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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거대하고 단단해. (25/170)

26화. 거대하고 단단해.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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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급하고 거칠게 안으로 파고드는 알테어를 감당하기 힘들어 몸이 뒤로 떠밀렸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655092394018.png‘앗!’

그렇게 뒷걸음질 치다 무엇인가에 걸려 몸이 뒤로 넘어갔다. 고통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픔이 아니었다. 대신 포근한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슬쩍 눈을 뜨니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였다. 알테어에게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침대가 있는 곳까지 밀려왔던 모양이었다. 알테어는 두 팔 사이에 나를 가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살짝 벌어진 입술이 평소보다 더 붉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저 입술이 내 입술과 빈틈없이 맞닿아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1655092394018.png‘설마 꿈인가?’

알테어의 등장과 함께 졸음이 모두 달아났다는 것은 착각이고, 나는 여전히 수마에 잠긴 채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현실감을 느끼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알테어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는 순간 그가 움찔하더니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아 움직임을 저지했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혀 심장이 쿵쿵 뛰었다.

1655092394018.png‘현실이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알테어가 입을 열었다.

16550923940203.png“정말로…….”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16550923940203.png“정말로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거야?”

1655092394018.png“이해하지 않았다면 이런…… 옷을 입고 알테어를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스스로도 민망해 우물거리자 알테어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 얇은 슬립으로 겨우 가린 몸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16550923940203.png“원래 이런 옷을 가지고 있었어?”

1655092394018.png“아뇨. 그게 아니라 마리가…….”

16550923940203.png“마리. 후작가에서부터 널 모셨다는 그 시녀로군.”

알테어가 마리의 이름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턱이 도드라지는 게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1655092394018.png“마리는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거예요! 제가 워낙 답답하게 구니까 도와주려고요.”

시녀가 남작 부부의 일에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 것인가 싶어 나는 서둘러 마리를 감쌌다.

1655092394018.png“그러니까 마리를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16550923940203.png“내가 왜 그 시녀를 나무랄 거라고 생각해?”

1655092394018.png“그거야…… 지금 화난 것 같았고…….”

16550923940203.png“화나지 않았어.”

1655092394018.png“하지만 표정이 무서워졌는걸요.”

솔직하게 대답하자 알테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23940203.png“내 인상이 그리 선하지 않다는 건 알아.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하지만 난 시도 때도 없이 화내는 사람이 아냐. 특히 내 아내에게는 더 그럴 거고.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1655092394018.png“무……무섭지 않아요!”

물론 처음에는 무서웠다. 그가 날 쳐다보기만 해도 오싹해져서 몸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알테어는 자신의 것을 소중히 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선 밖의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아직 그의 선 안에 있었다. 그 안온함이 소심하고 심약한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가끔 악역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를 느낄 때면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긴 하지만…… 이건 차차 익숙해지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16550923940203.png“지금도 떨고 있잖아.”

1655092394018.png“그거야…… 지금 상황은 조금 다르니까…… 상황은 이해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잠시 대화가 이어진 덕분에 긴장이 살짝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알테어의 아래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거리도 여전히 가까웠다.

16550923940203.png“그러니까…… 무서운 게 아니다?”

1655092394018.png“그렇게 못 믿으시겠다면…… 이런 건 어때요? 정말 무서운 상황이면 제가 신호를 드릴게요. 우리끼리 미리 암호를 정해요.”

16550923940203.png“무슨 암호?”

1655092394018.png“예를 들면…… 제가 체리 사탕이라고 말하면 진짜 무서운 상황인 거죠.”

16550923940203.png“뭐? 왜 하필 체리 사탕이야?”

1655092394018.png“달콤한 걸 떠올리면 덜 무서워질까 싶어서…… 컵케이크나 푸딩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내가 눈을 반짝이며 동의를 구하자 알테어가 못 말리겠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16550923940203.png“뭐…… 체리 사탕이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해.”

1655092394018.png“네!”

체리 사탕, 체리 사탕. 머릿속으로 가만히 암호를 되새기고 있으니 알테어가 붙잡고 있던 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테어를 보자 그가 차분하게 식은 눈으로 내게 물었다.

16550923940203.png“지금은 어때?”

1655092394018.png“네?”

16550923940203.png“체리 사탕이야?”

알테어의 두 눈이 진지하게 나의 의중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붕붕 저으며 부정했다.

1655092394018.png“아니에요.”

16550923940203.png“그럼…… 이건?”

이번에는 알테어가 조금 더 거리를 좁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1655092394018.png“흣……!”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몸이 움찔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이 정도를 무서워한다면 제대로 된 아내 역할을 할 수가 없다.

16550923940203.png“그럼…… 더 아래는?”

알테어의 시선이 서서히 가슴과 복부를 지났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몸이 꼬일 것 같았다.

16550923940203.png“여전히 무섭지 않아?”

1655092394018.png“……네. 안 무서워요.”

조심스러운 대답에 알테어가 쇄골에 입술을 맞췄다.

16550923940203.png“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

1655092394018.png“마리가 좋은 향유를 준비해줬거든요. 아마 그 냄새인가 봐요.”

16550923940203.png“그런 향이 아냐. 그냥 네 냄새가…… 너무 좋아.”

알테어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이한 감각이 온몸을 잠식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체리 사탕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도 밤이 완전히 지날 때까지 계속, 체리 사탕이라는 둘만의 암호는 속으로 삼키며 모든 것을 그와 나누었다. 길고 긴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평소라면 안나가 부스럭대며 세숫물을 준비하는 소리에 잠을 깼을 텐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그런 소란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양껏 잠을 잔 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산뜻한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55092394018.png“으으……!”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져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1655092394018.png‘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많이 써서 그런가.’

원인을 파악하며 지난 밤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남녀의 밤이 어떤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평범한 여인들과 달리, 나는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에서 살다 온 빙의자이기 때문에 실전에 당황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1655092394018.png‘하지만…… 완전히 달랐어.’

몸을 겹쳐오는 남자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단단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그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물론 알테어는 최선을 다해 나를 배려해주려고 애썼다. 힘든 와중에도 그 점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1655092394018.png‘그렇지만 중간 이후로는 알테어도 완전히 자제심을 잃어서…….’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그의 아래에서 울다 지쳐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1655092394018.png‘미, 민망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지는 그런 행위를 했었다니! 부부들은 매일 이런 걸 하는 걸까? 왜 부부를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있다는 나의 자신감은 그저 허세에 불과했다. 당당하게 ‘다 알아요!’라고 외쳤던 내 모습을 떠올리니 더 민망했다. 민망함에 몸부림치다 손끝에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닿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잠을 깬 건지 알테어가 두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092394018.png‘헙!’

당황해서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16550923940203.png“왜 놀라?”

1655092394018.png“아직 옆에 계신 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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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23940203.png“난 함께 밤을 보낸 아내를 혼자 내버려 두는 무뢰한이 아냐.”

알테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으로 꼼꼼하게 나를 살폈다.

16550923940203.png“몸은 어때?”

1655092394018.png“어어…… 괜찮아요.”

애매하게 우물거리자 알테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16550923940203.png“이제 우리는 예의 차릴 필요 없는 사이 아닌가? 솔직하게.”

1655092394018.png“조금…… 아파요. 막 두들겨 맞은 거 같아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눈앞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루퉁하게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당황한 건지 머뭇거리며 가볍게 내 등을 쓸어 내렸다.

16550923940203.png“그렇게 아프면 의사를 부르라고 하지.”

1655092394018.png“의, 의사요?”

16550923940203.png“그래.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며. 그럼 의사를 불러야지.”

알테어가 진지하게 말했다. 날 놀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아프니 의사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1655092394018.png“의사는 필요 없어요!”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의사가 오면 아픈 원인을 물을 텐데…….

1655092394018.png‘어제 남편과 너무 과격한 밤을 보내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아프다는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던 탓에 알테어는 쉽게 의견을 물리지 않았다.

16550923940203.png“그…… 어제 일로 뭔가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잖아. 의사를 불러서 진찰받도록 해.”

1655092394018.png“아니에요! 정말로 괜찮아요! 이런 문제를 의사에게 말하는 것도 조금 민망하고…….”

16550923940203.png“아. 그런 거라면…….”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드디어 내 기분을 이해해준 모양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알테어가 가볍게 내 등을 토닥이고는 먼저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이불에 가려져 있던 그의 몸이 고스란히 시야에 가득 찼다. 옷을 입고 있을 때도 그랬지만, 알테어는 몸이 아주 좋았다. 오랫동안 검을 단련한 덕분인지 모든 곳이 강철처럼 단단했다. 만져보지 않아도 그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 민망해 이불을 잡아당겨 눈을 가리자, 알테어가 다시 이불을 끌어 내렸다.

16550923940203.png“이미 다 봤으면서 이제 와 부끄러운가?”

1655092394018.png“어제는 밤이었잖아요. 좀 더 어두웠고…….”

이렇게까지 적나라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보며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16550923940203.png“익숙해지는 게 좋을걸.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보게 될 거 아냐.”

1655092394018.png“시, 시도 때도 없이요?”

16550923940203.png“너도 아이를 갖고 싶다며. 확률을 높이려면 시도해야 하고, 그럼 시도 때도 없이 이걸 보게 되겠지.”

1655092394018.png“이, 이걸…….”

알테어의 말을 되풀이하며 나도 모르게 시선이 한 방향으로 향했다. 알테어도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툭 건드렸다.

16550923940203.png“아닌 척하더니 아주 엉큼한 부인이시군.”

1655092394018.png“그게 아니라…….”

1655092394018.png‘이렇게 눈에 띄는 게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어.’

억울해져서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자 알테어가 스스로 옷을 찾아 입으며 내게 말했다.

16550923940203.png“오늘 재단사가 가봉한 옷을 가져온다는군.”

1655092394018.png“아. 그럼 오늘 알테어의 옷도 맞추는 거네요?”

재단사가 내 옷을 가져올 때 알테어의 새 옷을 맞추기로 했으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도 알테어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23940203.png“꼭 나까지 맞춰야 해? 난 뭘 입든 상관없어. 좋은 옷을 차려입는 게 익숙하지도 않고.”

알테어의 목소리가 낮고 싸늘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 말에 놀라 뜻대로 하시라며 물러났겠지만, 이제는 조금 용기가 생겼다. 나는 이불을 꼭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1655092394018.png“익숙하지 않다고 좋은 걸 누리는 일을 포기하면 안 돼요.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겨야죠. 그리고 저도…… 재미를 좀 보고 싶은걸요.”

16550923940203.png“재미?”

1655092394018.png“남편한테 멋진 옷을 입히는 재미요.”

16550923940203.png“……네가 그렇다면.”

말은 거기에서 끊겼지만 맞춰주겠다는 뜻이다. 알테어가 내 뜻을 따라주었다는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히죽거리자 옷을 입고 있던 그의 입가에도 어쩐지 미소가 살짝 걸린 것 같았다. 어차피 기분 탓이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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