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위험한 남자들. (31/170)

32화. 위험한 남자들.2021.09.22.

미래의 반역자를 만났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소설 속 주요 인물을 눈앞에서 만났다는 호기심이 함께 피어올랐다. 제국의 3황자 오르카. 소설 속 그는 병을 핑계로 지방을 전전하며 힘을 키우는 인물로 그려졌다. 일찍이 수도에서 벗어난 덕분에 1황자와 2황자가 황좌를 두고 경쟁하며 출혈을 감수하는 사이 안전하게 힘을 키울 수 있었고, 그 힘으로 반역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16550925441006.png‘내가 상상한 오르카 황자는 병약한 이미지였는데.’

실제로 마주한 오르카는 내 상상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그는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상냥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햇빛을 보지 않고 자란 것처럼 창백한 피부만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를 병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신기한 기분으로 자신을 살피는 눈길을 느꼈는지 마차에서 내려 하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르카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는 순간 오르카가 눈꼬리를 접어 사르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상상하지 못한 인물의 따뜻한 미소에 놀라서 입이 살짝 벌어지는 순간.

16550925441011.jpg“황자 전하!”

멀리서 중년의 남성이 다급하게 달려 나와 오르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16550925441011.jpg“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저는 이번 회합을 주최한 길란 백작입니다. 안쪽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모시겠습니다. 다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16550925441006.png‘저 사람이 주최자구나.’

작은 지방 귀족들의 모임에 대단한 인물이 등장한 탓에 가엾은 주최자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황족들은 주로 수도에서 머무르고, 지방 귀족들은 수도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쉽지 않으니 그들에게 황족이란 구름 위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황자가 직접 지방 귀족들의 회합 자리에 나오다니. 확실히 대사건이었다.

16550925441024.jpg“환영해주어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오르카 황자의 지적에 황급히 고개를 돌린 길란 백작이 우리를 발견하고 어깨를 움찔했다.

16550925441011.jpg“아. 저 친구는 에일스포드 남작입니다.”

16550925441024.jpg“에일스포드 남작?”

일순 다정하게 웃고 있던 오르카 황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여 알테어와 나를 살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찰나의 변화였다. 금세 따뜻한 미소로 돌아온 오르카 황자가 길란 백작을 지나쳐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황자의 돌발 행동에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길란 백작도 허둥대며 그 뒤를 따랐다.

16550925441024.jpg“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남작이 용을 잡았다고.”

오르카 황자가 알테어에게 손을 내밀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16550925441024.jpg“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오면 한번 만나고 싶었지. 내가 이 모양이라, 강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사람은 원래 반대에 끌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황자가 등장한 순간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던 귀족들이 권위적이지 않은 그의 행동에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원래 신분이 낮은 사람이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이 법도이니 황족이 먼저 인사를 청하는 건 예법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오르카 황자는 그런 예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병약함을 먼저 언급했다. 그 점이 그를 오히려 강인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16550925441006.png‘과연 이것이 오르카의 힘.’

오르카가 반역을 일으켰던 당시, 지방 귀족들이 든든하게 그의 뒤를 받쳐 주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순간들이 지지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16550925464681.png“……알테어 에일스포드입니다, 전하.”

알테어가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붙잡아 인사하자 오르카가 활짝 웃었다.

16550925441024.jpg“에일스포드 영지는 최근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지요.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라고도 하고요.”

‘너희 영지로 초대해줘’라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돌려 하는 귀족식 화법이었다. 알테어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16550925464681.png“…….”

16550925441024.jpg“…….”

웃고 있는 오르카와 차가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알테어. 미묘한 대치에 둘 사이에 낀 나만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16550925464702.jpg

  이대로 있다가는 절대 대치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16550925441006.png“어, 언제든 마음 내키실 때 들러주세요.”

대치하고 있던 오르카와 알테어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시선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지만, 최대한 당당하게 에일스포드의 여주인으로 보이려면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

16550925441006.png“에일스포드는 손님을 박대하지 않으니까요. 특히 전하께서 방문해주신다면 큰 영광일 겁니다.”

16550925441024.jpg“아.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

오르카의 날카로운 눈빛이 잠깐 나를 스쳐 갔다.

16550925441024.jpg“바인 후작의 조카였죠. 데뷔당트 무도회에서도 단연 화제였다고 하시던데.”

16550925441006.png“그런가요?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16550925441024.jpg“눈에 띄는 분이시니 화제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16550925441006.png“아…….”

‘눈에 띄는 분’이라니.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16550925441006.png‘무, 무, 물론 데뷔당트에서는 눈에 띄긴 했을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아 허둥대기만 했으니까, 여러모로 꼴사나운 모습이었을 거다. 겨우 붙잡은 정신이 끊어질 것 같아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알테어가 살짝 움직여 나와 오르카 사이에 서서 그의 시선을 차단해주었다.

16550925464681.png“에일스포드에 방문해주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16550925441024.jpg“호의를 기억하지요. 길란 백작이 다과를 준비했다는데, 함께 이동하겠습니까?”

16550925464681.png“아직 인사 나누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요.”

16550925441024.jpg“그렇군.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보지요.”

대화를 마친 오르카가 길란 백작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자 긴장이 풀어져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손에 배인 땀을 바지에 대충 닦아내고 있으니 머리 위에서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925464681.png“오르카 황자와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

16550925441006.png“아는 사이라고 하긴 어려워요.”

수도에서 자리 잡고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귀족 가문의 수가 적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고 있는 정도다. 어느 정도 자라면 가장 먼저 초상화가 그려진 최신판 귀족 연감을 보고 상대의 지위와 이름을 외우는 게 수도 귀족들의 당연한 통과 의례였다.

16550925441006.png‘게다가 꼴사나운 레이디로 소문까지 났다면…….’

아무리 지방을 전전하는 오르카 황자라도 날 모를 리 없다.

16550925441006.png“오히려 전하께서는 알테어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았는걸요.”

알테어가 용을 잡았다는 이야기나 에일스포드 영지에서 일어난 변화들도 확실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16550925441006.png‘하지만 알테어가 용을 잡는 건 원작에선 없던 일이야. 이 일을 계기로 오르카 황자가 알테어를 주목하게 된 거라면 소설의 흐름이 조금 비틀어진 셈이지.’

원작의 흐름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알테어는 무서운 악역이 된다. 그러니 이야기를 비트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게 비틀어진 상황 때문에 오르카가 알테어를 주목하게 된 시점이 빨라졌으니 과연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알테어의 얼굴을 바라보니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16550925464681.png“황자 정도 되면 귀족들의 소식에는 언제든 귀를 기울이고 있겠지.”

16550925441006.png“그거야 그렇겠지만…….”

오르카와 너무 가까워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그때.

16550925441024.jpg“이야. 드디어 얼굴을 보는구먼!”

오르카 황자가 나타나기 전 알테어와 미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던 남자가 친근한 척 우리 앞에 다가와 있었다.

16550925441024.jpg“이제야 신부를 보여주다니! 친척끼리 너무한 거 아니냐, 알테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16550925441006.png‘또 다들 쳐다봐……!’

어차피 참석하는 사람은 많으니 적당히 묻혀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와 달리 등장부터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어 머릿속이 빙글 돌았다. 친근한 척 다가와 ‘친척’이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이 사람은 특히 불편했다.

16550925441024.jpg“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합니다, 부인. 저는 발하일입니다. 알테어의 가까운 친척이죠. 그런데 이 녀석이 친척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하는 바람에 이제야 축하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자신을 발하일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씩 웃으며 내게 팔을 뻗었다. 손을 잡으려는 것 같은 움직임에 슬쩍 몸을 뒤로 빼자 웃고 있던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16550925441024.jpg“인사도 안 받아주시는 겁니까?”

16550925441006.png“아, 아뇨. 갑자기 놀라서 그랬어요.”

떨떠름했지만 신사가 귀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건 평범한 인사였다.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자 발하일이 다시 씩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왜인지 기분 나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16550925441024.jpg“알테어가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몰랐지요. 저도 그랬고요.”

16550925441006.png“……칭찬이 과하세요.”

발하일은 손등에 입을 맞추지도 않고 주절거리며 내 손을 만지작댔다. 당장이라도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큰 실례였다.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마주 선 남자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짝!

16550925441024.jpg“아얏!”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발하일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알테어가 발하일의 손등을 찰싹 때려 밀어낸 것이다.

16550925464681.png“냄새나는 손, 당장 치워.”

알테어가 어린애의 나쁜 버릇을 훈계하는 것처럼 발하일을 대한 탓에 귀족들 사이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얼떨떨하게 제 손을 감싸 쥐고 있던 발하일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붉혔다.

16550925441024.jpg“이, 이, 이, 이게 무슨……!”

발하일이 버럭 소리치며 항의했지만, 알테어는 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나를 이끌어 걸음을 옮겼다.

16550925441024.jpg“알테어! 도대체 이게 무슨 무례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스운 취급을 당한 발하일이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알테어는 평온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도 어쩔 줄 몰라 우리와 발하일을 번갈아 보았다.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는 중인 듯했다. 알테어는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16550925464681.png“어릴 때 회합에 참석한 이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에일스포드 남작, 알테어입니다.”

짧고 간결한 인사에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귀족들이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발하일과 알테어를 저울질하다 결국 우리 쪽으로 무게 추가 기운 모양이었다.

16550925441011.jpg“그래그래. 남작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이렇게 다시 만나 반갑네.”

16550925441011.jpg“이제 결혼도 했고,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니 회합에도 자주 나와서 친분을 쌓으면 좋을 것 같군.”

쏟아지는 호의에 멀리서 알테어를 부르던 발하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남자가 무섭게 씩씩대고 있었다. 혹시나 발하일이 등을 보이는 알테어에게 달려드는 건 아닐까 싶어 슬그머니 그의 등을 보호하자, 알테어가 무슨 일이냐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16550925464681.png“왜 뒤에 서?”

16550925441006.png“네?”

16550925464681.png“네 자리는 내 옆이야. 뒤가 아니라.”

알테어가 가볍게 내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자리가 그의 옆으로 변했다.

16550925441006.png“하지만 그 친척분이…….”

발하일이 등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어느새 그는 자리를 떠난 뒤였다. 텅 빈 자리를 바라보며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알테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내 팔을 쓰다듬었다.

16550925464681.png“그 녀석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마. 이름도 외울 필요 없어. 머릿속에 그런 이름을 넣는 것도 아까워.”

16550925441006.png“그, 그 정도인가요……?”

16550925464681.png“그 정도야. 그러니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회합을 즐기는 것만 생각해.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회합을 즐겨? 사람들과 교류를 해? 알테어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16550925441006.png‘그, 그렇지. 내가 그런 사람을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내게 인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귀족이 보였다.

16550925441006.png‘히익!’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16550925441011.jpg“반가워요, 남작 부인. 수도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그쪽에서도 사냥을 즐긴다죠?”

16550925441011.jpg“우린 다들 이곳 토박이들이라 수도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들려줄 수 있어요?”

16550925441011.jpg“이쪽으로 와요! 얼굴이 타면 안 되니까 이쪽에 차양을 쳐두었답니다.”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쏟아지는 이야기에 눈이 빙글 돌아갈 것 같았다.

16550925441006.png‘괘, 괜찮아! 연습의 성과를 보여주자, 나디아!’

드디어 메인 이벤트의 시작이었다.

16550925581319.jpg

16550925581325.pn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