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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정체가 뭐야? (39/170)

40화. 정체가 뭐야?2021.10.20.

16550927174604.jpg‘게다가…….’

의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언어가 어느새 칼타스어에서 루페스어로 바뀌어 있었다. 자연스러운 변화에 순간 알테어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16550927174604.jpg“……루페스 사람인가?”

알테어의 질문에 의사는 대답 대신 의미 모를 묘한 눈빛을 하며 나디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나디아를 인질로 삼으려는 것인가 싶어 알테어가 황급히 의사의 손목을 붙잡자, 그가 다소 귀찮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27174617.jpg“전 의사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환자의 생명을 이용하진 않아요.”

그의 눈빛에서 썩 진심이 느껴져 알테어는 최소한의 경계는 거두지 않으면서도 의사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가 그대로 나디아에게 다가가 체온을 측정하고 분주하게 진료를 이어가며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16550927174617.jpg“……남작님이 무슨 의도로 여기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시안 사람들은 다 좋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딘가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말투에 알테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을 악당 취급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16550927174604.jpg“어떻게 가만히 안 있을 건데?”

알테어가 삐딱하게 서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알테어가 ‘어떻게’라는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의사가 잠시 삐걱대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16550927174617.jpg“그건…… 제가 어떻게든…….”

그 모습에 조금이나마 알테어를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맥없이 탁 풀어졌다. 이 자는 누군가를 위협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도 못한다. 이 남자는 선량한 자였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적을 상대해 온 알테어는 그 점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선량한 남자가 자신에게 경고하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알테어는 그것이 궁금해 의사를 가만히 살폈다.

16550927174604.jpg“루페스어는 어떻게 배웠지? 나는 어떻게 알아봤고?”

16550927174617.jpg“……정말로 하나도 기억을 못 하시는군요.”

이어지는 알테어의 질문에 의사가 살짝 질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27174617.jpg“남작님 같은 분에게는 사소한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저에게는…… 그러지 않았어요.”

16550927174604.jpg“날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건가?”

알테어는 적이 많았고, 적을 무너뜨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적들이 생겨났다. 이런 식으로 우연히 적을 만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이런 유약한 적은 상대한 적이 없었다.

16550927174604.jpg‘의사라니.’

알테어의 적은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귀족들이나 투박하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맹세컨대 의사를 적으로 돌릴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었다.

16550927174604.jpg‘그렇다면 내가 적으로 돌린 자의 가족? 친구?’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끝이 없었다.

16550927174617.jpg“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하나뿐입니다. 돌시안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세요. 저 역시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16550927174604.jpg“건드릴 생각 없어. 난 내 아내의 회복만 바랄 뿐이다.”

16550927174617.jpg“…….”

진심을 확인하려는 듯 의사가 알테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붕대를 구하러 떠났던 리티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품에는 천이 한가득 안겨 있었다.

16550927174617.jpg“리온 선생님! 이거면 되겠어요?”

16550927174617.jpg“충분하지요. 고생하셨어요, 리티 씨.”

조금 전까지 알테어를 매섭게 바라보던 의사, 리온이 날카로움을 한꺼번에 거두며 리티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언어 역시 자연스럽게 돌시안 사람들이 쓰는 칼타스어로 바뀌어 있었다. 그 변화에 알테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리티는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16550927174617.jpg“고생은요! 선생님 덕분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 놓고 사는데요. 의사가 머무르는 마을이 흔한가요?”

16550927174617.jpg“그거야 여러분께서 절 먼저 거둬주셨으니 그렇지요.”

16550927174617.jpg“아이고. 사람이 죽어가는데 당연히 도와야죠. 누구라도 그랬을 텐데요.”

16550927174617.jpg“뭐…… 세상에는 그리 선량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리온이 슬쩍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리온의 말이 누구를 저격하는지 분명히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리티는 이번에도 안에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16550927174617.jpg“하긴. 우리도 그때는 송장 하나 치우는 줄 알았다니까요. 다 죽어가던 청년이 이렇게 훌륭한 의사 선생님인지 누가 알았겠어요.”

알테어는 조용히 리티의 말을 들으며 정보를 수집했다. 몇 가지 키워드를 조합하면 그가 어떤 사건에 휘말려 죽을 뻔했고, 그걸 돌시안 사람들이 살려준 듯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리온이 자신에게 가진 적대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16550927174604.jpg‘우선 이름은 알았으니…….’

카인에게 이곳의 소식도 전할 겸 리온의 정체에 대해서도 조사를 명해야겠다. 알테어가 그런 결론을 내리며 조용히 자리를 뜨려는 그때.

16550927174617.jpg“아이고! 지금 보니까 남편분도 몰골이 엉망이네!”

어느새 리티가 알테어의 옆에 바짝 다가와 그의 등짝을 가볍게 내리쳤다. 찰싹 얻어맞는 소리에 알테어는 물론이고 리온까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927174617.jpg“부인이 깨어나면 이 꼴을 보고 기절할걸요? 얼른 따라와요! 우리 신랑 옷이라도 빌려줄 테니 깨끗하게 씻는 것부터 하자고요!”

16550927174604.jpg“아니 저는…….”

16550927174617.jpg“어이쿠! 저 외투는 또 뭐람? 얼른 빨래하지 않으면 좋은 옷을 다 버리겠네!”

리티가 거절하려는 알테어의 팔을 질질 끌고 나디아의 상처를 지혈하는 데 사용했던 그의 외투를 집어 들었다.

16550927174617.jpg“이것도 내가 깨끗하게 빨아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16550927174604.jpg“그러니까 저는…….”

16550927174617.jpg“자, 우리 집은 이쪽이에요! 따라와요!”

16550927174604.jpg‘따라오라니. 이미 끌고 가고 있잖아.’

엄청난 기세에 알테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린 채 리티의 손에 끌려갔다. 그건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누구도 알테어를 이렇게 막무가내로 대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에일스포드의 영주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당연했고, 그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도 매서운 그의 기세에 겁부터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리티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16550927174617.jpg“어째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얼떨떨하게 끌려가는 알테어의 뒷모습을 보며 함께 넋이 나가 있던 리온이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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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어딘가 마음이 평온해지는 일상적인 소리와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사람의 발걸음 소리, 바람이 창문에 흔들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 눈을 껌뻑이며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를 구분하고 있으니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16550927216202.jpg‘누구지?’

마리의 걸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했고, 안나의 걸음이라기에는 다소 묵직했다.

16550927216202.jpg‘읏!’

낯선 소리에 경계심이 생겨 몸을 일으키려는데 생각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낑낑대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으로 생각되는 사람이 불쑥 시야에 나타났다.

16550927174617.jpg“아이고, 더 누워 있어요! 일주일이나 의식이 없었으니까 바로 움직이긴 힘들 거예요.”

16550927216202.jpg‘일주일?’

크게 다쳤다는 건 직감하고 있었지만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었을 줄은 몰랐다.

16550927216202.jpg‘여긴 에일스포드 성은 아닌 것 같은데…….’

들려오는 말이 루페스어가 아니었으니 확실했다.

16550927216202.jpg‘아무래도 칼타스어인 것 같은데.’

수도 귀족들은 칼타스어를 잘 배우지 않지만, 나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무료한 시간을 각종 지식을 섭렵하는 데 소비했다. 그렇게 쌓은 지식 중에는 칼타스어도 있었다. 유려하게 말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간단한 대화는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곳이 칼라스령이라면 이곳은 적국에 속해 있는 곳.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긴장감에 몸이 바싹 어는 기분이었다.

16550927216202.jpg‘어쩌다 적국으로 오게 된 거지?’

움직이기 힘들어 주변을 꼼꼼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에일스포드와는 공기가 완전히 다른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 나타난 여인도 푸근한 인상이었지만 낯선 사람이라 긴장이 되었다. 내 눈에 나타난 의문과 불안을 알아챈 건지 불쑥 나타난 여인이 빙긋 웃으며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16550927174617.jpg“난 리티고, 여긴 우리 집이에요. 남편이랑 애들은 밭을 갈러 나가서 지금은 우리 둘뿐이고요. 아, 부인의 남편분도 일을 돕겠다고 같이 나갔어요.”

16550927216202.jpg‘부인의 남편이라면…… 내 남편이고…… 내 남편이면 알테어인데…….’

알테어가 밭을 갈러 나갔다고? 그 말에 조금 전까지의 긴장이 확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에 눈을 껌뻑이자, 자신을 리티라고 소개한 여인이 살짝 웃음을 흘리며 내가 일어나려고 애쓰는 동안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덮어 주었다.

16550927174617.jpg“처음에는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나서 깜짝 놀랐는데, 지내다 보니 남편분이 아주 다정하던걸요? 매일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수발들었답니다.”

16550927216202.jpg‘남편분이…… 다정?’

타인이 알테어를 설명하는 데 ‘다정’이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거였나? 나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16550927216202.jpg‘혹시 리티 부인이 다른 사람을 내 남편으로 착각한 거 아닐까?’

카인이 여기까지 날 데려와서 수발을 드는 바람에 그를 남편으로 착각했다든가.

16550927216202.jpg‘역시 그쪽일 가능성이 커.’

카인이라면 ‘다정’이라는 말과 썩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16550927216202.jpg‘게다가 마지막까지 날 안고 있던 사람도 카인이었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당연한 의문이 뒤따랐다.

16550927216202.jpg‘그럼 알테어는……?’

하지만 내가 스스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리티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16550927174617.jpg“머리를 워낙 크게 다쳐서 남편분은 물론이고 의사 선생님도 크게 걱정했어요. 의식이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요. 혹시 불편한 곳 있어요?”

걱정스러운 시선이 얼굴에 닿아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생각처럼 힘차게 고개를 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리티 부인에게 분명한 의사 전달은 된 모양이었다.

16550927174617.jpg“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부인의 의식이 돌아오면 알려달라고 하셨으니 지금 모셔올게요. 이대로 조금만 더 쉬고 있어요.”

16550927216202.jpg“……네.”

목을 쥐어짜 겨우 대답하니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목이 찢어질 듯 따가워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리티 부인이 안타깝다는 듯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그녀가 더 걱정할까 봐 걱정되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16550927216202.jpg“괜찮아요. 정말로.”

어설픈 언어로 짧게 대답했지만, 다행히 리티 부인은 그게 몸이 불편해서라고 이해한 것 같았다.

16550927174617.jpg“역시 목이 아프죠? 일주일이나 말을 못 하고 있었으니 목이 바싹 말랐을 거예요. 그럴 줄 알고 정신 차리면 언제든 마실 수 있도록 협탁에 물은 준비해뒀답니다.”

리티 부인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과연 침대 옆의 작은 협탁에 주전자와 컵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시선을 잡아끈 것은 컵으로 살짝 눌러 놓은 종이였다. 두 번 접어 투박하게 놓여 있는 종이에 내 시선이 닿은 걸 알았는지 리티 부인이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헛기침했다.

16550927174617.jpg“남편분의 외투를 빨래하려다가 발견했어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데…… 내가 물에 집어넣기 전에 먼저 주머니를 살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내용이 다 날아갈 뻔했다니까요.”

16550927216202.jpg“내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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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리티 부인이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16550927174617.jpg“난 까막눈이라 글은 몰라요! 하지만 몇 번이나 고쳐 쓴 걸로 봐서는 고심해서 쓴 편지 같아서…… 분명 부인에게 쓴 편지일 거예요! 이건 여자의 직감이랍니다!”

근거 없는 믿음으로 리티 부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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