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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선을 넘는다는 것. (28/170)

29화. 선을 넘는다는 것.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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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벨은 능숙하게 두 동강 난 펜을 치우고 알테어의 손에 새 펜을 쥐여주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알테어가 황당하다는 듯 파벨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책상 위의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16550924660164.png“어서 이 서류를 다 처리해야 마님의 티파티에도 참석하실 수 있겠지요?”

16550924660169.png“티파티라니. 난 그런 거 초대받은 적도 없다고.”

16550924660164.png“초대를 받을 필요가 없죠. 에일스포드에서 열리는 파티에, 에일스포드의 주인이신 영주님이 참석하겠다는데 누가 막습니까.”

알테어가 그런 발상은 하지도 못했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파벨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16550924660164.png“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영주는 사교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16550924660169.png“됐다.”

파벨의 잔소리가 길어지려는 낌새를 느낀 알테어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저지하고는 재빨리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서류 검토에 속도가 붙자 파벨도 만족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빠르게 서류가 줄어들어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르자 가만히 알테어를 보조하고 있던 파벨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16550924660164.png“저…… 영주님.”

16550924660169.png“말해.”

16550924660164.png“제가 나설 일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마님과 연관된 일입니다.”

마님이라는 말에 알테어가 펜을 내려놓고 파벨을 바라보았다.

16550924660164.png“얼마 전 마님과 대화를 나누다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리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날 구박하지 않은 유일한 시녀’라고 하셨죠. 아무래도 이게 마음에 걸려서요.”

16550924660169.png“…….”

16550924660164.png“혼납금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반응도 조금 이상하셨고, 아무래도 후작가에서의 처지가 그리 좋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단순히 좋지 않은 것을 넘어서…….”

16550924660169.png“됐다. 거기까지만 해라.”

생각보다 차분하게 자신의 말을 자르는 알테어의 반응에 파벨의 눈이 커졌다.

16550924660164.png“혹시……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16550924660169.png“대략적으로는. 나디아에게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16550924660164.png“그럼 블란이 요즘 수도에서 계속 첩보 활동을 하는 것도…….”

블란은 반지 문제가 해결된 후, 곧장 새로운 임무를 받고 수도로 떠났다. 매일 영주의 방 창문으로 날아드는 전령 새를 보며 블란이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는 짐작했었지만, 그게 마님에 관련된 일인 줄은 몰랐다.

16550924660164.png“마님께서 큰 결심을 하셨군요.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데요. 그만큼 영주님을 신뢰하고 계신다는 거겠죠.”

16550924660169.png“그거야…… 뭐…… 난 그 녀석의 남편이고…….”

알테어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16550924660169.png“그러는 너도 용케 선을 넘을 생각을 했군. 사용인의 도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

제게 돌아온 화살에 파벨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용인의 도리란 간단하다. 주인의 일에 감히 입을 열지 않고, 명령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것이 사용인과 주인 사이의 선이다. 알테어에게 늘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파벨은 영주의 중요한 결정이나 집안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의견을 보탠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번 일에는 먼저 나섰다.

16550924660164.png“……마님께서 먼저 선을 넘으셨으니까요.”

16550924660169.png“나디아가?”

16550924660164.png“예. 마님께서 먼저 저희 에일스포드 사람들을 가족처럼 여겨주셨으니, 감히 제가 선을 넘어볼 수 있었던 겁니다.”

이 커다란 제국을 아무리 뒤져도 사용인을 돕기 위해 직접 물에 뛰어드는 마님은 찾을 수 없을 거다.

16550924660164.png‘하지만 우리 마님은 그러셨지.’

파벨은 잠시 나디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알테어가 결혼해 에일스포드의 안주인이 생긴다고 할 때, 수도에서 온 마님의 비위를 맞추며 내정을 도우려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자신을 무시하고 내정에서 밀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문에서 오래 일한 집사야말로 외부에서 온 마님들의 가장 큰 라이벌이니 말이다.

16550924660164.png‘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그랬던 파벨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나디아였다. 그녀는 에일스포드의 살림을 장악하려는 생각도, 파벨의 기를 눌러 위엄을 세우겠다는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사소한 문제도 파벨을 불러 함께 상의하고 그의 의견을 구했다.

16550924660164.png‘게다가…….’

자기만의 성에 꽁꽁 갇혀 있던 차가운 영주님의 외로운 마음까지 녹여내고 있으니 이보다 멋진 마님이 어디 있을까. 그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원칙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16550924660164.png“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16550924660169.png“그런 건…… 나도 알아.”

알테어가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빠르게 마지막 서류를 검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0924660169.png“꽃을 준비해야겠어. 빈손으로 부인의 티타임에 갈 수는 없잖아.”

16550924660164.png“좋은 생각이십니다.”

16550924660169.png“그리고 나디아의 문제는 함구하도록 해.”

이건 귀족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였다. 나디아가 후작가에서 받은 취급이 알려진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가엾게 여길 것이다. 귀족 사회에서 ‘불쌍한 사람’ 취급을 받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귀족의 자존심과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뜻이니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 것이다.

16550924660169.png‘그러니 이런 사실이 밝혀질 타이밍은…….’

완벽한 복수를 할 수 있을 때.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조용히 몸을 낮추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

16550924660164.png“물론입니다.”

알테어의 뜻을 이해한 파벨도 더 이상의 의문을 품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16550924660164.png“그리고 마님께 선물할 꽃은 튤립이 어떨까요?”

16550924660169.png“……분홍 튤립으로 하지.”

16550924660164.png“마님의 머리카락 색에 맞추셨군요.”

파벨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흐음’ 하며 콧소리를 흘렸다. 장난기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16550924660164.png“아무래도 영주님께서는 제 생각보다 훨씬 낯간지러운 면이…….”

16550924660169.png“파벨. 너, 갈수록 블란을 닮아가는 것 같다.”

16550924660164.png“형제니까 어쩔 수 없지요.”

16550924660169.png“이왕이면 좋은 점을 닮으란 말이야. 어째 나쁜 것만 골라서 닮아가는지.”

16550924660164.png“원래 나쁜 물이 더 들기 쉽지요.”

16550924660169.png“……한 마디도 안 지는 건 예전부터 똑같았지.”

투덜거리며 집무실을 벗어나는 알테어의 뒷모습을 보며 파벨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16550924660164.png‘확실히 요즘 영주님은…….’

보기 좋다.

16550924660164.png‘계속 이런 평화가 이어지면 좋을 텐데.’

그러나 곧 다가올 회합이 걱정스러웠다. 알테어의 사교활동 자체도 오랜만이었지만, 그곳에 알테어를 끌어들인 사람이 발하일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음흉한 인간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알테어를 회합에 불렀을 리가 없으니 뭐든 사건이 터질 것이다.

16550924660164.png‘물론 영주님도 그 부분을 확실히 알고 계시니까.’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거다.

16550924660164.png“그러니까, 우선은 튤립이란 말이지.”

파벨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 * *

16550924773905.jpg“차 향이 정말 좋습니다, 마님!”

16550924773905.jpg“이렇게 맛 좋은 홍차는 처음입니다!”

맞은편에 앉은 기사들이 신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의 손님은 셋이었는데, 특히 카인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16550924773912.png“다들 차 맛도 모르면서 뭐가 좋다는 거야? 이놈들 말에 속지 마십시오, 마님. 다들 맥주 맛이나 알았지 차 맛은 전혀 모르니까요.”

카인의 고자질에 차 맛을 칭찬하던 기사들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말이 너무 명확한 진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16550924773916.png‘어쩐지 귀여워.’

커다란 덩치의 기사 셋이 작은 찻잔을 들고 어색해하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타인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건 나쁜 일이지만, 기사들을 초대할 때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은근히 즐거웠다.

16550924773916.png‘나, 은근히 성격이 나쁜 걸지도 몰라.’

게다가 이래서야 전혀 연습이 되지 않는다.

16550924773916.png‘회합에서 만날 귀족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는 귀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연습하려고 했던 건데…….’

티타임에 초대한 기사들은 조금이라도 대화의 공백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입을 열어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내가 곤란해하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거였겠지만, 그들의 친절 덕분에 당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티타임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16550924773916.png‘이래도 괜찮은 걸까……?’

마음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으니,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카인이 넉살 좋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16550924773912.png“마님께서 저희들을 티타임에 초대해주셨으니, 다음에는 저희가 마님을 축제에 초대하겠습니다. 맥주 맛도 제대로 알려드리고요. 아마 회합에 참석하고 돌아오시면 딱 축제가 가까워져 있을 겁니다.”

16550924773916.png“축제요?”

16550924773912.png“예. 곧 마을에서 축제가 크게 열립니다. 이 부근에는 마수가 워낙 많으니, 그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하고 하늘에 비는 거지요. 수도에는 이런 축제가 드물지 않습니까?”

16550924773916.png“네. 건국제가 있긴 하지만…….”

귀족들은 모두 황궁에 모여 무도회를 열고 화려한 파티를 즐겼다. 카인이 말하는 축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일 것 같았다.

16550924773912.png“아주 재밌을 겁니다. 영주님께서는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셔서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셨지만…… 이번에도 안 가신다고 하면 저희가 마님을 모시고 갈게요.”

사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부담스러웠지만, 기사들의 호의를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기사들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16550924773905.jpg“영주님.”

16550924773916.png‘영주님?’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니 정말로 알테어가 서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놀라 삐걱대고 있으니 알테어가 척척 안으로 걸어와 내 앞에 무엇인가를 불쑥 내밀었다. 눈으로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향긋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커다란 분홍색 튤립 꽃다발이었다.

16550924660169.png“받아.”

16550924833338.jpg“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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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테어의 말에 나란히 선 기사들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박수를 쳤다.

16550924773905.jpg“이런 거 연극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16550924773905.jpg“나도.”

수군대는 소리에 알테어가 매섭게 기사들을 노려보자, 카인이 특유의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의 옷깃을 붙잡아 질질 끌고 나갔다.

16550924773916.png“어어…….”

초대한 손님을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건가 싶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알테어가 내 품에 꽃다발을 안겨주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쳐 움찔하자 그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물었다.

16550924660169.png“어딜 보는 거야. 이 손님은 마음에 안 들어? 저쪽이 좋은 건가?”

16550924773916.png“그, 그게 아니라…… 제가 초대한 손님인데 알테어가 쫓아내서…….”

16550924660169.png“난 쫓아낸 적 없어. 쟤들이 도망간 거다.”

16550924773916.png“그게 그거잖아요…….”

이래서야 회합 전까지 ‘대화를 주도하는 멋진 귀부인’이 되기는 힘들 것 같다.

16550924773916.png“그래도 고마워요.”

16550924660169.png“뭐가? 쟤들 쫓아낸 거?”

16550924773916.png‘쫓아낸 거 아니라더니.’

결국 이렇게 시인하는구나.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16550924773916.png“아뇨. 이 꽃 선물…….”

하지만 미처 감사를 전하기도 전에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와서 부딪혔다. 눈을 동그랗게 뜨니 알테어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도 놀란 듯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의 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16550924660169.png“……네가 웃어서 그렇잖아.”

알테어가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16550924773916.png“그, 그러니까 이게 제 탓이라는 거예요?”

가만히 있다가 입맞춤을 당한 나는 억울해져 그에게 항의하며 한 걸음 크게 다가섰다. 그러자 알테어가 가까워진 만큼 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16550924660169.png“네 탓이라는 게 아니라, 네가 그렇게 웃으니까, 내가 나도 모르게…….”

16550924773916.png“그, 그게 제 탓이라는 소리잖아요.”

16550924660169.png“그러니까 누굴 탓하려는 게 아니라…….”

16550924861918.jpg“크흠.”

그렇게 서로 투덕대고 있으니 옆에서 잠시 잊고 있던 마리가 크게 헛기침 소리를 내며 제 존재를 알렸다.

16550924660169.png“언제부터…….”

그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지 알테어가 뻣뻣하게 굳어서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평소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빙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16550924861918.jpg“처음부터 쭉 여기 있었습니다, 영주님. 차 한잔 준비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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