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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진짜 의도. (34/170)

35화. 진짜 의도.2021.10.03.

천으로 덮여 있던 야전침대 아래에서 예상했던 얼굴이 비죽 튀어나왔다. 카인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발하일의 시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길게 하품하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침대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16550926011083.jpg“이, 이, 이, 이게 무슨……!”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발하일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카인에게 삿대질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대는 그 모습에 카인이 다시 한번 하품하며 한 손으로 발하일의 어깨를 잡아채 바닥에 집어 던졌다.

16550926011083.jpg“으악!”

내가 반항했을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발하일이 가볍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통쾌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고 카인을 바라보니 그가 본 적 없는 싸늘한 얼굴로 발하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6550926011094.png“그러게 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셨습니까, 발하일 님.”

16550926011099.png‘와아…….’

‘이게 바로 기사의 날카로움이다!’라는 생각에 상황도 잊고 감탄이 터져 나왔다. 놀란 마음에 아직도 떨리고 있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카인이 멋지다며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16550926011083.jpg“왜, 왜, 왜 네 녀석이 거기에!”

16550926011094.png“아늑하고 딱 쉬기 좋아 보여서요.”

16550926011083.jpg“누, 누, 누가 그딴 곳에서 쉰다는 거야!”

16550926011094.png“이상하게 저는 침대 밑이 좋더라고요. 이것 참, 취향이 이래서 저도 참 곤란하지 뭡니까.”

카인이 능청스럽게 발하일의 말에 대꾸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공격하려는 건 줄 알았는지 그 동작에 발하일이 어깨를 떨며 움찔하자 카인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발하일의 얼굴이 민망함에 새빨개진 건 금방이었다.

16550926011083.jpg“무, 무례하기는! 높으신 분들이 들어오는 걸 봤으면 자리를 비켜줬어야지, 어디 기사 나부랭이가 감히…….”

민망함을 떨쳐내려는 건지 발하일이 오히려 소리를 높였다. 그럴수록 카인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16550926011094.png“높으신 분? 누가 높으신 분이지? 설마 너?”

16550926011083.jpg“너라니! 나는 에일스포드 남작의 후계자야!”

16550926011094.png“그게 뭐? 남작의 후계자라고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작님의 호의에 기대어 명성을 누릴 수밖에 없는 놈이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군.”

16550926011083.jpg“자, 작위가 전부인 줄 아는 거냐? 내가 사교계에서 어떤 입김을…….”

카인이 더 들어주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어 발하일의 말을 가로막고 발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16550926011094.png“저는요. 일개 기사 나부랭이라 사교계 그런 건 모르겠고요. 그냥 널 죽어라 때리고 싶어요.”

16550926011083.jpg“뭐……? 으악!”

카인이 빙긋 웃으며 발길질을 시작했다. 웃는 얼굴에서 서늘한 분노가 느껴져 지켜보는 내 어깨가 떨릴 지경이었다. 발하일이 벗어나려고 버둥댔지만 숙련된 기사의 움직임을 저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16550926011083.jpg“그, 그만해! 아악! 내가 잘못했어! 악!”

발하일이 비명을 지르며 사과했다. 거들먹거리던 평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비굴한 태도였다.

16550926011099.png‘이, 이러다 큰일 나겠어!’

나쁜 놈을 응징하는 건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건 마음이 무거웠다.

16550926011099.png“그, 그만 해요!”

나는 뻣뻣한 두 다리를 겨우 움직여 카인을 말렸다. 발하일의 애원에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던 카인이 내 말 한마디에 발길질을 멈추자, 바닥에 널브러진 발하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막사 입구를 향해 기어갔다. 물론 발하일의 도주 시도는 카인이 그의 등을 발로 꾹 누르는 것으로 간단히 저지됐다.

16550926011094.png“아직 제대로 못 갚아줬습니다, 마님. 이 녀석의 사죄도…… 받지 못하셨고요.”

카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발하일이 머뭇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16550926011099.png‘이런 사과는 필요 없어.’

나는 발하일을 무시하고 카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16550926011099.png“내 힘으로 받아내지 않은 사과는 의미가 없어요.”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카인이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살짝 눈을 크게 떴다.

16550926011099.png‘뭔가 이상한 말이었나?’

하지만 어린애처럼 누군가의 뒤에 서서 사과를 받아내는 건 치사하지 않나?

16550926011099.png“게다가…… 이런 식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건…….”

나는 흠씬 두들겨 맞아 엉망이 된 발하일을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이런 식으로 엉망이 되는 건 보기 힘들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슬쩍 카인을 바라보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가 평소처럼 눈을 휘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16550926011094.png“성실한 마님을 모시는 기사라. 저는 운이 좋네요.”

16550926011099.png“성실하다니…… 난 전혀…….”

16550926011094.png“그리고 기사를 부리는 것 역시 마님께서 가진 힘입니다. 꼭 자기 주먹으로 상대를 응징하지 않아도 치사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16550926011099.png“그…….”

이런 방식이 치사하게 느껴진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카인은 이미 내 속을 다 읽은 모양이었다.

16550926011094.png“뭐, 그래도 그게 마님의 취향이 아니라고 하시면 맞춰 드리는 것도 기사의 임무지요.”

민망함에 입술을 달싹이자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리며 막사 입구를 바라보았다.

16550926011094.png“이제 올 때가 됐는데…….”

카인이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막사 입구가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제복을 맞춰 입은 무리의 모습에서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16550926011083.jpg“도, 도와…….”

반색하며 그들을 향해 도움을 청하려던 발하일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들이 아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발하일을 보며 무어라 수군대는 그들을 가르고 이번에는 알테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카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선 나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내 옆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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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는 와중에 바닥에 널브러진 발하일의 손을 밟는 바람에 그가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지만, 누구도 그 목소리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16550926083884.png“어떻게 된 일이야.”

알테어가 눈으로 내 모습을 훑으며 카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0926011094.png“말씀하신 대로 막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발하일 저 자식이 마님을…….”

카인이 속삭이듯 말하며 검은 제복을 입은 무리의 눈치를 살폈다. 미수에 그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런 사건이 벌어질 뻔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추문이 돌 수 있는 문제였다. 망설이는 카인의 모습과 살짝 흐트러진 내 몰골에서 많은 사실을 유추해낸 듯 알테어가 이를 바드득 갈며 발하일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씹어 먹을 것 같은 시선에 발하일이 움찔했다.

16550926011094.png“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마님은 그런 거 안 좋아하시니까요.”

16550926083884.png“뭐?”

카인이 자신을 말리며 내 핑계를 대자 알테어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16550926011094.png“저한테 그러셨습니다. 무식하게 주먹으로 응징하는 건 취향에 안 맞으시다고요.”

16550926011099.png“아, 아, 아니에요! 무식하다는 말은 안 했는데…….”

혹시라도 오해할까 서둘러 손을 내저으니 카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16550926011094.png“뭐. 그게 그 이야기였지요.”

16550926011099.png“완전히 달라요!”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보며 카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중간에 낀 알테어는 기가 막힌다는 듯 그런 우리를 바라보았고 말이다.

16550926011099.png“아무튼 제 말은, 이제 외부인도 왔으니 우선은 상식적으로 움직이자는 거지요. 저희 식으로 해결할 기회는 많이 남았으니까요.”

16550926083884.png“…….”

알테어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그 역시 카인의 의견에는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이야기를 마친 제복 무리 사이에서 대표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서서 알테어에게 말했다.

16550926110319.jpg“우선 저 사람은 저희가 압송하겠습니다.”

16550926083884.png“그렇게 하시죠. 증거는 이미 확보하셨습니까?”

16550926110319.jpg“말씀하신 사람들을 확보하니 금세 입을 열더군요. 증거 역시 증언을 통해 확보한 상황입니다. 제보에 감사드립니다.”

16550926083884.png“황가에 충성하는 남작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알테어가 보기 드물게 깍듯한 태도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지위가 상당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16550926011099.png‘도대체 누구길래 그러지?’

제복을 입은 걸 보면 소속 집단이 있을 텐데, 소속을 나타내는 문양이나 상징이 하나도 없어서 정체를 추리하기 힘들었다.

16550926011099.png‘……어? 잠깐.’

가만히 추리하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16550926011099.png‘문양이나 상징이 없는 검은 제복을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황제 직속의 특별대, 검은 드래곤 기사단! 그들은 오로지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일종의 특수기사단이었다. 황실의 안정과 번영만을 위해 충성하는 집단이라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 웬만한 귀족들도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그들의 눈에 찍히면 반역자라는 불명예를 얻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6550926110319.jpg“발하일 에일스포드. 황명을 대리하는 검은 드래곤 기사단의 이름으로 너를 체포하겠다.”

16550926011083.jpg“거, 검은 드래곤 기사단?”

발하일은 이제야 검은 제복 무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16550926011083.jpg“거, 검은 드래곤 기사단에서 왜 저를 체포합니까? 저, 저는 황가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16550926110319.jpg“모든 항변은 발스테드에서 하도록.”

16550926011083.jpg“바, 바, 바, 발스테드라니요!”

발스테드는 악명 높은 수도 인근의 감옥이었다. 한번 구금되면 무죄를 증명하기 전에 불구가 되거나 정신병자가 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장소로, 반역자를 비롯한 제국 최악의 범죄자들만 수용되는 곳이었다.

16550926011083.jpg“저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16550926110319.jpg“모든 항변은 발스테드에서 하도록.”

16550926011083.jpg“아니, 도대체, 저는 정말로……!”

검은 제복의 남자가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 뒤 손을 들자, 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와 발하일을 끌고 나갔다.

16550926011083.jpg“악! 이거 놔! 안 돼! 나는 못 가! 죄가 없다고!”

16550926110319.jpg“쯧.”

소리치는 발하일을 보며 검은 제복의 남자가 경멸스럽다는 듯 혀를 찬 뒤 알테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알테어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에 화답하자, 사라지는 무리를 따라 검은 제복의 남자도 막사를 떠났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움이 지나가자 소음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멍한 정신에 눈을 껌뻑이며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것을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한 건지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16550926083884.png“오늘 이 회합에 3황자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어.”

16550926011099.png“네. 오래전부터 정해진 거였으니까요.”

16550926083884.png“발하일, 그 녀석이 내 목숨이나 네 목숨을 노릴 거라는 것도 알았고.”

16550926011099.png“그, 그랬어요?”

16550926083884.png“그래. 에일스포드는 방비가 철저한 곳인 데다 내 홈그라운드니까, 내가 밖으로 나올 때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어.”

알테어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지만 여전히 3황자의 방문과 발하일의 음모가 어째서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16550926011094.png“우리 영주님께서는 설명에 영 소질이 없으시다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카인도 설명이 한참이나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알테어 대신 앞으로 나섰다.

16550926011094.png“누군가를 죽이려는 음모는 확실히 있었으니, 그 대상을 적절히 조작한다면 음모를 꾸미는 자를 곤란하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작된 대상이 3황자라면 그 죄는 단순히 살인 모의를 넘어…….”

16550926011099.png“……반역이 되죠.”

나는 홀린 듯이 정답을 말하며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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