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단순한 오해가 아니야. (41/170)

42화. 단순한 오해가 아니야.2021.10.27.

16550927562102.jpg

  하지만 오해를 바로잡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으니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식은땀만 줄줄 흘리고 있는 사이 알테어가 곁으로 다가왔다. 묵직한 그의 존재감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알테어의 얼굴을 본 뒤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알테어까지 입을 다물자 묘한 침묵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16550927562107.jpg“도대체 이게…….”

가만히 나와 알테어를 바라보던 의사가 그 불편한 침묵을 깨뜨렸다.

16550927562107.jpg“부부가 맞긴 합니까?”

어색한 공기에 질린 듯 한숨을 내쉰 의사가 알테어를 슬쩍 밀어내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더니 그를 슬쩍 노려보았다.

16550927562107.jpg“나가십시오.”

16550927562119.png“뭐?”

단호한 명령에 알테어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의사는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고수했다.

16550927562107.jpg“환자는 안정이 우선입니다. 당신이 오자마자 부인이 무서워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데, 이래서야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의사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16550927562128.png“그, 그게…….”

결코 알테어가 무서워서 식은땀을 흘린 게 아니었지만, 낯선 의사 앞에서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눈빛에 소심함이 한껏 발휘되어 더욱 식은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16550927562107.jpg“나가세요. 당장.”

한껏 무거워진 의사의 목소리에 알테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16550927562119.png“……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의사는 알테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내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알테어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 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이미 알테어는 밖으로 나가 문이 굳게 닫힌 뒤였다.

16550927562128.png‘어떡하지? 단단히 오해했을 거야.’

지금이라도 따라 나가서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사이 의사가 천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16550927562107.jpg“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뭐, 저런 인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처음 마주했을 때 묘한 적대감이 느껴졌던 목소리가 어느새 경계를 풀어 살짝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부분보다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

16550927562128.png‘저런 인간?’

마치 알테어를 오래 알았던 사람이라는 양 확신에 찬 말투였다. 여전히 이 의사의 존재는 미궁이었지만, 이대로 알테어가 나쁜 사람이라는 오해를 사게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16550927562128.png‘물론 소설 속에서는 엄청난 악역이었지만, 아직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이런 평가를 받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16550927562128.png“그, 그렇지 않아요!”

나는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꽉 쥐며 용기를 내었다. 반박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건지 담담하게 상처를 살피고 있던 의사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놀란 얼굴에 이상하게 용기가 더 샘솟았다.

16550927562128.png“알테어에게 겁먹어서 이런 게 아니에요. 실망스러운 일이 있었고, 잠시 다투기도 했지만, 절대 알테어가 ‘저런 인간’이어서가 아니라고요.”

의사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껌뻑였다. 그 얼굴을 바라보니 괜히 발끈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가 싶어 민망함이 몰려왔다.

16550927562128.png“아, 아무튼 그렇다고요…….”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멍하니 눈을 껌뻑이던 의사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16550927562107.jpg“아직 그의 실체를 모르고 있군요.”

16550927562128.png“실체라니요?”

16550927562107.jpg“그가 얼마나 무자비한 인간인지 안다면 그렇게 변호하지도 않겠죠. 그는 정말로…….”

말을 이어 나가던 의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눌러두었던 감정이 치밀어 올라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 진실한 감정이 꾸며낸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16550927562128.png‘알테어가 오르카 황자를 만나 악역이 되기 전부터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가……?’

하지만 내가 본 알테어는 결코 무자비한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계획에 휘말려 나도 무서운 일을 겪었지만, 그것이 그의 온전한 의도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16550927562107.jpg“정말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아무래도 뭔가 원하는 바가 있어 본색을 숨기고 심약한 부인을 꾀어낸 모양인데…….”

그러나 의사 역시 내가 가진 확신 이상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나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났는지 의사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16550927562107.jpg“그가…… 부모를 죽인 건 알고 있습니까?”

16550927562128.png“네? 부모를 죽였다니…….”

16550927562107.jpg“선대 에일스포드 남작 부부 말입니다.”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이야기에 크게 숨을 들이켜자 의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16550927562107.jpg“역시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군요. 살인자가 부모를 잃은 가엾은 아이의 가면을 쓰고 남작가를 집어삼키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16550927562128.png“알테어가 왜…… 남작가의 정당한 후계자가 왜 부모님을 죽이겠어요.”

16550927562107.jpg“당장 남작이 되고 싶었겠지요. 무자비한 악당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의사가 혀를 차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탓에 머리가 복잡했다.

16550927562128.png“……어떻게.”

나는 하얗게 물들려는 정신을 애써 붙잡았다. 이대로 이 중요한 이야기를 흘려버릴 수는 없었다.

16550927562128.png“어떻게 그걸 알아요? 증거는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다니면 곤란해요.”

16550927562107.jpg“허무맹랑한 소리라.”

의사가 헛웃음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가 왜 내 이야기를 못 믿냐며 화를 냈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텐데.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젓는 그의 얼굴에 담긴 감정이 슬픔이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16550927562107.jpg“제가 증거입니다. 그가 미처 없애지 못한…… 살아 있는 증거.”

슬쩍 고개를 돌려 알테어가 기다리고 있을 밖을 힐끗거린 의사가 다시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했다.

16550927562107.jpg“제 아버지가 선대 남작 부부의 주치의였습니다.”

16550927562128.png“……네?”

16550927562107.jpg“대외적으로 선대 남작 부부는 불운한 화재 사고로 죽었죠. 하지만 주치의였던 아버지는 돌아가신 남작 부부의 시신을 확인했고, 사인이 화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16550927562128.png“그런…….”

16550927562107.jpg“진실을 홀로 안고 가셨다면 차라리 안전하셨을 텐데. 쓸데없이 정의감에 넘쳤던 게 문제였던 게지요. 귀족들의 음모에는 입을 다무는 것이 정답인데 말입니다.”

16550927562128.png“알테어에게 사실을 알렸는데 죽임을 당했다는…… 그런 말인가요?”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의사의 이야기가 그랬다. 경악에 찬 질문에 의사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이 확실한 긍정의 표현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16550927562107.jpg“……저만 겨우 살아서 도망친 겁니다. 죽을 뻔한 걸 이곳 사람들이 살려주셨고요.”

의사가 그렇게 말하며 살짝 소매를 걷어 올렸다.

16550927562128.png“흡!”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팔에 칼에 베인 듯한 흉터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의사는 내 반응을 예상했었다는 듯 다시 소매를 정돈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0927562107.jpg“제가 보기에 부인도 귀족들의 음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적당한 기회에 손을 털고 떠나세요. 언제 선대 남작 부부처럼 그에게 제거당할지 모릅니다.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그의 말투에 선대 남작 부부를 향한 애정이 묻어났다.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그는 정말로 대단한 배우인 셈이다.

16550927562128.png‘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는걸.’

긴 시간은 아니지만 알테어와 함께 지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시간은 충분했다는 소리다. 무서운 얼굴에다 언행까지 무뚝뚝해서 오해를 사기 쉽지만, 알테어는 결코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진짜 모습이 소설 속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의 선입견을 깨뜨려주지 않았던가?

16550927562128.png‘내가 본 알테어도 진실이고, 지금 이 의사의 말도 진실이라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어떤 오해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16550927562128.png“저어…….”

진실을 풀어내려면 단서가 필요했다. 그 단서는 의사의 기억에만 남아 있을 터.

16550927562128.png“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비장하게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16550927562107.jpg“그날의 비극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군요. 이렇게 저 사람을 만나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저 무서운 빨간 눈을…… 또다시 마주하게 되었다니…….”

의사가 흔들리는 눈으로 중얼거리며 다소 번잡한 움직임으로 내 상처에 약을 발랐다. 두려움 때문인지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거친 손길에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뭐라고 불평할 수가 없었다.

16550927562107.jpg“난 아버지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을 겁니다. 귀족들의 일은 귀족들이 처리하세요.”

어느새 처치를 마친 의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50927562107.jpg“그래도 혹시나…… 저 무서운 놈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면 사흘 후 상단이 오니까 그들에게 데려가 달라고 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의사는 내가 무서운 남작에게 속아 결혼한 불쌍한 부인이라는 생각을 굳힌 모양이었다. 마지막 조언까지 마친 의사가 자리를 떠나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16550927562128.png‘뭔가…… 이상해.’

단순히 의사의 오해를 풀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에게 알테어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저 의사가 오해했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그 속에 숨어 있을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에 벌써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16550927562128.png‘의사 선생님을 설득해서 그날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해.’

그래서 숨겨진 진실을 찾는 거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알테어는 문에 기대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신을 외면했던 나디아의 눈빛과 얼굴이 어둠 속에서 선명히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16550927562119.png‘단단히 화가 난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심약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자신을 외면하다니.

16550927562119.png‘나,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알테어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얼떨떨했다. 고작 누군가의 외면에 충격을 받다니. 친척들의 배신에도, 수많은 마수와 싸우다 크게 다쳤을 때도. 이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데. 기사들이, 특히 블란이나 카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재밌다며 배를 잡고 웃을 거다. 파벨은 한심하다는 듯 알테어를 바라보며 안경을 고쳐 쓸 테지.

16550927562119.png“하아.”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리자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리티 부인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16550927562107.jpg“어흑, 사람이, 어휴, 어쩜 그렇게, 허억, 발이 빠르대요? 어휴우, 같이 가자고 했더니, 에구구, 혼자 쌩하니, 하이고, 가버리네……!”

살짝 원망 섞인 목소리에 알테어가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매만졌다.

16550927562119.png“……그렇게 빨랐습니까.”

16550927562107.jpg“내 참! 나는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가 뛰어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리티 부인에게 나디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금 급히 발걸음을 옮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와 비교당하다니.

16550927562119.png‘카인이 이 소리를 들었으면 분명히 웃으면서…….’

1655092770806.png“푸흡!”

알테어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카인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집 앞에 크게 자란 나무 위에서였다.

16550927562107.jpg“……어라? 방금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리티 부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무를 바라보는 걸 보니 단순히 알테어의 착각은 아닌 듯했다. 소식을 전하러 와서 몸을 숨기고 있던 카인이 우스운 소리에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게 분명했다. 알테어는 카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는 모르는 척 리티 부인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16550927562119.png“글쎄요. 아무 소리도. 그런데 손에 든 건…….”

16550927562107.jpg“아이구. 내 정신 좀 봐!”

그 소리에 리티 부인이 품에 안고 있던 바구니를 알테어에게 떠넘기며 그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16550927562107.jpg“부인이 정신을 차렸으니 보양식을 먹여야지! 우리 지방에서 나는 열매인데, 이걸로 음료를 만들어 먹으면 기력 회복에 좋다우! 그러니까 남편이 껍질을 좀 까요!”

열매의 껍질을 까라니? 귀족으로 태어나고 자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명령에 알테어가 눈을 껌뻑였다.

16550927562119.png‘병사들을 도와 제방을 쌓거나, 영지의 땅을 일구는 일은 해봤지만…….’

아무리 가난한 영지의 남작이었어도, 이런 잡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얼떨떨하게 바구니를 바라보고 있는 알테어를 보며 리티 부인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16550927562107.jpg“뭘 그리 멍하니 있어요? 부인한테 보양식 안 먹일 거야? 응?”

부인. 보양식. 그 이야기에 알테어가 삐걱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16550927736787.jpg

16550927736791.pn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