앞으로 다가갔다.
“도대체 이게 다 뭐지?”
“마님께서 보내신 음식입니다.”
“마님? 나디아가?”
“예. 꼭 저녁을 드시라면서 준비하셨습니다.”
주방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남성에게 좋은 음식들입니다. 저 역시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었으니 맛있게 드십시오, 영주님.”
“그러지.”
알테어는 손을 휘휘 내저어 주방장을 밖으로 내보냈다. 나가는 순간까지 과할 정도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주방장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알테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요리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갓 만든 음식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모두 동부에서 유명한 보양식이었다.
‘내가 조금 지쳐 보였던가?’
알테어는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손으로 만져보니 평소보다 피부가 거칠한 것 같기도 했다.
‘괜히 신경 쓰게 했군.’
그렇지 않아도 걱정 많은 사람이니 제 상태를 보고 보양식을 보낸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은 이후, 알테어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왔다. 누군가가 자신을 챙겨주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알테어는 묘한 기분으로 음식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식사를 시작했다. 영주님께서 ‘아마 신호를 눈치채셨을’ 거라던 마리의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 * * 아무리 기다려도 알테어는 오지 않았다.
‘요즘 일이 많아 보이긴 했어.’
평소에도 알테어가 오길 기다리다 먼저 잠들어버린 적도 많았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나치게 노곤한 방의 분위기 때문인지 유독 잠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꾸벅꾸벅 졸며 졸음에 대항하는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소리에 몸을 가득 덮쳤던 졸음이 단번에 달아나는 듯했다.
‘와,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평소와는 복장이 다르다는 걸 알고 어깨를 움츠렸다. 얇게 입은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몸이 살짝 떨렸다.
“오, 오셨어요?”
“이제 막 일이 끝났어. 보내 준 식사는 잘…….”
인사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안으로 들어오던 알테어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입을 살짝 벌렸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내 얼굴에 머물러 있던 알테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민망한 복장에 그도 놀란 게 틀림없었다.
“이게…… 왜…… 잠깐…….”
알테어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이자 괜히 나까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마리가 아실 거라고 그랬는데…… 저녁 식사로 보양식을 올렸다고…….”
우물거리며 슬립을 매만지니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 도대체, 무슨…… 그러니까 그게…… 내가 생각한 의미라면…….”
“제가!”
나는 굳게 마음먹고 혼란스러워하는 알테어를 향해 말했다.
“정답을 찾아냈어요. 알테어가 제게 바라는 아내의 역할이 뭔지요.”
“…….”
“물론 스스로 찾아낸 건 아니에요.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데…… 마리가 그랬거든요. 알테어가 결혼한 이유가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라고요.”
알테어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어딘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지만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런 게 정답이 아닐까 하고…… 또 부부라면 이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세간에 떠도는 이상한 소문이 진실이 아니라면 첫날밤에 못 한 그 일, 오늘 해요.”
내 말을 들은 알테어는 어쩐지 가라앉은 얼굴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바라는 아내의 역할은 이런 거지. 후계자가 급한 상황이라 어떻게든 결혼을 해야 했어. 아내의 사정이야 어떻든 내 목적을 위해서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알테어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긴장으로 입이 바싹 말라왔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알테어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모습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이상하지. 손만 뻗으면 뭐든 내 뜻대로 될 텐데, 이걸 억지로 밀어붙여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어.”
알테어의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향했다. 차갑고 매서운 눈길이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단순히 의무를 위해서 내키지 않는 일을 할 필요는 없어. 후계자가 급한 건 사실이고, 주위에서도 부추기고 있지만…… 준비가 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으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알테어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멍하니 알테어의 이야기를 되새기던 나는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알테어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팔을 빼냈다.
“기다려줄 수는 있지만, 너무 자극하는 건 곤란해.”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그 이야기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손을 뻗어 알테어의 팔을 붙잡았다.
“왜 제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전 준비 됐어요. 정말로요.”
“그거야 주변에서 부추기니까 거절 못 하고 괜히…….”
“제가 답답한 성격인 건 알아요.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거절해서 미움을 받는 것도 무섭고…… 그게 맞기는 한데요. 그래도 전 어른이에요.”
나는 알테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알테어의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일지 아는데요, 이런 일까지 타인의 이야기에 휩쓸려서 결정하지는 않아요. 이건 온전한 제 결정이고, 제 판단이에요. 저는…… 준비가 됐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가자 알테어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건가 싶어 바보같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정말인데…… 전 알테어랑 제대로 부부가 되고 싶고…… 또 아이도…….”
마지막 항변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스스로를 향해 작게 욕설을 내뱉은 알테어가 예고도 없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