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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이건 우리 문제야. (27/170)

28화. 이건 우리 문제야.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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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24392999.png“애인이요?”

소심해서 집에만 틀어박혀 살았던 내가 그런 대담한 일을 벌였을 리가 없다.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추측에 나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16550924392999.png“그런 거 아니에요! 사정이 있었어요!”

16550924393008.png“젊은 남자에게 그런 귀한 반지를 줬으니 정당한 의심이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알게 되어도 똑같이 생각하겠지.”

16550924392999.png“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래서 딜리온도 꼭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16550924393008.png“안타깝게도 그놈의 입이 검 앞에서까지는 무겁지 않더군.”

나는 날카롭게 빛나는 알테어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검 하나로 가볍게 상대의 목을 베어 넘기던 소설 속 알테어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16550924392999.png‘아, 아냐!’

나는 덜덜 떨리려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눈을 부릅떴다.

16550924392999.png‘내가 아는 알테어는 소설 속 악역 알테어와는 달라!’

잘 이야기하면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줄 거다. 알테어가 내 이야기를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딜리온이 내 애인이었다는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마음을 다잡고 알테어의 두 눈을 바라보니 그가 차분한 눈으로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싸늘하고 매서운 눈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놓였다.

16550924392999.png“딜리온은 좋은 사람이에요. 곤란해하는 날 도와줬거든요.”

16550924393008.png“그래서 보답으로 반지를 줬다고?”

16550924392999.png“아뇨! 그게 아니라…… 딜리온이 반지를 대신 처분해줬어요.”

16550924393008.png“처분?”

알테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했다.

16550924393008.png“반지를 팔았다는 건가?”

16550924392999.png“네.”

16550924393008.png“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반지라고 들었어. 그걸 왜?”

16550924392999.png“급하게 돈이 필요했어요.”

16550924393008.png“뭐? 돈?”

16550924392999.png“네. 마리가 제 상황을 알고 딜리온을 소개해줬어요. 그가 귀부인들을 대신해서 귀금속을 팔아준다고요.”

알테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부유한 후작가의 아가씨가 왜 급하게 돈이 필요했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듯했다.

16550924392999.png“……부모님의 장례비용이 필요했어요. 두 분께서 묻힐 땅도요.”

여전히 알테어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16550924393008.png“선대 후작 부부의 장례는 당연히 후작가에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인데 왜 당신이 비용을 마련하게 된 거지? 게다가 땅이라니…… 바인 후작가도 가족묘가 있지 않나?”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은 가족 묘지를 위한 땅을 별도로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건 바인 후작가도 마찬가지라, 역대 후작과 직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그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하지만 숙부는 그 당연한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16550924392999.png“숙부님은 제가 땅 이용료를 내지 않으면 두 분을 가족묘에 묻을 수 없을 거라고 했어요. 장례비는 자식인 제가 당연히 부담해야 하는 거라고 했고요.”

16550924393008.png“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두 분은 선대 후작 부부이시니 당연히 가족묘에서 영면하실 자격이 있어.”

16550924392999.png“그게…… 저희 부모님이 가문에 끼친 손해가 너무나 막심해서 그럴 자격이 없대요.”

16550924393008.png“손해라니?”

16550924392999.png“……생전에 부모님께서 막대한 빚을 지셨대요. 사기꾼에게 속아 무의미한 투자를 반복하셨고, 그걸 만회하고자 도박에 빠지셨는데 그마저도 실패했다고요. 숙부께선 제가 묘지 이용료를 내면 부모님의 치부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묻어주겠다고 했죠.”

이야기가 이어지자 알테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그가 부모님에 대해 오해할까 봐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다.

16550924392999.png“물론 전부 숙부님의 주장이에요! 부모님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아요. 그러실 만한 분들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미 숙부님께서 가문을 모두 장악한 상황이라 제가 어떻게 나설 방법이 없었어요.”

후작가의 주요 사용인들도 숙부의 편이었다. 진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만한 이들도 모두 입을 모아 부모님의 실책을 떠들어댔다.

16550924392999.png‘외부에 도움을 청할 생각도 했었지만…….’

숙부는 사교 활동을 활발히 해서 대외적인 이미지가 훌륭할 뿐만 아니라 사교계에 아군도 많았다. 그의 말에는 강한 힘이 있었고, 그것이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16550924392999.png‘애초에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부모님의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지.’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한정적이었다.

16550924392999.png“이번에 지참금으로 가져온 신탁 재산은 결혼 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이 걸려 있었고, 다른 후작가의 재산은 이미 숙부님의 손에 들어가서…… 계속 버티다가는 부모님의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를 것 같아 반지를 팔았어요.”

다행히 딜리온은 계산이 확실한 자였다. 제대로 된 값에 반지를 팔아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숙부가 요구하는 막대한 묘지 이용료도 낼 수 있었다. 그게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이었다. 장례를 치른 후에는 나를 향한 취급도 급격히 나빠졌다. 사용인들은 후작가를 망하게 할 뻔한 선대의 딸이라며 모두가 나를 죄인 취급했다. 마리만이 숙부의 모함을 믿지 않고 나를 도와줬다. 이미 떠나온 후작가의 일들을 떠올리니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날 향한 비난은 참아낼 수 있었지만, 언제나 따뜻했던 부모님을 매도하는 말들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맞서 싸우다 심기를 거스르면 숙부가 헛소문을 퍼트릴까 봐 뭐든 속으로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견뎌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는 눈물을 꾹 참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과거의 무게에 고개가 푹 꺾이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16550924392999.png“믿기 힘드시겠지만 그게 진실이에요.”

16550924393008.png“…….”

알테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확실히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16550924392999.png‘믿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알테어가 터무니없는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순히 악역에게 목이 뎅겅 잘릴까 봐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16550924392999.png‘알테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이제 겨우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노력하는 중인데. 이런 식으로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았다.

16550924392999.png“딜리온과 이 반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혹시 그가 이상한 소문을 퍼트렸나요?”

귀족가의 아가씨가 돈이 필요해서 귀금속을 팔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금세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이고 만다. 대체로 부정적인 일을 저질러 돈을 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나 혼자였으니 오해를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되었으니 더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알테어와 에일스포드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16550924392999.png“죄송해요. 제가 반드시 해결할게요. 알테어와 에일스포드에는 어떤 피해도 주지 않게 방법을…….”

비장하게 고개를 들자마자 알테어의 손가락이 가볍게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덕분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각오가 맥없이 픽 몸 안에서 빠져나가며 입이 살짝 벌어졌다.

16550924393008.png“마리가 널 이해하고 싶으면 카산드라의 미소라는 반지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어. 이건 확실히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군.”

16550924392999.png“……네?”

16550924393008.png“네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소리야. 게다가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네게 문제를 해결하라고는 하지 않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을 껌뻑이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16550924393008.png“내가 널 도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16550924392999.png“날…… 도와준다고요? 알테어가요?”

16550924393008.png“당연하잖아. 넌 내 아내라고. 이제 네 문제가 내 문제고, 내 문제가 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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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테어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16550924393008.png“설마, 넌 내 문제를 네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그래서 이런 반응이야?”

16550924392999.png“그럴 리가요! 알테어에게 문제가 생기면 저도 열심히 나서서 도울 거예요!”

고민도 없이 재빨리 고개를 젓자 알테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16550924393008.png“그래. 그러니까 ‘이건’ 우리 문제지. 너와 내가 결혼한 순간부터 그렇게 된 거야. 내게도 나설 권리가 있어.”

알테어가 말하는 ‘이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매섭게 동의를 종용했다.

16550924393008.png“그렇지, 나디아?”

16550924392999.png“어어…… 네에…….”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잘했다는 듯 내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16550924393008.png“그러니 먼저 어깨에 힘부터 풀어. ‘우리’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

알테어의 손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어깨가 노곤하게 풀렸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에 풀렸던 긴장이 다시 찾아왔다.

16550924393008.png“곧 동부 귀족 회합이니까 넌 그것만 생각해.”

16550924392999.png“그, 그렇죠. 곧 회합이네요.”

엄청난 수의 귀족들이 모여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겠지. 그 장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긴장해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16550924392999.png‘실수하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해야 해.’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큰 이벤트를 잊고 있었다니.

16550924392999.png‘이래서야 남작 부인 실격이잖아!’

이렇게 대책 없이 회합에 참석했다가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다 에일스포드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 거다. 철저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음속으로 다짐을 불태우고 있으니 알테어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16550924393008.png“그럼…… 이제 갈까?”

16550924392999.png“어딜 가요?”

16550924393008.png“내게 함께 산책하자고 할 생각이었다며. 아닌가?”

16550924392999.png“아.”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이벤트를 떠올리기 전의 일이다.

16550924392999.png“죄송하지만 산책은 힘들겠어요. 중요한 일이 생각났거든요.”

16550924393008.png“중요한 일?”

알테어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얼른 설렁줄을 잡아당겨 마리를 불렀다.

16550924392999.png‘회합 전까지 완벽한 남작 부인이 되려면 한시가 급하다고!’

  * * *

16550924529913.png“……영주님. 손이 멈추셨습니다.”

알테어의 곁에서 업무를 보좌하던 파벨이 조심스럽게 그의 게으름을 지적했다. 그리 중요한 서류가 아닌데도 벌써 몇 분째 같은 서류에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16550924393008.png“아.”

지적을 받고서야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걸 보면 정말로 넋을 놓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16550924529913.png‘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인데.’

며칠 전, 정확히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파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그때와 다른 점도 있었다. 알테어의 상태였다. 그날의 알테어는 묘하게 기분이 들떠 보였다면, 오늘의 알테어는 반대로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6550924529913.png“곧 동부 귀족 회합인 건 알고 계시죠? 떠나시면 한동안 업무에 손을 못 대시니 지금 많이 처리해두셔야 합니다, 영주님.”

16550924393008.png“그렇지. 그래야지.”

알테어가 대충 대답하며 서류를 뒤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금세 집중력을 잃고 뚱한 얼굴이 되어버린 알테어를 보며 파벨이 팔짱을 꼈다.

16550924529913.png“이번에도 마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정당한 의문이었다. 최근 알테어를 이렇게까지 휘두르고 있는 존재는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알테어는 단박에 파벨의 짐작을 부정했다.

16550924393008.png“아니.”

16550924529913.png“그럴 리가요. 확실히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16550924393008.png“내 말을 안 믿어? 없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지금도 쭉 없는 중이고.”

불만이 가득한 알테어의 말에 파벨이 잘 모르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답답해진 건지 알테어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24393008.png“요즘 나디아가 매일 기사들을 불러 티타임을 가진다던데.”

16550924529913.png“아. 그거요.”

작은 에일스포드 성에서는 소문이 빨리 퍼져서, 파벨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남작 부인께서 매일 기사들을 두세 명씩 초대해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진다는 이야기였다.

16550924529913.png“마님께서 아주 세심하시더군요. 사실 저도 초대를 받아서 마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16550924393008.png“뭐? 너도 초대를 받았어?”

16550924529913.png“네.”

16550924393008.png“난…… 그런 초대 받은 적이 없는데. 너까지 초대를 받았었다고?”

알테어가 이를 바드득 갈며 손에 힘을 주자, 그가 쥐고 있던 펜이 뚝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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