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사랑하는 나의 나디아.2021.10.24.
‘리티 부인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건 카인이 누군가에게 쓴 연애편지?! 그렇다면 이건 내가 읽어서는 안 되는 편지였다. 하지만 카인이 내 남편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리티 부인이 잔뜩 기대에 차 어서 편지를 읽어보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언어 수준이 낮아 말을 길게 할 수도 없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흐린 눈으로 대충 읽는 척하자.’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접혀 있는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발견한 글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종이에 적힌 글씨의 필체가 아주 익숙했다. 알테어의 필체였다.
‘왜…… 알테어 글씨지?’
눈을 껌뻑이며 얼떨떨하게 종이를 바라보자 리티 부인이 다 알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맞죠? 연애편지?”
“어어…….”
리티 부인의 재촉에 빠르게 내용을 읽어내리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정돈된 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 줄을 읽는 것만으로도 알테어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려고 했는지 썼다 지운 흔적도 많았고, 이야기도 뚝뚝 끊어져 당사자에게 주려고 쓴 편지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점이 더욱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작은 종이 안에 정돈되지도, 꾸며내지도 않은 알테어의 진심만 담겨 있다는 뜻 아닌가? 그렇게 한참이나 편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뺨에 엄청난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리티 부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여, 연애편지 아니에요.”
“아니기는요!”
리티 부인이 거짓말할 생각은 말라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편지, 천천히 읽고 있어요. 나는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올게요.”
리티 부인이 사라지자 최대한 자제하고 있던 민망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종이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이걸 언제 쓴 거야…….’
달아오른 얼굴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 이야기는 회합이 끝나고 난 뒤, 길란 백작령에서 에일스포드 남작령으로 이동하는 길로 돌아간다. 알테어 일행은 긴 여정의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귀환을 서두르고 있었다. 사람의 체력은 정신력으로 버텨낼 수 있지만, 달리는 말은 적당히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금세 퍼져버리기 때문에 휴식이 필수였다. 알테어는 그 휴식을 매우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으나, 이번 여정에서는 달랐다. 짧은 휴식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알테어를 보며 기사들이 이상하다며 수군거렸을 정도였다.
“보물찾기라도 하시는 거래?”
“혼자서?”
“뭐, 원래 이해하기 힘든 분이시잖아.”
하지만 그렇게 수군대는 기사들과 달리 카인은 자신들의 대장이 무슨 일에 열중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알테어는 지금 ‘마님과 화해하고 싶다면 선물을 줘라!’라는 카인의 조언을 충실하게 따르는 중이었다.
‘정말로 내 조언을 따르실 줄은 몰랐지만.’
카인은 알테어에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쓰라고 조언했다. 값비싼 선물도 좋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진심이 담긴 손편지가 정답이라는 게 카인의 생각이었다. 알테어는 정말 그것만으로 되냐는 듯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카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왕 조언했으니 끝까지 도와드려야지.’
그건 정말 순수한 의도였다. 낯간지러운 편지를 쓰고 있을 알테어를 놀리기 위한 게 절대 아니었다. 카인은 휘파람으로 노래를 부르며 알테어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나무에 기대어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알테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잘 쓰고 계십니까, 영주님?”
카인이 불쑥 나타나 묻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꼭 어린아이의 숙제 검사를 하는 선생님 같은 카인의 말투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신경 꺼.”
“에이,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이왕 돕기로 했으니 확실히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마음이라니 확실히 말하지.”
카인의 두 눈에 가득한 장난기를 알아본 알테어가 딱 잘라 말했다.
“카인. 넌 가만히 있는 게 날 돕는 거다.”
물론 그런 알테어의 말에 쉽게 물러날 카인이 아니었다. 카인은 고개를 쭉 빼고 알테어가 쓰고 있던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미묘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대로 주시려고요?”
“……초안이야.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되어야 뭐든 쓸 거 아냐.”
“초안도 초안 나름이지요! 이렇게 투박하게 편지를 써서야 귀부인의 마음을 녹일 수 있겠습니까?”
카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알테어가 쓴 구절을 지적했다.
“나디아. 나는 네 마음이 상했다는 걸 안다.”
“……맞는 말이잖아. 그게 왜?”
“세상에. 영주님. 지금 보고서 쓰십니까?”
카인이 혀를 차며 두 손을 허리에 짚었다. 본격적으로 훈계를 하는 모양새였다.
“이건 편지라고요, 편지. 사실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담으셔야지요.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부드럽고 아름답게, 감정을 담아서 쓸 수 있잖습니까.”
“……감정.”
“예! 제 말을 이해하시겠죠?”
“뭐어…….”
알테어가 모호하게 대답하자 카인이 손가락으로 종이의 빈 곳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해하셨으면 여기에 고쳐 써보십시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마님과 화해하고 싶으시잖아요. 이대로 편지를 쓰면 절대 화해 못 하십니다.”
“…….”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참이나 종이를 노려보던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인은 그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하나씩 완성되는 글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
“나디아. 네 마음이 상했다는 걸 안다. 미안하다.”
“됐지?”
“도대체 뭐가 된 거죠? 달라진 게 없는데요?”
“미안하다고 썼잖아. 마음을 담으라며.”
“아니…… 정말로 마음만 담으시면 어떡합니까…….”
뿌듯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알테어의 시선에 카인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이 사람은 틀렸어…….’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카인이 한숨을 내쉬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뭐야. 도대체 어떤 편지를 쓰라는 거야?”
“뭐,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나의 나디아. 나로 인해 당신의 여린 마음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니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라고 쓴다든가……?”
“아직 밤은 안 왔다.”
“아니, 정말로 밤에 잠을 못 자서 하는 말이 아니잖습니까.”
“진심을 담는 편지에 거짓말은 쓸 수 없지.”
“허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카인은 이 사람을 고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두 손을 들었다.
“힘내십시오, 영주님. 진심을 담은 편지. 응원합니다. 정말로.”
“……전혀 진심이 안 느껴지는 응원이로군. 꺼져라.”
알테어가 코웃음을 흘리자 카인이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다시 홀로 남아 종이를 바라보니 빈 곳이 막막하게만 느껴져 알테어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말을 전해야 할까. 그러다 머릿속에 조금 전 카인이 했던 문장이 번뜩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던 알테어는 조심스럽게 그 문장을 종이에 새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나디아. 나로 인해 당신의 여린 마음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니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하지만 알테어는 차마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줄을 지익 그었다.
‘……역시 이건 내가 아니지.’
멋을 부리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가식적이게 멋을 부린 문장을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기만하는 것 아닌가?
‘나답게 할 말을 쓰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머릿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위험에 처했을 때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 이번에는 네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 완벽하지 대비하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날 마구 때려도 좋다는 이야기. 다만 혼자 화를 삭이지 말고 밖으로 표현해주면 좋겠다는 이야기. 알테어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마음을 종이에 새겨 넣었다. 어느새 종이는 가득 채워졌지만, 나무 밑에 앉아 전령에게나 보내는 종이에 어설픈 펜으로 대충 쓴 편지는 누가 봐도 볼품없었다.
‘……아무리 내가 멋을 못 부린다고 해도 이건 너무 투박하지.’
다행히 알테어에게도 최소한의 미감이라는 게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에일스포드 성으로 돌아가면 은은한 상아색이 도는 종이에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잉크로 편지를 쓰는 거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하면 나디아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멀지 않은 곳에서 카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영주님!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간다!”
알테어는 크게 소리쳐 대답하며 어설픈 편지를 두 번 접어 대충 외투에 구겨 넣었다. 그의 생각대로 이 어설픈 초안이 멋진 편지로 재탄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사랑하는 나의 나디아. 나로 인해 당신의 여린 마음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니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줄이 지익 그어져 있었지만 내용을 알아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이건 누군가의 조언을 받고 쓴 게 분명해.’
누가 봐도 알테어의 솜씨가 아니었다. 평소 그의 화법을 생각하면 절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알테어가 평소의 그 무뚝뚝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침대 앞으로 척척 걸어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입을 떡 벌리자 그가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이상한 사람 아니고, 의사입니다. 리티 부인은 에일스포드 남작님께 부인께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가셨고요.”
“아. 네. 의사.”
주르르 이어지는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하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루페스어였다.
“어, 왜, 그…… 여긴 칼타스령인데…….”
게다가 이 남자, 방금 ‘에일스포드 남작’이라고 하지 않았나? 얼떨떨하게 입을 뻐끔거리고 있으니 그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내 상처를 살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 열은 떨어졌군요. 상처도 덧나지 않고 잘 아무는 중이고요. 흉터는 남을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 있는 부위니까요.”
“아니…… 저…….”
“그래도 약은 한동안 드셔야 합니다. 혹시 모를 감염 위험도 있으니 상처 부위도 잘 살펴야겠죠. 물론 이건 에일스포드로 돌아가서 주치의에게 맡기시면 될 일이고.”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의사의 말에 가로막혀 입이 다시 꾹 다물리고 말았다.
‘이 사람, 내 말에 대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아니, 그 전에 나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은 것 같은 기분? 그의 태도에 묘하게 깔린 적의에 의아함이 더해지려는 찰나 또다시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의사가 가볍게 혀를 찼다.
“진료소보다 밭이 훨씬 멀리 있는데…… 아주 빠르게도 오셨군.”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삐딱한 소리를 듣나 싶어 고개를 쭉 빼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알테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사랑하는 나의 나디아’로 시작하는 편지 속 문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문구를 떠올리며 동시에 알테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건 무리였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알테어를 외면했다.
‘어, 어떡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린 탓에 매우 매섭게 그를 외면한 것처럼 보였을 거다.
‘오,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생각으로 슬쩍 눈동자를 굴려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으으. 제대로 오해한 게 틀림없어!’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