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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35/170)

36화. 주제 파악도 못 하고.20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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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합이 열리기 사흘 전.

16550926234919.png“이번 회합의 가장 큰 위협은 발하일입니다. 그 녀석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파벨은 진지한 얼굴로 알테어에게 조언했다. 하지만 알테어는 그의 조언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서류만 검토하고 있을 뿐이었다.

16550926234919.png“영주님.”

답답해진 파벨이 한숨과 함께 재촉하자, 그제야 알테어가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1655092623493.png“알고 있다. 음흉한 수작에 능한 놈이니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16550926234919.png“그걸 알고 계시면서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영주님이야 발하일 그놈의 눈먼 위협에 당하실 리 없지만, 마님께서는 평온한 삶을 살아오신 터라 쉽게 대처하기 힘드실 겁니다.”

파벨의 말에 알테어가 의자에 기대어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1655092623493.png“지금 보니 내가 아니라 나디아가 걱정되는 거로군?”

16550926234919.png“에일스포드 사람이라면 다 똑같을걸요. 영주님을 누가 걱정하겠습니까.”

알테어는 강하다. 누구보다 에일스포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강한 영주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가슴을 펴고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알테어는 코웃음을 흘렸다.

1655092623493.png“……날 걱정하는 사람도 있어.”

그 말투가 마치 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이번에는 파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16550926234919.png“마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1655092623493.png“…….”

16550926234919.png“그야 마님께서는 영주님이 마수 때려잡는 걸 못 보셔서 그렇지요.”

1655092623493.png“……그런 모습은 앞으로도 보여줄 일 없어.”

알테어가 투덜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다음 서류를 제 앞에 가져왔다.

1655092623493.png“그러는 너도 내가 용을 잡으러 갈 때 위험하다느니 가지 말라느니 징징댔잖아.”

16550926234919.png“……징징대진 않았는데요.”

파벨이 소심하게 항변하며 슬그머니 알테어의 시선을 피하자 알테어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1655092623493.png“허. 나디아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용 이야길 한 게 누군데?”

16550926234919.png“그거야…… 뭐…….”

민망해진 파벨이 크게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16550926234919.png“아무튼 제 말은, 발하일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결혼식이 열리는 날에도 마님을 노렸던 놈이니 이번에도 반드시 나설 겁니다.”

1655092623493.png“당연히 그러겠지.”

알테어가 평온하게 대꾸하며 서류에 서명했다. 그 모습에 파벨이 눈을 반짝였다.

16550926234919.png“이미…… 대책을 세워두셨군요?”

1655092623493.png“발하일은 오래전부터 사교 활동을 활발히 해서 아군이 많지. 동부는 꽉 잡고 있는 놈이라 쉽게 건드리면 오히려 우리가 곤란해질 수 있어. 그래서 이번 회합이 기회다.”

16550926234919.png“이번 회합이 오히려 기회라고요?”

1655092623493.png“그래. 외부인이 참석하니까.”

16550926234919.png“외부인이라면…….”

한 사람뿐이다. 3황자 오르카! 그 사실을 눈치챈 파벨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926234919.png“황자를…… 이용하겠다고요?”

1655092623493.png“그래.”

16550926234919.png“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면 상당히 언짢아할 텐데요.”

1655092623493.png“그러니 상대는 모르게 해야지. 본인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이 일은 모두 끝이 날 거다.”

16550926234919.png“그럼…….”

1655092623493.png“발하일이 누굴 죽이려고 하는지는 상관없어. 그 녀석은 회합의 날, 감히 황자를 죽이려고 한 반역자가 될 거다.”

16550926234919.png“동기가 부족합니다. 황자와 발하일은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1655092623493.png“물론 그렇지. 하지만 딱히 동기는 필요 없어.”

알테어의 장담에 파벨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그 자리에서 발하일을 반역죄로 몰아넣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깊이 조사가 진행되면 금세 구멍이 드러날 것이고, 그가 이상한 음모에 휩싸였다는 것도 드러날 것이다. 그때부터는 감히 황실의 이름을 이용해 적을 해치려 한 알테어 쪽이 위험해진다.

1655092623493.png“걱정하지 마라. 황제는 깊이 조사하지 않고 발하일을 처형할 테니.”

16550926234919.png“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군요?”

1655092623493.png“수도에 블란을 보내두었지. 덕분에 그쪽의 소식과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었고.”

1655092623493.png“요즘 황제와 귀족들이 세금 문제로 날을 세우고 있다고 하더군. 갈수록 황권이 약화되고, 반대로 귀족들의 입김은 강해져 가니…… 이대로 두면 귀족들의 주장대로 세율이 떨어지겠지.”

16550926234919.png“……황제의 입장에서는 황권을 강화할 계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1655092623493.png“뭐, 반역사건 정도면 황제가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좋은 카드 아니겠어?”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파벨이 입을 떡 벌렸다.

1655092623493.png“물론 황제는 뒤에서 진상을 조사하겠지. 발하일이 진짜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판을 짠 게 에일스포드라는 것도 알게 될 거야. 모든 일이 끝난 후 나를 수도로 부를지도 모르지.”

16550926234919.png“굳이…… 그런 식으로 황제의 시선을 살 필요가 있습니까?”

황제의 주목을 받는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었다. 벌써부터 밀려오는 긴장감에 파벨이 침을 꿀꺽 삼켰지만, 알테어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었다.

1655092623493.png“나디아의 친정인 바인 후작가는 대대로 황제파였지. 황제의 굳건한 비호를 받고 있으니 흠결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맞서기 힘들어. 중앙에서 힘을 쓰려면 아군이 필요하고, 황제보다 더 강한 아군은 없으니…… 그걸 뺏어야겠지.”

파벨은 생각보다 거대한 계획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난한 에일스포드가 부유해지기를, 무시받는 에일스포드가 강대해지기를 항상 바랐다. 하지만 지금 알테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의 희망 이상이었다.

16550926234919.png“……중앙에 진출하시려는 겁니까?”

마님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알테어는 감춰진 파벨의 의문까지 알아차렸다.

1655092623493.png“에일스포드는 예전과 달라. 마석 광산을 가지고 있고, 비옥한 과수원도 가져왔지. 예전처럼 힘없이 남아 있다면 이익을 탐내는 자들이 활개 칠 거다. 힘이 필요해.”

그리고 그 힘을 빌려줄 상대로 황제를 택했다는 이야기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파벨을 발견한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1655092623493.png“무서우면 달리는 말에서 내려도 돼.”

언제든 평온을 찾아 떠나도 좋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에 파벨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16550926234919.png“누가 그렇답니까. 전 원래 속도를 즐깁니다.”

1655092623493.png“말도 못 타는 녀석이 무슨.”

16550926234919.png“못 타는 건 아닙니다. 두 발로 걷는 것보다 말을 탄 게 더 느릴 뿐이죠.”

1655092623493.png“……그건 그냥 못 타는 거 맞잖아?”

알테어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092623493.png“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군.”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도, 다가올 회합을 위한 대비도. 모두 끝이었다. * * *

16550926360248.png“……일이 그렇게 된 거군요.”

제대로 설명을 듣긴 했지만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알테어는 발하일의 위협을 예견했고, 그걸 이용해서 그를 완전히 나락에 떨어뜨리려고 했다. 아주 똑똑한 수였다. 만약 내가 소설의 독자로서 이 이야기를 접했다면 알테어의 영민함에 감탄했을 거다.

16550926360248.png‘하지만…….’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을 떨어져 바라보는 독자가 아니라 이 이야기 안에 살아 숨 쉬는 나디아 에일스포드였다. 나는 조금 멍한 심정으로 발하일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위협했고, 억지로 굴복시키려고 했다. 발하일이 공격했던 목에는 아직도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숨이 턱 막혔을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6550926360248.png‘이게 멋진 방법이었다는 건 알아.’

전부 아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치솟았다. 그것의 정체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서운함이었다.

16550926360248.png‘너무…… 서운해.’

나는 발하일이 거칠게 손으로 잡아챘던 목덜미를 매만지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알테어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었지만,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 알테어가 허공에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16550926360248.png“……이해는 해요. 저한테 미리 알려줬으면 전 분명히…… 삐걱대면서 실수했을 거니까…… 그리고 알테어라면 내가 위험하지 않게 손을 다 써뒀을 거고, 실제로 카인이 나타나서 도와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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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하다 보니 더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참고, 참고, 또 참고.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늘 참고 살았으니 감정을 누르는 건 익숙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예전처럼 참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눈을 꾹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16550926360248.png“……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다 이해할 수 있겠죠. 마차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요. 옷도 갈아입어야 하니까요.”

1655092623493.png“나디아.”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알테어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소리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나와 알테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카인이 재빨리 내 뒤를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걸어온 길을 거슬러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스스로의 멍청함에 화가 났다. 이렇게 으슥한 곳에 막사가 있는데, 어째서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 못 하고 순순히 걸어 왔을까.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는데 말이다.

16550926388879.png“저어…… 마님…… 영주님께서는 마님께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나서라고 하셨습니다.”

쿵쿵대며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카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0926388879.png“저도 바로 나서려고 했습니다만, 검은 드래곤 기사단이 나타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자의적인 판단으로…… 제 불찰입니다.”

16550926360248.png“아뇨. 그건 옳은 판단이었어요.”

카인이 조금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내 이상한 낌새를 느낀 발하일이 도주하기라도 했다면 지금처럼 깔끔하게 그를 체포할 수는 없었을 거다.

16550926360248.png“계획은 완벽했고, 카인은 그 계획에 맞게 움직인 것뿐이지요. 나도 그걸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난 사람이잖아요.”

16550926388879.png“마님…….”

16550926360248.png“머리로는 이해해요.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계획에 휘말렸으니, 그 계획이 신뢰하던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 서운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내 마음까지 말리지는 말아주세요.”

16550926388879.png“……예.”

카인이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사이 마차가 늘어선 곳까지 닿을 수 있었다. 에일스포드의 마차는 여러 마차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편이라, 금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차를 지키고 있던 기사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날 보고 놀란 눈을 했다. 평소라면 미소를 지어 그를 안심시켜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마차 문을 열고 안에 틀어박혀 문을 닫았다. 작은 공간에 혼자 남아 숨을 골라 보았지만 쿵쿵 뛰는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 심장 소리가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16550926360248.png‘난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구나.’

서운한 것을 넘어 알테어에게 화가 난 거다.

16550926360248.png‘감히, 내가?’

그 사실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16550926360248.png“하. 네가 그럴 주제나 되니, 나디아 에일스포드.”

스스로를 향한 질책과 함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평화로운 회합에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나 오르카는 조용히 부하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전해온 소식은 놀라웠다.

16550926415888.jpg“전하. 검은 드래곤 기사단이 사람 하나를 체포했다고 합니다.”

16550926415892.jpg“검은 드래곤 기사단이? 누구를?”

16550926415888.jpg“발하일 에일스포드라고 합니다. 감히 전하를 노린 것 같습니다.”

16550926415892.jpg“그자가 나를? 그럴 만한 담력은 없어 보였는데.”

오르카는 제 앞에서 비굴하게 굽신거리던 발하일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사건에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16550926415892.jpg‘그리고…….’

16550926415892.jpg“또 에일스포드라.”

요즘 그 이름이 계속 귀에 들린다. 미소가 사라진 오르카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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