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반했어.2021.10.10.
감히 황자를 살해하려 했다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탓에 사냥은 급히 중단되었다. 길란 백작은 어쩌다 이런 소란이, 하필 자신이 주최를 맡은 이 타이밍에 일어나고야 만 것인지 좌절하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소, 송구합니다, 전하. 그, 발하일이라는 자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일 거라고는…….”
황자의 분노가 자신에게까지 튀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길란 백작은 거의 바닥에 엎드릴 기세로 굽신거렸다. 뒤에서 수많은 동부 귀족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체면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감히 황족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반역이라니!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 죄목에 함께 엮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렸다.
“백작이 송구할 일이 아닙니다. 주최자가 모든 손님의 결백까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길란 백작의 걱정과 달리 오르카 황자는 너그럽게 상황을 이해해주었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오르카 황자의 모습을 살폈다.
‘3황자가 사자 같은 황제와 가장 안 닮은 자식이라더니.’
세간의 소문은 정확했다. 1황자가 황제의 외모를 닮았고, 2황자가 황제의 성정을 닮았는데, 3황자는 도무지 닮은 구석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3황자가 황제의 자식이 아니라는 소리도…….’
입 밖으로 차마 꺼낼 수 없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찰나 서늘한 시선이 느껴져 길란 백작이 움찔했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따라 고개를 들자 오르카 황자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착각이었나?’
유약한 황자가 그런 기세를 뿜어낼 리는 없으니 착각일 거다. 길란 백작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굽신대던 허리를 폈다.
“회합은 여기에서 끝내고 손님들을 조사할까 합니다. 혹시 모를 공범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랬다가는 전하에 큰 위협이 될 테니까요.”
“하하. 나 같은 사람을 노릴 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래도 백작의 대처를 믿어 보지요.”
“처음으로 동부 회합을 찾아주셨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송구할 따름입니다.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면, 좋은 날을 잡아 다시 초청 드리고 싶습니다.”
“초대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런데…….”
오르카 황자가 모여서 웅성대고 있는 귀족들을 살피며 물었다.
“이번 사건에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휘말려 곤란을 겪을 뻔했다죠?”
“아아…… 그렇습니다. 도주하던 범인이 하필 남작 부인이 있던 막사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 그랬던가요?”
“남작 부인을 인질로 삼아 협상이라도 시도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검은 드래곤 기사단이 빠르게 나타나서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합니다.”
오르카 황자가 잠시 눈을 반짝였다. 사실이 그가 전해 들은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에일스포드 남작이 손을 쓴 모양이군.’
불미스러운 소문에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건 아주 피곤한 일이니 똑똑한 선택이었다.
“남작 부인이 나 때문에 무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마음이 쓰이는군요. 직접 만나 위로를 하고 싶은데…….”
“지금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어 손님을 맞이하기 곤란한 상황입니다.”
오르카 황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불쑥 등장했다. 에일스포드 남작 알테어였다. 그리고 그는 혼자 등장한 게 아니었다.
“악!”
높은 비명소리와 함께 중년의 여자가 바닥에 내던져졌다. 길란 백작 부인의 시녀였다.
“세, 세상에 이게 무슨…….”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길란 백작 부인이 희게 질려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웅성대고 있던 귀족들도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라 웅성거리던 것도 멈추고 조심스레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길란 백작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남작!”
그게 어떤 잘못이든, 가문의 사용인을 벌할 권리는 가문의 주인이 가지고 있었다. 사용인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곧 그 가문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위세가 대단한 가문의 사용인들은 웬만한 귀족들처럼 콧대가 높았다. 그런데 알테어는 그런 사교계의 룰을 무시하고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길란 백작가의 시녀를 바닥에 내던진 것이다.
“내게 허락도 받지 않고 우리 가문의 시녀를 건드리다니, 이게 얼마나 큰 무례인지 알고 있소?”
길란 백작이 당당하게 소리 높여 항의했지만 알테어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녀를 서늘하게 바라보며 또박또박 상황을 설명했다.
“이 시녀가 감히 황자 전하의 암살에 가담했기에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잡아 온 겁니다.”
“무, 무어라고?! 아, 암살!”
“그렇습니다. 저희 기사가 이 시녀와 발하일이 접촉하는 것을 보았다는군요.”
“그, 그런…….”
시녀가 황자 암살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면 주인인 길란 백작까지 의심받게 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건 무조건 알테어의 오해로 끝나야 하는 이야기다.
“제,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이게 무슨 모함인가, 에일스포드 남작!”
“제가 설마 증거도 없이 그랬겠습니까.”
알테어가 피식 웃으며 턱 끝으로 시녀를 가리켰다.
“이 시녀가 발하일에게 금화를 받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다른 곳에 숨길 시간은 없었으니 그걸 아직 가지고 있을 겁니다.”
알테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르카 황자의 옆을 지키고 있던 부하가 시녀의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 하나를 찾아냈다. 주머니는 고스란히 오르카 황자의 손에 들어갔다. 오르카 황자가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 금화가 가득했다.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 그, 그, 금화가 발하일이 준 것이라는 증거도 없잖소!”
다급하게 꺼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길란 백작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조금 더 자신에 찬 목소리로 턱을 치켜들었다.
“금화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데, 그걸 가지고 있다고 우리 시녀가 발하일 그놈과 한패라니! 남작을 좋게 보았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하나!”
하지만 알테어는 길란 백작의 호통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르카 황자에게 다가섰다.
“금화는 증거가 못 됩니다. 대신 주머니는 특별하지요. 향을 맡아보시겠습니까?”
“향?”
오르카 황자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주머니를 코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대단한 것을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이건…….”
“발하일은 멋 부리기를 좋아해서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그 배합도 자기만 알고 있고요.”
“그런데 이 주머니에서 같은 향이 나는군.”
더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는 듯 오르카 황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소리에 길란 백작이 하얗게 질려서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전하!”
오르카는 말이 없었다. 부드러운 미소도 어느새 얼굴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그 모습에 더욱 속이 탄 길란 백작이 허둥대며 바닥에 꿇어앉은 시녀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망할 것이 감히 이딴 수작을! 누굴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어? 응?”
“저, 저도 몰랐습니다! 그냥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그분이 그렇게 무서운 짓을 꾸밀 거라고는……!”
팔을 휘저어 발길질을 막으려 애쓰는 시녀를 보며 큰 충격을 받은 건지 길란 백작 부인이 픽 쓰러졌지만,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 싶어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 소란 속에서 알테어는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발길질 당하는 시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으음…….’
그리고 그런 알테어의 모습을 오르카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든단 말이지?’
슬쩍 오르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 동부 순회는 꽤 좋은 성과가 있겠어.’
*** 길란 백작 부인의 시녀는 결백을 증명하려는 길란 백작의 발길질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응당 시체를 수습하는 것이 도리겠으나, 반역자라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누구도 나서지 못한 탓에 모두가 흩어질 때까지 시녀의 시신은 그 자리에 남겨져 있었다. 이제 그녀는 숲을 떠도는 수많은 짐승의 먹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터였다. 회합은 완전히 끝났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귀찮은 적을 치워버린 알테어의 얼굴은 개운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거운 얼굴로 그보다 더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알테어를 보며 카인이 작게 헛기침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발하일은 제대로 치워버린 것 같습니다.”
“…….”
“악명 높은 감옥에 들어갔으니 살아 돌아오긴 힘들 거고, 이제 그쪽에 부당하게 뺏긴 땅만 되찾아오면 긴 악연도 끝이네요.”
“…….”
“그리고 또 그 시녀도 잘 처리됐으니까 마님께도…….”
마님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알테어가 걸음을 멈췄다. 카인이 움찔하며 알테어의 눈치를 살피다가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헤집었다.
“마님께서도 상황은 이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너무 그렇게 침울해하지 않으셔도…….”
“침울한 게 아니다.”
“그렇게 보이시는데요? 귀가 축 늘어진 개를 보는 것 같습니다.”
“넌 무슨 비유를 해도 개x끼에……!”
근본 없는 비유에 발끈했던 알테어가 어느새 가까워진 마차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카인의 실없는 말에 버럭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기분이었다.
“우선 넌 명령 불복종으로 근신이다. 지정된 상황에서 내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니까.”
“예. 마님께는 제가 잘 설명 드리겠습니다.”
“설명?”
다소 풀이 죽어 있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카인을 노려보았다.
“주제넘게 굴지 마. 설명은 내 몫이다. 부하에게 설명을 맡기는 상관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네가 대장이야?”
“……아닙니다.”
혼쭐이 났는데도 어째서인지 카인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 모습이 얄미워 알테어는 카인의 등을 후려쳤지만, 그럼에도 그의 미소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냥 말로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마님께서 기분이 많이 상하신 상태이니 선물이라도 드리는 게 어떨까요?”
“……선물?”
이번에는 알테어도 솔깃한 모양이었다. 흥미를 보이는 알테어의 모습에 카인이 용기를 얻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혹시라도 마님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한껏 낮춰 알테어의 귀에 속삭였다. 무어라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알테어가 못 믿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카인을 바라보았지만, 카인은 자신을 믿어 보라며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정말 믿어도 되는 건지.”
갈등에 빠진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며 나디아가 있을 마차를 힐끗댔다.
‘뭐…… 그래도 지금은 어떤 것이라도 하는 게 좋겠지.’
평생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본 적이 없는 터라 알테어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낯설고 어려웠다.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한 티를 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없었다. 나를 미워한다면 미워하라지. 늘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지만, 나디아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 그녀와 가까운 남편이 되고 싶었다.
결심이 섰다. 알테어가 주먹을 말아 쥐어 가볍게 카인의 가슴을 치며 비장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 안 통하면, 그땐 정말로 죽을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