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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잡혔다? (32/170)

33화. 잡혔다?2021.09.26.

16550925652094.jpg“마차가 아주 특별하던데요. 동부에서 보기 드문 수준이죠.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던걸요.”

16550925652094.jpg“이 승마복은 또 어떻고요. 평범한 옷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옷감을 썼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려 애쓰며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그리 대단한 답변이 아니었는데도 귀부인들이 친절하게 호응해준 덕분에 말을 하면 할수록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16550925652104.jpg‘다행히 밉보인 건 아닌 모양이야.’

마차에 내리자마자 우물대는 바람에 첫인상이 나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로 다행이었다. 새로운 얼굴인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 덕분인지 한동안 대화의 주제는 에일스포드였다. 최근 에일스포드에서 새로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덕분에 화제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특히 사람들은 마석 광산으로 에일스포드가 얻게 된 부가 아주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기대에 찬 사람들의 눈빛에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폈다.

16550925652094.jpg“마석 광산의 매장량이 상당하다고 해요. 최근에는 상단과 계약까지 마쳤고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상단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과 계약금의 규모까지 알게 되자 자리에 앉은 귀부인들의 눈빛이 호기심에서 호의로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이미지가 ‘미지의 남작 부인’에서 ‘친해지면 좋을 남작 부인’으로 격상되었다는 뜻이었다.

16550925652104.jpg‘조금 속물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귀족들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지만, 그 체면과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돈이 필요했다. 특히 마석이라면 귀족들의 생활에는 필수적인 품목. 아마 다들 에일스포드와 가까워져서 나쁘지 않으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16550925652094.jpg“그런데 에일스포드 남작께서 회합에 참석하신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16550925652104.jpg“그런가요?”

16550925652094.jpg“네. 선대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나오질 않으셔서요. 저희도 오랜만에 뵈어요.”

에일스포드를 두고 담소를 나누다 보니 주제가 과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알테어의 과거 이야기는 나도 모르는 부분이 많았던 터라 절로 귀가 솔깃해졌다.

16550925652094.jpg“화재 사건은 비극적이었죠. 어쩜 그런 일이…….”

16550925652094.jpg“맞아요.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선대께서도…….”

16550925652094.jpg“정말 좋은 분들이셨는데…….”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이야기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16550925652104.jpg‘그러고 보니 에일스포드 성에 버려진 구역이 있었지.’

보수를 위해 성을 살피다 버려진 건물을 발견하고 파벨에게 물었더니, 이 건물은 굳이 수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16550925652104.jpg‘그게 화재 사건이 일어났던 건물이구나.’

파벨이 언급을 꺼리는 눈치라 일부러 깊이 묻지 않았는데 그런 사정이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16550925652094.jpg“그 이후에 에일스포드 령의 사정이 더욱 나빠졌지요. 선대 남작께서 친척들에게 빚을 많이 지셨던 모양이에요.”

16550925652104.jpg“선대께서요?”

깜짝 놀라서 되묻자 이야기를 꺼낸 귀부인이 실수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풋 미소 지었다. 내가 워낙 존재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탓인지 이곳에 당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16550925652094.jpg“다 지난 일인걸요. 이제 에일스포드의 사정도 나아졌고요.”

당황한 귀부인이 황급히 말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멀리서 낮고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마침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던 귀부인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0925652094.jpg“저희도 나서볼까요? 신사분들에게 질 수 없지요.”

16550925652094.jpg“그럼요. 지난 사냥 시즌에 제가 사슴을 잡았던 걸 잊지 않으셨겠지요?”

16550925652094.jpg“물론이에요. 길란 백작 부인께서도 곰을 잡으셨고…… 사자도 있었지요.”

곰? 사자?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자기들끼리 대단한 사냥감을 잡았다고 자랑하던 귀부인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게 꽂혔다.

16550925652094.jpg“남작 부인은 어떠세요? 수도에서 어떤 사냥감을 잡아보셨죠?”

16550925652094.jpg“곰 정도는 잡으셨겠죠?”

16550925652094.jpg“용을 잡은 에일스포드 남작의 아내이신데, 겨우 곰이라뇨. 사자 정도는 잡으셨을 거예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묻는 말에 머리가 혼란해졌다.

16550925652104.jpg‘이, 이런 걸로 장난을 치시는 건가?’

서로 허풍을 치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그런 거? 기대에 찬 귀부인들의 눈빛을 보니 차마 ‘전 사슴이나 곰은커녕 토끼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데요……?’라는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16550925652104.jpg‘조, 좋아! 나도 이 허풍 잔치에 동참하는 거야!’

나는 자신 있는 척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준비해 온 활을 들었다.

16550925652104.jpg“그럼요. 사자 정도는 가볍게 잡았지요.”

16550925652094.jpg“어머나. 역시!”

귀부인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감탄하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16550925652094.jpg“이번 회합의 주인공은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되겠네요!”

16550925652094.jpg“그럼 숲으로 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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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숲으로 가자 귀부인들은 익숙한 듯 삼삼오오 모여 사냥감을 찾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 곁에는 이번 회합의 호스트인 길란 백작 부인이 남았다. 그녀는 단아한 인상의 중년 여성으로, 나만큼이나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의 귀부인이었다.

16550925652104.jpg‘그런데 활 잡는 게…….’

사냥에 서툰 내가 보기에도 매우 능숙하게 느껴졌다.

16550925652094.jpg“이쪽에 발자국이 있네요.”

바닥을 살핀 백작 부인이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얼핏 보니 아주 거대한 곰 발자국이 바닥에 찍혀 있었다.

16550925652104.jpg‘왜, 왜, 왜 이걸 따라가지?!’

곰 발자국을 봤다면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16550925652104.jpg“저어 백작부인……?”

16550925652094.jpg“쉿!”

조심스럽게 길란 백작 부인을 말려보았지만, 그녀는 잔뜩 날을 세운 채 내 말을 가로막더니, 황급히 풀숲에 몸을 숨겼다.

16550925652094.jpg“저쪽이에요.”

16550925652104.jpg“저쪽이요?”

16550925652094.jpg“저기 보이시죠?”

백작 부인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곰이 숨을 쒸익대며 나무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16550925652104.jpg‘고, 고, 고, 곰이 왜 이렇게 커?!’

수도에서도 곰을 본 적이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보다는 한참이나 작았다. 동부가 짐승들의 천국이라더니 곰의 몸집도 훨씬 큰 모양이었다.

16550925652104.jpg‘다행히 아직 들키지 않았어.’

당장 도망친다면 위험한 일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550925652104.jpg“부인.”

조심스럽게 백작 부인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곰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던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16550925652094.jpg“지금 활을 쏘시면 될 것 같아요.”

16550925652104.jpg“……네?”

16550925652094.jpg“다행히 사냥감이 우릴 눈치채기 전이니 쉽게 실적을 올리실 수 있겠어요. 조금 작은 녀석이라 아쉽지만…….”

16550925652104.jpg“저게 작은 녀석……?”

태연하게 이어지는 백작 부인의 말에 조금씩 현실이 파악되고 있었다. 조금 전 귀부인들과 나눴던 대화도, 지금 이 상황도. 결코 장난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이 정도의 짐승을 잡는 게 간단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다!

16550925652094.jpg“제가 주최자이니 사냥감은 손님께 양보해야지요. 자, 어서 잡으세요.”

백작 부인이 호의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자리를 양보했다.

16550925652104.jpg“어어…….”

얼떨떨하게 떠밀려 자리를 잡자마자 거짓말처럼 곰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는 순간 힘이 풀려 화살이 곰을 향해 날아갔다.

1655092571055.jpg“크어엉!”

거대한, 아니, 이곳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다소 작은 곰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크게 포효했다. 그 소리에 기세가 눌리기라도 한 건지 허공을 날아가던 화살이 맥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곰에게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거리에서 화살이 덩그러니 굴러다녔다.

16550925652104.jpg“…….”

16550925652094.jpg“…….”

1655092571055.jpg“…….”

나도 침묵하고, 백작 부인도 침묵하고, 심지어 곰마저도 어이가 없는지 포효를 멈췄다.

16550925652104.jpg“하, 하핫.”

1655092571055.jpg“크어엉!”

민망한 내 웃음소리와 함께 곰이 다시 포효했다. 완전히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기세등등한 것이 느껴졌다. 거대한 곰이 팔을 크게 들어 쿵쿵대며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16550925652094.jpg“부, 부인! 피하세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백작 부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허무하게 허공만 휘저었을 뿐, 그녀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16550925652104.jpg‘어……?’

황급히 주위를 둘러봐도 백작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곰의 상태를 보고 먼저 도망을 친 걸까? 그렇다면 내 몸만 챙기면 된다. 나 때문에 부인까지 위험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안도하기도 전에 곰의 뜨끈한 숨이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코앞에 곰의 커다란 얼굴이 있었다.

1655092571055.jpg“크르릉…….”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16550925652104.jpg‘도, 도망치긴 늦었어.’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으며 메고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들었다. 무기가 될 만한 거라고는 그나마 이것뿐이었다.

16550925652104.jpg‘곰의 약점은…… 눈?’

매서운 눈을 바라보니 도저히 그게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려볼 만한 건 그것뿐이었다.

1655092571055.jpg“크와앙!”

곰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내 앞에 다가오는 순간. 두 눈을 부릅떠 목표를 포착하고 눈동자에 화살을 찔러 넣으니 곰이 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1655092571055.jpg“끄어엉!”

곰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괴로워하며 바닥을 구르니 두려운 와중에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찔린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는 건가? 얼떨떨하게 점점 힘을 잃어가는 곰을 바라보고 있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곰이 한 마리 더 있었던 걸까?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향해 척척 다가오고 있었다. 오르카 황자였다.

16550925724899.jpg“괜찮은가요,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

그는 수행원도 없이 홀로 숲을 가로질러 완전히 뻗어버린 곰의 등에서 단검을 수습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니 오르카 황자가 몸을 낮춰 내 상태를 살피며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16550925724899.jpg“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검에 독을 발라뒀어요. 빠르게 퍼지는 독이니 곰은 이대로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안심해요.”

오르카 황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덕분에 멍했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16550925652104.jpg“가, 감사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혼자 일어나긴 힘들었다. 오르카 황자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그의 손을 붙잡자 그가 가볍게 힘을 주어 나를 잡아 일으켰다. 병약하다는 말과 달리 그의 손에서 제법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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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25724899.jpg“용감하네요. 수도에서 오셨다면 이런 사냥에 익숙하지 않으실 텐데, 홀로 곰을 잡으러 오시다니.”

16550925652104.jpg“아. 동부의 사냥이 이런 건 줄은…… 그리고 혼자 온 것도 아니었고요…….”

내가 민망함에 웅얼거리자 오르카 황자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16550925724899.jpg“수도와 동부는 다른 점이 많지요. 지방에서는 수도 출신 사람을 만나기 힘든데, 우린 그런 점에서 드문 동지 아니겠습니까.”

오르카 황자는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지만, 소설 속 악당의 모습을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친절이 불편하고 의심스러웠다.

16550925652104.jpg“그, 그런가요.”

16550925724899.jpg“그런데…… 부인은…….”

어깨를 움츠리고 어색하게 대꾸하자 잠시 침묵하고 있던 오르카 황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내 앞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16550925724899.jpg“왜 나를 무서워하지? 난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요. 아직은.”

빙긋 웃는 오르카 황자의 눈빛에서 영문 모를 서늘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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