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위험한 결정.2021.10.17.
매우 급한 상황인데도 알테어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 발걸음을 떼어도 모자랄 상황에 망설이는 알테어를 보며 카인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인을 뒤따라온 마리도 차마 재촉하지 못하고 다급함에 발만 동동 굴렀다.
“영주님?”
참지 못한 카인이 결국 알테어를 불러 다급한 상황을 일깨우자 그제야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돌시안으로 가야겠다.”
한참 망설인 것에 비해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미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차분한 알테어와 달리 카인은 불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인의 반응에 불길함을 느낀 마리가 바들바들 떨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돌시안이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돌시안은 칼타스 왕국에 속하는 마을입니다.”
“네?!”
칼타스 왕국은 루페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로, 지리적인 이유로 오래도록 싸움이 끊이지 않아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적국이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속하는 마을로 가겠다니? 마리가 해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시녀의 분수를 잘 알고 있는 평소의 마리라면 감히 주인에게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위급상황이었다. 알테어도 무례할 수 있는 마리의 눈빛을 지적하지 않았다.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면 돌시안과 쿠드라인데, 거리상으로 돌시안이 훨씬 가깝다.”
돌시안 마을은 칼타스 왕국령, 쿠드라 마을은 루페스 제국령이었지만, 타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동부의 특성 탓에 칼타스 왕국령에 속한 마을이 더 가까운 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알테어가 내린 결정의 이유를 알아챈 카인이 복잡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쿠드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최소 3시간 차이다. 한시가 급해.”
“그건…… 그렇지만…… 하필 칼타스 왕국령이라니…….”
그쪽에서 루페스 제국 사람을 반길 리가 없다. 그러니 알테어도 바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망설인 것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나디아의 치료가 먼저다. 돌시안으로 간다.”
“그럼 기사를 데리고…….”
“그렇게 우르르 몰려가다니, 우리가 루페스 제국 사람이라고 자랑할 셈이야? 인원은 적을수록 좋아.”
알테어가 그렇게 말하며 외투에 달려 있던 단추를 모두 떼어내 바닥에 내던졌다. 단추에는 루페스 제국과 에일스포드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눈썰미 좋은 자에게 정체를 들킬 수도 있었다.
“전원 이곳에서 대기하며 상황을 조사하도록 해. 마수가 나타나지 않는 지역인데 갑자기 습격을 당했으니 분명 배후가 있을 거다.”
“……예.”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 내게서 별다른 소식이 없다면 먼저 에일스포드로 복귀하도록.”
“그럴 수는……!”
카인이 반발하려 하자 알테어가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국경 부근에서 루페스의 기사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 너희를 배려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니 따르도록.”
“……예.”
카인이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카인의 기분을 모를 리 없는 알테어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이곳 수습은 너에게 맡긴다, 카인.”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마님의 치료도 확실히 하시고요.”
“흥. 누굴 걱정해?”
알테어가 코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카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평소와 달리 간지러울 정도로 약한 발길질이었다. 어쩐지 그 사실에 코끝이 찡해져 카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알테어에게 나디아를 넘겨주었다. 알테어는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나디아를 받아서 들어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타스 왕국령의 돌시안 마을. 그곳으로 간다. *** 평화롭던 국경의 시골 마을은 피를 뒤집어쓴 괴한의 등장으로 발칵 뒤집혔다.
“꺄아악!”
냇가에 삼삼오오 모여 빨래하던 부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하자, 피를 뒤집어쓴 매서운 인상의 남자가 다급하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미처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훌쩍 다가온 엄청난 움직임에 모두가 놀라서 굳어버린 채 괴한의 모습을 살폈다.
‘어머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괴한의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아니, 제법 볼만한 게 아니라 아주 볼만했다. 잘생긴 얼굴의 위력은 대단해서 부인들은 위급한 상황인 것도 잊고 입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곧이어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에 정신을 번뜩 차렸다. 괴한의 품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자가 미동도 없이 안겨 있었는데, 정황상 그가 이 여자를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이동하다 자신들과 마주친 게 틀림없었다.
‘도, 도, 도, 도망쳐야 해!’
부인들이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든 마을로 도망쳐 치안대를 불러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이 발걸음을 떼는 것보다 괴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의 입에서 유려한 칼타스어가 흘러나왔다.
“제 아내가 많이 다쳤습니다. 혹시 마을에 의사가 있습니까?”
“……네? 아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부인들이 눈을 껌뻑였다. 시체를 안은 괴한, 아니, 다친 아내를 안은 남자는 그들의 굼뜬 행동이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의사가 필요합니다. 아내가 피를 많이 흘려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에구머니나!”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부인들이 빨랫감도 모두 내던진 채 남자에게 다가왔다.
“부인이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요?”
“여행 중에 마수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나. 그렇지. 여긴 마수가 많지. 이럴 때가 아니니 날 따라와요!”
*** 알테어는 안타까운 얼굴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푸근한 인상의 여자를 뒤따르며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히 루페스 사람이라는 건 들키지 않은 모양이군.’
칼타스 사람이나 루페스 사람이나 생긴 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자연스러운 칼타스어를 사용한 게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동부 귀족들은 이래저래 칼타스와 마주할 일이 많아 어렸을 때부터 칼타스어를 필수로 배웠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푸근한 인상의 부인은 알테어가 자신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불행 중 다행이에요. 우리 마을이 작기는 해도 진료소 하나는 제대로 있거든. 마수니, 루페스 놈들이니…… 매번 상대하느라 부상자가 많아서요.”
투덜거리는 이야기에 섞여든 ‘루페스’라는 말에 알테어가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심스럽게 기색을 살피니 의심해서 한 말은 아닌 듯했으나 알테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계심을 높였다. 혼자라면 무슨 일에든 대처할 수 있지만, 지금은 큰 상처를 입은 나디아까지 보호해야 하니 작은 위협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저쪽이 진료소예요!”
부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진료소임을 표시하는 하얀 깃발이 꽂힌 작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목적지를 발견한 알테어는 부인의 안내를 기다리지 못하고 속도를 높여 한달음에 진료소로 달려갔다.
“어이쿠! 신랑이 뭘 먹고 이리 빠르시대? 가, 같이 가요!”
알테어를 친절하게 안내해준 부인도 허겁지겁 속도를 높여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평범한 아낙의 다리로 오러를 다루는 기사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알테어는 순식간에 진료소까지 주파한 뒤 문을 벌컥 열었다. 진료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의사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피투성이가 된 알테어와 나디아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환자를 이쪽으로.”
긴 이야기가 오갈 필요도 없었다. 의사는 재빨리 비어 있는 침대를 가리키며 치료 도구를 준비했고, 알테어도 말없이 그의 지시에 따라 나디아를 침대에 눕혔다.
“마수의 습격에 마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머리를 다쳤습니다. 지혈은 해두었는데, 출혈이 상당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의사가 나디아에게 다가오자마자 알테어가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를 압박하고 있던 외투를 치우던 의사가 눈을 반짝이며 알테어를 힐끗댔다.
“……지혈을 상당히 잘하셨습니다. 수준급이시군요.”
의사의 목소리에 묘한 구석이 있어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기사로서 검을 수련하며 웬만한 응급처치는 다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전문가인 의사의 눈에 그 능숙함이 포착된 모양이었다.
“……칼타스 정규군 소속의 기사입니다. 지혈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알테어가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 변명했다. 루페스 군을 상대하며 그들의 편제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었다.
“아. 역시 그러셨습니까.”
다행히 의사에게도 그 변명이 통한 건지 그가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며 치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길고 벌어져 있어 봉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는 능숙하게 손을 움직여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봉합을 마쳤다. 국경지대에서 부상자들을 많이 돌본 덕분인지 손놀림이 신묘할 정도로 빨라서, 알테어가 잠시 상황도 잊고 감탄할 정도였다.
“문제는 의식인데…… 사고를 당한 게 얼마나 되었습니까?”
“네 시간 정도 전입니다.”
“출혈이 상당했겠군요. 상황을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나디아를 바라보다, 뒤늦게 진료소로 따라온 푸근한 인상의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티 씨. 붕대가 모자랄 것 같은데…… 잡화상에서 얇은 천을 좀 얻어 와주실 수 있을까요? 비용은 제가 나중에 지급하겠다고 해주시고요.”
“아이고. 알겠어요, 선생님. 당장 다녀올게요!”
의사의 다정한 부탁에 푸근한 인상의 부인, 리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둘러 진료소를 나섰다. 다급하게 떠난 리티 탓에 문이 쿵- 하고 거칠게 닫히자 진료소 내부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의사도, 알테어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제자리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쪽은 알테어였다. 그는 척척 걸음을 옮겨 책상에 놓인 진료 도구 상자를 뒤집었다. 그러자 안에 담겨 있던 도구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중에는 붕대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걸 정리하고 있던 사람이 붕대가 있다는 걸 잊었을 리는 없고.”
“…….”
“거짓말까지 하면서 부인을 내보낸 걸 보면 뭔가 낌새를 느낀 모양인데.”
알테어가 쏟아진 진료 도구 사이에 있던 가위를 집어 들어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서늘한 위협감이 느껴진 건지 의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테어는 가위를 빙글 돌리며 천천히 의사 앞으로 다가가 그의 목에 날카로운 가위를 가져다 댔다.
“쓸데없는 짓을 하면 상황이 재미없어질 거다.”
가위보다 날카로운 위협이었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의사는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서 알테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침착함에 알테어의 눈에서도 이채가 흘렀다. 한참이나 알테어와 예리하게 대치하던 의사는 여전히 차분한 손으로 목에 닿은 가위를 슬쩍 밀어냈다.
“지금 부인을 치료할 사람은 저뿐이니 절 해치지는 못하실 겁니다, 에일스포드 남작님.”
그의 입에서 정확하게 알테어의 정체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