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동부 귀족 회합.2021.09.19.
사교계는 소리 없는 전쟁터다. 귀족들의 목표는 언제나 사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영향력은 단순히 자존심이나 명예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레 정보와 사람이 모여드는 법. 사교계의 중심에 서면 다른 귀족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특권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누릴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이니, 다들 그 작은 파이를 독식하기 위해 더러운 술수와 음모도 꺼리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발하일 에일스포드였다. 그는 에일스포드의 영주 알테어가 드물게 사교활동을 꺼린다는 점을 유용하게 활용하여 동부 귀족들 사이에서 조금씩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만약 에일스포드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발하일이 여태까지 쌓아온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이 그를 지켜줄 터였다. 이번 회합에 알테어를 초대한 이유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알테어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외모야 설명할 필요 없이 번듯하지만, 전체적으로 인상이 차갑고 성격도 과묵해서 호감은커녕 두려움을 사는 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발하일 자신이 나서서 한두 마디만 더 얹으면 아주 간단하게 알테어를 천하의 나쁜 놈으로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알테어와 그 부인을 밖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어.’
그래야 결혼식이 치러지기 전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남작 부인을 노릴 수 있었다. 에일스포드 성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는 요새 중의 요새였다. 무서운 마수들도 간단하게 상대하는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에게 평범한 암살자들은 상대도 되지 못했다. 원정이 불리하다면 상대를 자신의 땅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교계는 명실상부한 발하일의 홈그라운드였다. 그러나 동부 귀족 회합은 시작부터 발하일의 그림과는 다른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에일스포드 남작이 렘브루 령에 나타난 용을 잡았대요. 그것도 단신으로요.”
“세상에. 웬만한 기사단 하나가 전부 상대해도 잡기 어렵다는 용을, 에일스포드 남작 혼자서요?”
“그렇다니까요. 예전부터 남작의 검술 솜씨는 유명했지요. 기억 안 나세요? 동부에서 제국을 흔들 신동이 나타났다면서 한참 시끄러웠잖아요.”
“맞아요. 그러고 보니 그런 소문이 있었네요.”
“남작이 워낙 사교활동을 하지 않아 묻혀 있었을 뿐이지, 상당한 인재인 것은 분명해요.”
“그럼 오늘 용을 잡았다는 남작의 사냥 솜씨도 볼 수 있겠군요?”
“어머나. 기대되는데요?”
알테어가 도착하기 전부터 사냥터는 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에일스포드 령에서 대단한 마석 광산이 발견되었다더라, 최근 훌륭한 과수원도 손에 넣었다더라, 결혼을 했는데 부인이 수도의 유력한 후작가 사람이라더라.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귀족들의 주제는 모두 에일스포드였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군.’
발하일은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갈라드 백작께서 몸져누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회합에도 못 나오셨고요.”
“갈라드 백작께서요?”
발하일의 이야기에 귀족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귀족들의 눈빛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흥미로운 이야기이지 진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발하일은 그 점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에일스포드 남작이 갈라드 백작께 과수원을 내놓지 않으면 영지를 엉망으로 만들겠다며 협박했다는군요. 마수들을 잔뜩 풀어 협박하는 바람에…… 그 귀한 과수원을…….”
“네? 마수는 사람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데 남작이 어떻게 그런 일을 했겠어요?”
“에일스포드 남작은 오래전부터 마수를 사냥하며 돈을 벌었지요. 누구보다 마수를 잘 아는 사람이니…….”
“하긴. 에일스포드의 수입원은 마수 사냥이었죠.”
“예. 돈이 필요할 때마다 마수들이 등장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렘브루 령의 용을 해치운 뒤 보수로 엄청난 돈을 받았다고도 하던데, 어쩌면 알테어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발하일이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는 부적절했던 것 같군요. 제 가문의 비밀스러운 일을 제가 감히…….”
“아. 그러고 보니 발하일 경께서 에일스포드 사람이셨지요.”
‘제 가문의 비밀스러운 일’이라는 묘한 표현에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교환했다. 발하일의 말은 마치 ‘에일스포드 가문이 마수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마수를 부리는 것은 악마의 하수인들이나 할 줄 아는 것이라 했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두려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조금 전까지 신나게 에일스포드 남작의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나누던 귀족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경외와 두려움은 한 끗 차이였다. 이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알테어는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가 아니라 마수를 부리는 악마의 하수인이 될 것이다. 발하일은 그 이야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아버지께서 선대 남작이 불에 타 죽은 것도 악마의 힘을 잘못…….”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제대로 사람들의 귓가에 닿기도 전에 사냥터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세상에! 저 마차 좀 보세요!”
누군가의 호들갑에 모두의 시선이 사냥터 입구를 향했다. 그곳에는 새하얀 마차가 그림처럼 멈춰 있었다. 양각으로 장식된 문양은 고급스러운 황금빛으로 꾸며져 있었고,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의 말도 아름다운 백마였다.
“린드 공방에서 만드는 그 마차가 분명해요.”
“마차 하나에 4천 골드는 족히 넘는다죠?”
“세상에. 4천 골드요?”
“저런 마차라면…… 황자님께서 도착하신 걸까요?”
몸이 약해 한적한 지방을 돌며 요양 중이라는 3황자 오르카의 방문은 이번 회합의 또 다른 핫이슈였다. 하지만 귀족들의 기대와 달리 마차에서 내린 건 오르카 황자가 아니었다. 하얀 마차의 문이 열리고, 승마복을 차려입은 분홍 머리의 여자가 기사의 도움을 받아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린 여자의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에서 청초하고 하늘하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에 순식간에 압도당한 귀족들이 웅성거림도 멈춘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여자의 시선도 모여 있는 귀족들을 향했다. 여유롭게 귀족들과 눈을 맞추며 눈인사를 한 여자가 살풋 미소를 짓자 숙녀들을 에스코트하고 있던 남자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조금 전까지 열심히 여론을 형성하고 있던 발하일도 있었다.
‘저 미인은 누구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발하일의 얼굴에 금세 탐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처음 보는 여자인데, 도대체 어떤 놈이 데려온 정부지?’
사교계는 아주 좁다. 동부 귀족들은 서로 얼굴과 이름을 다 알고 있으니, 처음 보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어떤 돈 많은 귀족의 정부라는 뜻이었다.
‘저런 마차를 끌고 올 정도의 부유한 귀족이라면 카슨 백작 정도인가?’
카슨 백작은 골골대는 70대의 노인이었다. 그런 노인의 정부라면 돈에 눈이 먼 값싼 여자일 테니 쉽게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희희낙락하며 여자를 꼬드길 생각을 하고 있던 발하일의 상상은 곧 여자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머리의 남자 덕분에 바스스 무너져 내렸다.
“어머. 저 사람은 에일스포드 남작 아닌가요?”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저 여성분은…….”
“수도에서 시집왔다는 에일스포드 남작의 부인인가 봐요.”
‘뭐? 저 여자가 알테어의 부인이라고?’
발하일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추녀에다 불구일 거라고 생각했던 알테어의 아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였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발하일의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알테어의 것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될 예정이었다. 에일스포드 남작이라는 작위도, 그가 새롭게 일궈낸 부도 모두 그가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그 부인도 내 것이지.’
발하일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분홍 머리 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원래는 어떻게든 죽여버릴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탐나는 물건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발하일은 빠르게 생각을 수정하며 비열한 웃음을 삼켰다. * * *
‘어, 어, 어, 어떻게 해! 다들 나만 보고 있어!’
마차에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꽂혔다. 이렇게 수많은 시선을 마주하는 건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에겐 너무 힘든 일이라 등에서 식은땀이 주루룩 흘렀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모여 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래서는 안 돼! 사람들을 만날 땐 무엇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그냥 웃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웃는 게 최고야. 나는 떨리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썩 보기 좋지 않았는지 모여 있던 귀족들이 입을 떡 벌리며 황당함을 표현했다.
‘흑흑. 첫인상 망했다.’
속으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웃고 있으니 옆에서 무심한 손길이 어깨를 감싸왔다. 고개를 돌리니 알테어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긴장한 거 아니에요. 그냥 낯설어서…….”
“사람들은 그런 걸 두고 긴장했다고 하지.”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말에 대꾸하다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건지 금세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대체로 무표정이라 얼굴에 드러난 감정으로 기분을 파악하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매일 티타임을 가지며 얼굴을 자주 관찰한 덕분인지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의 기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 이 얼굴은…….’
증오? 혐오? 아주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알테어는 기본적으로 무심한 사람이라 누군가를 향해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 전에 갈라드 백작을 상대할 때도 지금이랑 비슷했는데.’
갈라드 백작은 과수원을 빼앗긴 뒤 억울함에 화병이 나 드러누웠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회합에 나타날 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이 알테어를 이렇게 만들었단 소리다.
‘도대체 누굴 보고 그러는 거지?’
알테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남자가 씨익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반사적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받자 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으으. 어쩐지 기분 나빠.’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몸을 떨자,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알테어가 재빨리 내게 시선을 돌렸다.
“숲이라 추울 수도 있다는 걸 깜빡했군.”
“추워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면 왜 떨어? 넌 지나치게 연약하니 미리 조심하는 게 좋아.”
“그렇게 연약하지 않은데…….”
하지만 알테어는 이미 카인에게 손짓해 외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호들갑스러운지 모르겠다니까.’
속으로는 그렇게 투덜댔지만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를 귀하게 여겨준다는 건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완벽히 만끽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황금색으로 장식된 검은 마차가 우리 마차 뒤에 멈춰 섰다. 화려한 마차의 등장에 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이 마차는…….’
소설 속에서 이와 비슷한 마차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3황자 오르카가 요양을 핑계로 지방을 전전하며 타고 다녔던 그 마차!’
스스로 답을 내린 것과 동시에 마차의 문이 열리고 단정한 외모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에 주홍색 눈동자. 부드럽게 웃고 있는 저 남자는…….
‘역시 오르카 황자가 확실해.’
대단한 인물의 등장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