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2021.09.15.
“……차는 됐어. 티타임에 대한 소문을 듣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알테어가 손님을 다 쫓아내서 티타임은 이걸로 끝인걸요.”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멋쩍은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가 미안해하길 바라며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꽃 선물까지 준비해 온 사람을 타박한 격이 되어버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알테어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끌었다.
“그럼 알테어가 손님 할래요? 같이 차 마셔요.”
“내가?”
“네!”
알테어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티타임 테이블은 그의 등장으로 기사들이 황급히 떠나는 바람에 찻잔이며 식기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지만, 마리의 능숙한 손길로 금세 깔끔해졌다.
“물이 식었으니 다시 따뜻한 물을 준비해오겠습니다.”
알테어 앞에 새 찻잔과 식기를 내어준 뒤, 마리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 주며 내게 싱긋 웃어 보였다.
‘아마 둘만의 시간을 즐기라며 배려해준 거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알테어도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능력은 없었는지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어색한 분위기에 내가 난처해질까 봐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던 기사들을 상대하다 지나치게 말 없는 남편을 앞에 두고 있으니 긴장해서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이래서는 안 돼.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잖아! 늘 분위기도 좋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멋진 귀부인이 되자!’는 다짐을 되새기며 비장하게 숨을 들이켰다. 알테어처럼 과묵하고 차가운 상대와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상대해도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은…… 다 마무리하셨나요?”
조심스럽게 묻자 알테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할당량은 마무리했다.”
“꽃은 직접 준비하신 거예요?”
“파벨을 조금 고생시켰지.”
“식사는 하셨고요?”
“간단하게는.”
“…….”
여러 가지 화제를 꺼내 보았지만 좀처럼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마저 더 짧아지는 것 같고…….
‘여, 역시 어려운 상대다.’
아무런 이야기나 던져도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던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우선 알테어의 기호 파악이 먼저야.’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면 아무리 시큰둥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 상대에게도 호감을 느끼게 되는 법!
‘무, 물론 이론만 빠삭할 뿐이지만……’
그러니 먼저 알테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보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찰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알테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티타임에서는…… 보통 무슨 이야길 하지? 내가 오기 전까지는 다들 즐겁게 이야기 중이던데.”
“그냥 축제 이야기였어요. 재밌을 거라고, 함께 가자고 해줬어요.”
“누가?”
“카인이요.”
숨길 만한 이야기도 아니라 솔직하게 대답하자 알테어가 낮은 목소리로 카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서늘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테어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재미없지?”
“네?”
“나 말이야. 내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말투도 딱딱하고…….”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의 귀가 살짝 붉게 물들었다.
“이게 귀족적이지 않다는 걸 알지만…….”
“저도 그래요!”
“……뭐?”
“저도 말주변이 없어요!”
화술은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도 귀족들은 모두 말을 번드르르하게 잘했다. 혹여 화술에 자신이 없더라도 기본 소양이 부족하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이렇게 대놓고 고백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알테어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말로 반가웠다.
“알테어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지…… 대화하는 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긴장돼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른다니까요.”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가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알테어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동지를 만나다니, 게다가 그 동지가 남편이라니. 정말 좋아요!”
“내가…… 말주변이 없는 게 좋다고?”
“그럼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면 서로 의지할 수 있잖아요.”
고민도 않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보니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다.
“하지만 부부가 나란히 말주변이 없어서 멀뚱멀뚱 파티장에 서 있게 되는 건 좀 곤란하려나요? 곧 회합에도 참석하는데.”
역시 그건 좀 곤란할 것 같다.
“그럼 알테어도 같이 연습하는 건 어때요? 서로 연습 상대가 되어주는 거죠!”
“연습 상대?”
“네. 다른 귀족들을 상대할 때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연습을 하고 싶어서 티타임도 열었던 건데…… 사실 별로 성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아. 그래서 티타임을…….”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반복하던 알테어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표정이 뭐라 말할 수 없이 미묘했다.
“같이 연습하는 게 싫은 거라면…….”
“아니.”
부담스러운 제안을 한 것인가 싶어 미안함에 어깨를 움츠리자 알테어가 재빨리 내 말을 끊어냈다.
“같이 하지. 연습.”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매일 티타임은 나랑 가져.”
‘지금까지는 매일 티타임을 연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모처럼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자 알테어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그려진 것 같았다. 알테어와 매일 티타임을 가지기로 약속했을 뿐인데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헤헤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알테어가 입을 열었다.
“딱히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네?”
그건 내게 특별히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의도를 이해하기 힘들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귀족들을 상대할 때 말이야. 그냥 평소처럼 해. 그렇게만 해도 충분히 호감을 얻을 수 있어. 좋은 사람이니까.”
“제가 좋은 사람이에요?”
“충분히.”
알테어의 단호한 대답이 바닥까지 메마른 나의 자신감을 채워주었는지 묘한 충만함이 느껴졌다.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얼굴도 살짝 달아올랐다.
“……그래도 전 노력할래요. 잘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제 어설픔 때문에 에일스포드를 우습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에일스포드를 우습게 보다니. 그런 일은 없을걸.”
“그야…… 알테어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다르다. 알테어처럼 멋지지도 않고, 위엄 넘치지도 않고, 검을 잘 다루는 것도 아니고, 또……. 생각이 길어지는 찰나 알테어의 손가락이 가볍게 이마를 톡 쳤다. 깜짝 놀라서 이마를 매만지며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턱을 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쓸데없는 생각 중이지?”
“아, 아뇨.”
“그럴 리가. 분명히 쓸데없는 생각 중이었어.”
“제, 제 생각을 알테어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 넌 좋은 사람이야. 그것만 기억하면 돼.”
차분한 목소리가 닿자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스스로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라는 걸 아는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적어도 알테어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나는 새로운 다짐을 마음에 새기며 알테어가 준 꽃향기를 맡아 보았다. 그윽한 향기. 기분 좋은 하루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 동부 귀족 회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영주 부부가 자리를 비우게 되어 늘 고요했던 에일스포드 성은 드물게 분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부 귀족 회합에는 나와 알테어, 카인을 포함한 기사 넷, 나와 알테어의 시중을 들어줄 마리까지. 총 일곱 명이 참석하게 되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마님.”
알테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에일스포드 성을 지키게 될 파벨이 나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냥 사냥 시즌을 즐기러 가는 것뿐인데.’
뭔가 대단한 임무를 받고 회합에 나서는 사람처럼 인사를 받으니 여러모로 민망했다.
“인사는 내가 파벨에게 해야죠. 나와 알테어가 없는 사이 에일스포드를 잘 지켜줘요. 물론 이런 말 안 들어도 충분히 잘할 사람인 건 알지만…….”
뒤늦게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웃자 파벨이 마주 웃으며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마님께 당부의 말을 들었으니,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아! 내가 회합에 간 사이 주문했던 유리가 올 거예요. 혹시라도 흠집이 난 건 없는지 잘 봐주세요. 또…….”
하나를 말하기 시작하자 줄줄이 부탁하고 싶은 문제들이 이어졌다. 최근까지도 계속 에일스포드 성을 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는지 파벨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님. 그런 걱정은 모두 내려두시고 회합을 즐기고 오십시오. 사냥은 수도에서도 즐기는 문화라고 들었으니 즐거우실 겁니다. 게다가 저희 영주님은 사냥 솜씨가 아주 좋으시거든요. 분명 1등을 하실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알테어는 용도 때려잡는 사람이니까 토끼나 여우 같은 소동물을 사냥하는 귀족들의 놀이가 오히려 무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돌아오시면 에일스포드 성의 보수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있을 겁니다. 멋지게 꾸며 놓고 있을 테니 기대하십시오.”
빈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유능한 파벨의 이야기라면 걱정 없었다.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파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니 옆에 서 있던 알테어가 왠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삐딱하게 파벨을 위아래로 훑었다.
“내게는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아. 인사를 받고 싶으셨습니까? 그럼 영주님도 잘 다녀오십시오.”
“……됐다. 그런 성의 없는 인사를 받아서 뭘 하겠어.”
알테어가 코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젓고는 동행이 결정된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말 위에 올라탔다. 말 한 마리가 남아 있는 걸 보니 알테어도 말을 타고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넌 마차에 타.”
준비된 마차는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에일스포드에 이렇게 좋은 마차가 있다니! 감탄해서 입을 떡 벌리고 마차를 살피자 파벨이 알테어를 힐끗 쳐다보며 내게 속삭였다.
“마님을 모시고 가야 한다고 급히 구입한 겁니다. 주문품이라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걸 저희 영주님께서 닦달해 겨우 시간을 맞췄어요.”
“알테어가요?”
그런 사정은 전혀 몰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타.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을 거야.”
“……네.”
쭈뼛대며 알테어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자 편안한 승차감과 화려한 내부 디자인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바인 후작가에서도 이 정도의 마차는 숙부님만 사용했었는데.’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가 싶어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고 있으니 맞은편에 마리가 앉았다. 내부를 힐끗대는 걸 보니 마리도 마차의 고급스러움에 감탄 중인 것 같았다.
“자. 이제 출발한다.”
알테어의 명령과 함께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서 에일스포드 성을 바라보니 파벨과 안나, 기사들이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예법에 맞지 않는 인사네요. 돌아오면 이 부분도 말해야겠어요.”
함께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리가 그들의 인사를 지적했지만 그리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건 진심으로 인사하는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사람들의 배웅까지 받으니 드디어 회합으로 향한다는 실감이 났다. 이런 큰 이벤트에 참석하는 건 데뷔당트 이후 처음이었다.
‘자, 잘할 수 있겠지?’
벌써부터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