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딱 이틀만.2021.10.13.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회합이 마무리되었다. 들뜬 마음으로 길란 백작령에 모여들었던 귀족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우리 일행 역시 떠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이동을 시작했다. 마차에만 틀어박혀 마음을 정리하느라 바깥 상황은 잘 몰랐지만, 마리가 이야기를 전해준 덕분에 조금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동안 동부에서 회합이 열리긴 힘들 것 같아요.”
“그래?”
“네. 이렇게 큰 사건이 터졌으니…… 한동안 눈치를 보겠지요.”
“잘됐다. 한동안 조용히 지낼 수 있겠네.”
내가 창밖을 바라보며 침울하게 대꾸하자 마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마님.”
“응?”
“중요할 때 마님의 곁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
“아냐. 무슨 소리야. 시녀들은 모두 다른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마리가 어떻게 내 곁을 지킬 수 있었겠어.”
“그래도요. 제가 있었다면 발하일 그놈의 거시기를 걷어차 줬을 거예요!”
차분한 것이 장점인 마리가 드물게 흥분해서 씩씩댔다.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 중인 모습에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걸 본 마리의 얼굴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창밖에 살짝 비친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희미하게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깨끗하게 지워졌다. 나를 따라 시선을 돌린 마리가 알테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난처한 듯 손을 꼼지락댔다.
“카인 경에게 물어보니, 정말로 영주님께서는 마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알아. 나도 상황을 이해하고. 하지만 기분이 안 좋아.”
창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앞을 보며 말을 몰던 알테어가 마차로 시선을 돌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 작은 창문에 달린 커튼을 쳐버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되며 고요한 마차 안의 공기만 느껴졌다.
“마님…….”
그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마리가 난처하게 나를 불렀다.
‘세,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지막까지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 알테어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예. 영주님께서도 분명 이해하실 겁니다.”
마리는 내 말에 선선히 동의하면서도 조언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다는 건 아시죠? 이런 어색한 시간이 익숙해지면,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은 부부로 지내는 방법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사이좋은 부부? 나와 알테어가 그렇게 보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마리가 설마 그걸 몰랐냐는 듯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귀족들 중에 매일 침대를 공유하는 부부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수도에서는 그렇겠지만…… 여기서는 평범한 일이고…….”
“침대만 공유하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대로 밤을 보내고 계시잖아요?”
“그, 그거야 알테어가 후계자를 원하기 때문에…….”
“단지 그것뿐이라고 할 수 있으세요?”
마리가 연이은 질문으로 회피하려는 나를 몰아세웠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단순히 후계자를 가지기 위한 거였다면 임신하기 좋은 날을 따져서 밤을 보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알테어와 함께 밤을 보내며 그런 부분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알테어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니 피하지 말고 영주님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마님의 생각도 이야기하시고요. 대화야말로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랍니다.”
마리의 조언에 생각이 많아졌다. 소심하고 심약한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이 대화였다. 사람을 마주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다. 그래서 혼자 짐작하고, 혼자 결론 내리는 게 익숙했다. 그렇게 살아와도 큰 문제가 없었던 건 내가 누구와도 오랜 인연을 이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테어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겠지.’
나와 알테어는 부부니까. 짧게 스쳐 갈 인연이 아니었다. 마리의 조언처럼 대화로 상황을 풀어야 한다.
‘대화라니…… 어떻게?’
문제의 막사에서도, 조금 전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내가 먼저 매몰차게 알테어를 외면해버렸는데.
‘인제 와서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지만 쉽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끙끙대며 고민하고 있으니 마리가 작게 웃으며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와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주었다.
“벌써 고민하시라고 한 말은 아니고요. 영주님께서 마님을 서운하게 하신 건 사실이니, 며칠 정도는 화를 내도 되지요.”
“그, 그래? 며칠 정도가 정확히 며칠이야? 하루? 이틀?”
기간을 묻는 내 말에 마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니면 사흘?”
너무 짧은 기간을 부른 건가 싶어 크게 마음을 먹고 3일의 기간을 제안하자 마리가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보름은 족히 어긋난 채로 계실까 봐 미리 말씀드렸던 건데, 하루 만에 화를 푸실 생각이셨던 거예요?”
“보름이나 화를 내라고?!”
생각지도 못한 기간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리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뇨. 뭐든 마님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셔야죠.”
“그럼…… 딱 이틀만 화내볼게.”
마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마음이 놓였다.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미소가 꼭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리가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었다면 난 계속 바보처럼 혼자 끙끙댔을 테지. 바인 후작가에서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바인 후작가를 떠올리니 절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리 역시 비슷한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제 그곳 일은 모두 잊으시고…….”
차분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마리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평온하게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크게 휘청이더니 그대로 옆으로 넘어간 것이다.
“악!”
몸이 그대로 붕 떠올라 마차와 함께 옆으로 고꾸라졌다.
‘아, 안 돼!’
마리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부딪힐 것 같아 나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감쌌다. 말 그대로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리를 감싸는 것으로 내 몸이 대신 땅에 직격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온몸이 고통으로 잠식된 이후에나 깨달을 수 있었다.
‘윽!’
너무 아파서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순간 숨이 턱 막혀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마님!”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마리가 크게 소리치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덕분에 영원히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숨이 한 번에 훅 폐부로 들이쳤다.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에 늘어지자 마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머리를 감쌌다.
“어, 어, 어, 어떡해요! 세상에!”
덜덜 떨리는 마리의 손에 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아마도 내 머리에서 나온 피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너무 아파서…… 피를 봐도 무섭지가 않네…….’
평소라면 질색하며 기절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정신을 놓지 않고 숨을 쉬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심력이 모두 소모되었다.
“이게…… 도대체…… 세상에…….”
일 처리가 확실한 마리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옆으로 고꾸라진 마차의 문이 활짝 열리고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꺄악!”
괴한의 등장에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감쌌다. 어떻게든 날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져 머리가 느리게 굴러가는 와중에도 슬쩍 미소가 흘러나왔다.
“진정하세요! 접니다, 저!”
마리의 비명을 비집고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익숙해서 나를 끌어안고 있던 마리의 팔에서도 힘이 스르르 풀렸다.
“카, 카인 경?”
“예. 접니다.”
마리가 긴장을 놓고 깊게 숨을 들이켜며 카인의 등 뒤를 힐끗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갑자기 마수가 덮쳤습니다. 놈이 쓰러지면서 마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마님께서…….”
“네? 마님께서 다치셨습니까?”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던 카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가 쓰러진 마차 안으로 당장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안으로 넣어 상황을 살피더니 금세 눈을 크게 떴다.
“아니, 피가…….”
“흐윽. 절 감싸다가 심하게 다치셨어요. 제가 이렇게 다쳤어야 했는데…… 어째서 마님께서…….”
나는 자책하는 마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다치면 안 되는 거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하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힘이 없어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우선 마님을 밖으로 모셔서 응급처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마리가 어서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카인이 쓰러진 마차의 문짝을 손으로 뜯어낸 뒤 안으로 들어와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마리와 둘만 있을 때는 넓게만 느껴지던 마차가 커다란 남자가 들어서니 아주 작게 느껴졌다. 마차가 넘어지며 일부가 파손된 탓에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문을 뜯어낸 곳에 긁혀 카인의 등에도 큰 상처가 생겼지만, 그는 아픔도 못 느끼는 것인지 묵묵히 나를 안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카인에게 안겨 마차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땅에는 거대한 마수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고, 기사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수가 제대로 죽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우리 사람 중에서는 부상자가 없어 보였다. 뒤집어쓴 피도 모두 마수의 것인 듯했다. 그러나 카인은 소란스러운 주변 상황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흔들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부상 당한 내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주님!”
카인의 외침을 따라 무겁게 고개를 돌리니 시선 끝에 알테어가 있었다. 그는 바쁘게 현장을 수습하다 카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고는, 드물게 놀란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카인에게 안긴 내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알테어가 지시를 내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입을 살짝 벌렸다. 카인은 황급히 그 앞에 다가가 그를 재촉했다.
“영주님! 어서 치료해야 합니다. 출혈량이 상당합니다.”
“…….”
“주위에 마을이 있을 테니 의사를 불러서…… 아니, 아직 길란 백작령에서 멀어지지 않았으니 그쪽에 사람을 보내 의사를 요청하는 게…….”
“…….”
카인이 다급하게 제안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알테어는 여전히 굳은 상태였다. 그것을 눈치챈 카인이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영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꾸물대다가는 정말 큰일 납니다!”
버럭하는 소리에 굳어 있던 알테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사를 불러오면 늦을 수도 있어.”
무언가 생각을 정리한 듯 알테어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피가 흐르는 내 머리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지혈하는 알테어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지혈만 한 뒤 마을로 데려간다.”
“마차가 저 지경이라…… 가능할까요?”
“내가 데려간다.”
“영주님께서, 직접이요?”
“여기에 나보다 발이 빠른 놈은 없으니까. 내가 간다.”
급박하게 이어지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마지막 정신의 끈을 뚝 놓아버렸다.
‘딱 이틀만 화내기로 결심했는데.’
어쩌면 그 결심을 지키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