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마님의 연인?2021.09.05.
“……영주님. 손이 멈추셨습니다.”
알테어의 곁에서 업무를 보좌하던 파벨이 조심스럽게 그의 게으름을 지적했다. 그리 중요한 서류가 아닌데도 벌써 몇 분째 같은 서류에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아.”
지적을 받고서야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걸 보면 정말로 넋을 놓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넋을 놓고 있는 알테어 에일스포드라니. 살면서 이런 알테어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파벨은 알테어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가져가 검토가 완료된 쪽으로 분류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 상당히 이상하십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말로는 툴툴대고 있지만, 머쓱하게 목을 매만지는 걸 보면 알테어 스스로도 자신의 이상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왜 이러시는지는 짐작이 되는데…….’
파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단사를 만나 옷을 맞추는 내내 나디아와 알테어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었던 걸 떠올린 것이다.
“마님과 무슨 일 있으셨죠?”
“……아니?”
“일이 있으셨던 게 확실하군요.”
“내가 방금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그렇게 귀가 빨개지셨는데 아니라고 대답한다고 아닌 게 되나요.”
파벨이 어깨를 으쓱하며 안경을 고쳐 쓰자, 알테어가 황급히 손으로 제 귀를 매만졌다. 정말로 귀에 열이 오른 모양인지 뜨끈한 체온이 느껴져 민망해진 알테어가 헛기침하며 다음 서류로 손을 뻗었다.
“신경 꺼. 내 부인과 무슨 일이 있었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마님과 영주님의 관계에 에일스포드의 안정이 달렸는데, 집사로서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죠. 어제 주방장이 올린 보양식은 효과가 있던가요?”
“보양식이든 뭐든 신경 쓰지 말라고…… 뭐?”
반사적으로 파벨의 말을 쳐내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파벨이 여유롭게 싱긋 웃자 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래 봬도 집사입니다. 성 돌아가는 사정은 다 알죠.”
“……그 수작에 또 누가 동참했지?”
“수작이라니요, 영주님. 그저 에일스포드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죠. 성에서 일하는 자들의 당연한 본분입니다.”
알테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부부가 밤을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고 영주 부부의 사이가 좋은 것이 알려져서 나쁜 일은 없을 테지만, 어쩐지 구경거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 민망했다. 알테어는 애써 민망함을 떨쳐내며 화제를 돌렸다.
“그 이야기는 됐다. 블란은 복귀했나?”
블란에게 지난번 마리와의 대면에서 얻은 ‘카산드라의 미소’라는 반지에 대해 조사를 맡겨두었는데, 지금쯤이면 슬슬 결과를 가져와야 할 시간이었다.
“아. 블란은…….”
파벨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블란입니다.”
마침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터라 알테어와 파벨이 시선을 교환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마수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라든가, ‘이래서야 귀족은 못 되겠네’라는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들어와라.”
알테어의 허락에 블란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자, 알테어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인사는 됐다. 조사 결과는? 뭔가 알아냈나?”
“네. 우선 말씀하신 반지의 소유주를 알아냈습니다.”
“누구지?”
“바스몬티 백작이라는 자입니다. 비옥한 농토를 소유한 서부의 귀족인데, 몇 해 전 경매를 통해 반지를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귀한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라 꽤 큰 금액에 낙찰받은 모양입니다.”
“경매에 오르기 전의 이력은?”
“반지를 경매에 올린 건 수도의 유명한 경매상인데, 그는 수도의 젊은 화가에게 물품을 매입했다더군요. 딜리온이라고, 그리 유명한 화가는 아니고, 귀족 가문의 초상화를 주로 그리는 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어떻게 귀한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소유하고 있었지?”
“그래서 또 제가 그 화가를 찾아갔죠.”
블란이 뿌듯하게 가슴을 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입수 경로에 대해 입을 다물더군요. 하지만 약간 겁을 줬더니 금세 사실을 말해줬습니다. 바인 후작의 조카에게 받았다더군요.”
“그가 말하는 바인 후작의 조카가…….”
“예. 저희 마님이십니다.”
“무슨 이유로 반지를 줬다고 하던가?”
“이유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습니다. 말했다간 자기 밥줄이 끊길 거라면서요. 밥줄이 끊겨 죽으나, 입을 다물어서 죽으나 똑같으니 그냥 자길 죽이라며 드러눕는 바람에…… 더는 못 캐냈습니다.”
“그런가.”
단순히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희 마님께서 왜 젊은 화가에게 귀한 반지를…….”
파벨이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딜리온이라는 자는 마님의 애인이었던 건가? 값비싼 반지를 줄 정도로 깊은 사이였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이어지지는 못했고?’
긍정적인 답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부정적인 결론에만 도달할 뿐이었다.
“……우선 그 반지를 매입했으면 하는데.”
오랜 침묵 끝에 알테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블란에게 명령했다.
“반지를요?”
“그래.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지 않는다면 조용히 값을 치르고 구입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면요?”
“약간 겁을 주는 것도 좋겠지.”
“아. 그거라면 제 특기죠.”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블란이 과장스러울 정도로 발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알테어의 굳은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겨우 마님과 영주님의 사이가 좋아졌는데 이런 복병이 등장하다니. 블란과 파벨 형제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교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며칠이 지나자 드레스룸으로 줄줄이 새 옷이 들어왔다. 얼마 전 가봉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사이즈를 체크했던 의상들이 완성되어 에일스포드 성으로 배달된 것이다.
“와아! 정말 예뻐요, 마님!”
아름다운 옷과 그에 맞춘 모자와 장갑이 들어올 때마다 안나가 신이 난 얼굴로 손뼉을 쳤지만, 마리는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의상은 어느 정도 갖춰졌네요. 하지만 함께 착용할 장신구가 아직 많이 부족하더군요.”
“장신구까지 한꺼번에 갖추려면 지출이 너무 크잖아. 천천히 해도 돼.”
아무래도 고가이다 보니 쇼핑을 즐기는 귀족들도 장신구까지는 자주 구매하지 않았다. 대신 선대부터 전해져오는 보석을 유행에 따라 세팅만 바꾸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서 깊은 가문에는 그들을 상징하는 보석이나 장신구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도 내게 반지를 하나 물려주셨지.’
일명 카산드라의 미소라고 불리는 반지로, 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든 것이었다. 원래는 목걸이로 사용하던 것을 외할머니께서 반지로 바꾸었다고 들었다.
‘이제 더는 내 손에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시겠지. 허전한 마음에 가만히 손을 바라보고 있으니,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마리가 내 기분을 눈치채고는 드레스룸으로 살짝 등을 떠밀었다.
“새 옷이 왔으니 바로 입어보셔요. 기분 전환이 되실 거예요.”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일정도 없고…….”
요즘 알테어는 본격화된 광산 개발을 지휘하느라, 나는 성의 보수에 매달리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에일스포드 성을 돌아다니며 보수 상황을 점검할 예정인데, 공사 중인 곳을 살피다 보면 새 옷이 금세 더러워질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러나 마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일정이야 만들면 되지요. 영주님께 산책하러 가자고 하면 어떨까요?”
“지금 제가 여쭤보고 올게요!”
마리가 운을 띄우며 슬쩍 안나를 바라보자, 안나가 눈치 빠르게 활짝 웃으며 방을 나섰다. 말릴 새도 없이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얼떨떨하게 안나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으니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새 옷을 꺼내왔다.
“자. 이제 특별한 일정이 생겼네요?”
“영주님께선 바쁘셔. 거절하실 수도 있어.”
“어머. 그럴 리가요. 그럴 분이셨다면 밤마다 마님을 힘들게 하시지도…….”
“아, 아, 아, 알았어! 옷 입으러 가자! 와아, 예쁘다!”
마리의 입에서 민망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기세라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고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한 꺼풀 옷이 벗겨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안나가 돌아온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생각지도 못하게 알테어의 모습이 보였다.
“안나를 만나셨어요?”
“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녀와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함께 산책하러 갈까 싶어서 안나를 보냈거든요.”
“그랬나? 하지만 그 차림으로는 산책이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알테어가 슬립 차림의 모습을 지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내 모습이 실감 되어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가릴 것이 없어 안절부절못하다 두 팔로 몸을 감싸는 나를 보며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렸다.
“다 벗은 것도 봤으면서 슬립 차림이 부끄러워?”
“그, 그거랑은 달라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건 과정 중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거고, 이건 그게 아니니까…….”
“그럼 지금 같이 자면 ‘과정 중’이 되니까 그 차림이 안 부끄러워진다는 소리야?”
“논리가 이상해요.”
“왜? 과정 중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 괜찮다며.”
“그건…….”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알테어가 내 앞으로 척척 걸어왔다. 눈치 빠른 마리는 어느새 뒤로 물러나 문을 닫고 사라진 뒤였다. 아군을 잃은 나는 더욱 당황해 얼굴이 벌게졌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요즘 바쁘셔서 낮엔 좀처럼 시간을 못 내셨잖아요.”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급한 일인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계속 의문을 가지고 있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야. 뒤를 캐면 답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당사자의 입으로 듣고 싶군.”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의아해졌다.
“저에 관한 일인가요?”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편하게 물어보세요.”
“딜리온이라는 화가를 알지?”
가볍게 건넨 질문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이름이 들려왔다. 나는 놀라서 숨을 들이켜며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이 반지도, 당연히 알 것이고.”
알테어의 품에서 익숙한 반지가 나왔다. 카산드라의 미소였다.
“어떻게 알테어가 이걸 가지고 있어요?”
“정당한 과정을 거쳐 구매했어.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니 딜리온이라는 화가가 나왔고, 그에게 이 반지를 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도 알게 됐지.”
“……분명히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었는데.”
딜리온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낭패감에 빠져 입술을 질끈 깨물자 알테어가 내 손에 반지를 쥐여 주며 허리를 굽혔다. 훌쩍 가까워진 얼굴이 심각한 듯 굳어져 있었다.
“당신의 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물건이었다는데, 이걸 왜 그에게 줬지?”
“…….”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아 머뭇거리자 알테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정말로 그가 당신의 연인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