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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누군가의 의도. (33/170)

34화. 누군가의 의도.2021.09.29.

16550925803215.png“그게……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너무 티가 많이 났나 싶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자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던 오르카 황자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1655092580322.jpg“농담입니다. 너무 긴장하시는 것 같아서 장난을 좀 친 거예요.”

16550925803215.png“자, 장난이요?”

1655092580322.jpg“내가 황자라는 이유로 불편해하는 분들이 많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권위적인 것은 질색이니…… 부디 편하게 대해줘요.”

16550925803215.png‘펴, 편하게라니…….’

내가 오르카를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오르카를 보며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금세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16550925803238.jpg“저쪽이에요!”

차분하기만 했던 길란 백작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고, 그 뒤로 사람들의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이어졌다.

16550925803238.jpg“괜찮으세요, 남작 부인? 사람을 불러왔는데…….”

무장한 기사들을 끌고 온 백작 부인이 지체없이 달려와 내 상태를 살피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곰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분명 나는 화살도 제대로 못 날렸는데, 어쩌다 곰이 저렇게 죽어 있는 것인지 의아한 모양이었다. 나는 놀란 백작 부인을 달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16550925803215.png“전 괜찮아요. 마침 전하께서 이곳을 지나가다 발견하시고는 도와주셨어요.”

16550925803238.jpg“어머. 전하께서요?”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르카 황자를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 사건을 황자에게 들켰다는 것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듯 나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16550925803238.jpg“내 불찰입니다, 남작 부인. 손님들께서 사용하실 활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아서…… 저런 불량품이 섞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백작 부인이 바닥을 나뒹구는 내 활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냥에 필요한 도구는 모두 주최 측이 준비했는데, 백작 부인은 내가 쏜 화살이 형편없이 바닥을 뒹군 것이 부족한 내 솜씨 때문이 아니라 불량품 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16550925803215.png‘사람이 저렇게 활을 못 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아…….’

동부는 다른 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데다 각종 마수가 출몰하는 지역이라 대부분이 훌륭한 전사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귀부인들마저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라니! 스스로의 실력이 민망하고 백작 부인의 사과가 미안해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16550925803238.jpg“우선 옷이 더러워졌으니 갈아입는 게 좋겠어요.”

백작 부인이 바닥에 주저앉느라 더러워진 옷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제안했다. 확실히 몰골이 엉망이었던 터라 나도 순순히 그 제안에 동의했다.

16550925803215.png“마차에 예비용 옷이 있어요.”

16550925803238.jpg“다행이네요. 작은 막사를 세워 두었으니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으면 될 것 같은데…… 시녀들은 차양 근처에서 대기 중이니 남작가의 시녀에게 옷을 준비해오라고 전할게요.”

16550925803215.png“배려 감사합니다, 부인.”

16550925803238.jpg“무슨 말씀을요. 준비가 부족해 내가 미안하지요. 많이 놀랐을 테니 우선 막사에서 쉬고 있어요. 여기서 막사가 멀지는 않으니 내가 안내를…….”

백작 부인이 자연스럽게 동행하려는 찰나 그녀 옆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16550925803238.jpg“마님. 주최자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좋지 않으니 제가 남작 부인을 막사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귀부인에게 당당히 조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녀라면 백작 부인을 곁에서 오래 모신 충신일 터. 시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백작 부인이 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16550925803238.jpg“아아…… 남작 부인…….”

16550925803215.png“괜찮습니다. 주최를 맡으셨으니 다른 분들도 살피셔야죠.”

나는 백작부인의 무거운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서둘러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가 빠르게 내 옆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시녀의 안내를 따라 이동하기 전. 나는 다시 한번 오르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16550925803215.png“그리고 전하.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655092580322.jpg“누구든 했을 일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싱긋 웃는 오르카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에 보았던 날카로운 눈빛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의 얼굴이 얼마나 따스하고 선량해 보였는지, 그때 내가 보았던 눈빛이 착각이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16550925803215.png‘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은 무서워.’

차라리 대놓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알테어가 나았다.

16550925803238.jpg“그럼 남작 부인.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오르카의 시선을 애써 떨쳐내며 시녀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작은 소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졌다. 숲의 향기는 짙고 사방은 고요해서 곰과 대치하느라 두근거렸던 심장도 점차 차분해졌다. 하지만 별로 멀지 않을 거라던 막사는 내 심장이 평소처럼 진정을 되찾을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6550925803215.png‘어쩐지 주위 풍경도 으슥하고…….’

스산한 기분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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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25803215.png“저어…….”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지 물으려는 찰나 시녀가 걸음을 멈췄다.

16550925803238.jpg“이쪽입니다, 남작 부인.”

과연 그녀의 말처럼 눈앞에 작은 막사가 있었다. 그것을 보니 불안했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16550925803238.jpg“들어가서 쉬고 계시면 남작가 시녀가 옷을 가지고 올 겁니다.”

16550925803215.png‘휴. 베테랑 시녀를 의심하다니!’

나는 잠시 그녀를 의심했던 것을 마음속으로 사죄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아늑한 분위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숲은 서늘한데 내부는 따뜻해서 긴장으로 뭉쳐 있던 어깨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나는 마리가 오기를 기다리며 막사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지루함을 견디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다행히 긴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막사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16550925803215.png‘어?’

방문객이 당연히 마리일 거라고 생각하고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입구에 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16550925803215.png“……발하일 님?”

알테어의 친척이라는 발하일이었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씨익 웃으며 능청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1655092580322.jpg“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16550925803215.png“영주님의 친척이시니 제 가족이기도 하세요. 당연히 기억해야지요.”

1655092580322.jpg“역시 부인께서는 상식적이시군요. 막돼먹은 알테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입니다.”

발하일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가까워졌다. 나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두 손을 꽉 쥐었다.

16550925803215.png“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영주님은…… 알테어는……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에요.”

1655092580322.jpg“부인이야말로 알테어를 제대로 모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얼마나 막돼먹은 녀석인지는 다들 알고 있거든요. 가엾게도 그걸 모르시다니.”

발하일이 혀를 차며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를 피해 뒷걸음질 치다 벽까지 떠밀린 상태였다. 불길한 예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피할 방향을 고민하는 순간. 발하일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발하일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그의 눈빛에 순간 노기가 감돌았다.

1655092580322.jpg“사람을 치시다니. 알테어에게 이런 무례함을 배우신 모양입니다.”

위협적인 눈빛에 무서워 몸이 덜덜 떨렸지만 이 말을 꼭 해줘야 할 것 같았다.

16550925803215.png“무, 무례하고 막돼먹은 건 다, 당신이에요.”

1655092580322.jpg“뭐?”

16550925803215.png“알테어가 왜 다, 당신을 상대하지 말랬는지 알겠어요. 알테어의 친척이라면, 정말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절대…… 꺅!”

고개를 푹 숙이고 용기를 쥐어짜 소리치는 와중에 발하일이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1655092580322.jpg“허. 곱게 생겨서 마냥 예뻐해 주려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 속을 긁을 줄도 아네?”

16550925803215.png“이, 이거 놔요!”

발하일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해봤지만 강한 남자의 힘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버둥대면 버둥댈수록 발하일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1655092580322.jpg“그래, 그래. 고분고분한 걸 길들이는 것보다는 이쪽이 재밌겠지.”

16550925803215.png“읏!”

발하일이 붙잡은 어깨를 강하게 잡아끌어 몸이 그에게 딸려 갔다.

1655092580322.jpg“알테어 그 녀석이 가진 건 전부 내 것이야. 작위도, 영지도, 그리고…….”

코앞에서 비죽 웃으며 내 몸을 훑는 발하일의 모습에 소름이 쫙 끼쳤다.

1655092580322.jpg“부인도 제법 탐이 난단 말이지.”

16550925803215.png“허, 허, 헛소리하지 마세요!”

1655092580322.jpg“헛소리라니. 너도 줄을 잘 타는 게 좋을걸? 그 녀석이 죽으면 내가 에일스포드의 후계자라고. 응?”

알테어가 후계 문제로 아이를 원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급히 작위를 지켜야 하는 대상이 이런 망나니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이건 알테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이상한 사람에게 작위가 돌아간다면 에일스포드의 미래는 금세 나락으로 떨어질 터였다.

16550925803215.png‘게다가 알테어가 죽으면, 이라니.’

더러운 입으로 불길한 말을 쏟아내는 발하일을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발하일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16550925803215.png“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1655092580322.jpg“흥. 누가 그래?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그러나 발하일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코웃음을 흘리며 나를 비웃었다.

1655092580322.jpg“지금쯤 알테어 그 자식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걸.”

16550925803215.png“그, 그, 그게 무슨 말…….”

1655092580322.jpg“사냥을 하다 사람이 짐승에게 공격당해 다치는 건 흔한 일이잖아. 그 상처가 크다고 한들 운이 나빴을 뿐이겠지. 안 그래?”

그 말이 꼭 사고를 가장해 알테어를 해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아니, 확실히 그런 말이었다.

1655092580322.jpg“잊었어? 널 여기로 데려온 녀석이 누구였는지? 백작 부인의 시녀였잖아.”

16550925803215.png“……!”

1655092580322.jpg“사람이란 건 참 쉬워. 돈만 주면 누구든 매수할 수 있거든. 다소 큰돈을 써야 했지만, 어차피 에일스포드가 내 것이 되면…… 그 정도는 우습지.”

내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바르르 떨기만 하자 발하일이 신이 난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1655092580322.jpg“고맙게 생각해. 사실은 널 없앨 생각이었지만, 드물게 탐나는 미모라 목표를 바꾼 거니까. 넌 앞으로 내게 애교나 부리면서 시중을 잘 들면 돼. 뭐, 알테어 그 자식의 손을 탔을 거라고 생각하니 입맛이 좀 떨어지긴 하는데…….”

발하일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1655092580322.jpg“뭐, 그것도 또 나름대로 맛이 있지.”

일순간 발하일의 기세가 달라졌다. 그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나를 야전침대 위로 집어 던지듯 떠밀었다. 나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떠밀려 침대 위에 쓰려졌다. 그의 손을 벗어났으니 재빨리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그보다 발하일이 내 위에 올라타 손으로 목을 움켜쥐는 것이 먼저였다.

16550925803215.png“윽!”

1655092580322.jpg“반항하면 너만 힘들걸? 응?”

경고하듯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턱 막혀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어떻게든 그의 손을 밀어내기 위해 팔을 뻗는 순간.

16550925939396.png“아이고, 혼자 쓰는 방도 아닌데 좀 조용히 합시다!”

침대 밑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발하일까지 놀라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낯익은 사람이라는 점이 내 마음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16550925803215.png‘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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