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도망칠 수 없어. (42/170)

43화. 도망칠 수 없어.2021.10.31.

16550928038255.jpg‘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어.’

리온은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밖으로 나오며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갈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순진하게 눈을 껌뻑이는 알테어의 부인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16550928038255.jpg‘그 여자도 남작에게 속아 이용당하고 있는 게 분명해.’

오래전 리온은 악당의 손아귀에서 아버지를 돕지 못했다.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살았다. 애써 잊으려 했던 감정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리온은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괜히 심장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16550928038255.jpg“부인은 좀 어때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리온은 리티 부인과 마주쳤다. 부인을 걱정하는 척 달려왔던 알테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에 리온은 속으로 코웃음을 삼키며 리티 부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16550928038255.jpg“다행히 상태는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16550928038255.jpg“그런데 왜요? 다른 문제가 있어요?”

놀라서 묻는 리티 부인을 향해 리온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16550928038255.jpg“아닙니다. 상단은 사흘 후에 온다고 했었지요?”

16550928038255.jpg“예. 이런 시골은 상단이 지나갈 때가 아니면 좀처럼 물건 구하기가 힘드니 그게 문제라니까요. 선생님은 약품을 주문해두셨던가요?”

16550928038255.jpg“예.”

16550928038255.jpg“어휴, 뭘 그렇게 연구까지 하고 그러신대요. 그냥 있는 약만 써도 충분한데.”

16550928038255.jpg“기존의 약들은 너무 비싸서 평범한 사람들이 사기 힘들잖습니까. 귀족들이야 문제없지만…….”

리온이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헤집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의 주치의였고, 덕분에 리온 역시 귀족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귀족들에게는 필요할 때 약을 사서 쓰는 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평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약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간단한 감기도 끙끙 앓기만 하다가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 마을에서도 그런 식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리온은 감기약 연구를 시작했다. 가장 흔한 병을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저렴한 약을 만들 수 있다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연구는 쉽지 않았다. 약품을 구하는 것도 힘들었고, 연구비도 시골 진료소 의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16550928038255.jpg‘이번에 상단이 가져오는 약품이 거의 마지막이겠지.’

모아 둔 돈을 탈탈 털어 간절한 심정으로 마지막 시도를 해볼 참이었다. 그런 사정을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터라, 리티 부인은 어두워지는 리온을 바라보며 괜히 밝게 목소리를 높였다.

16550928038255.jpg“참. 부인에게 줄 포멜라 주스를 만들고 있어요. 기력 회복에 좋을 것 같아서요.”

16550928038255.jpg“아. 그렇죠. 그건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손질하려면 손이 많이 갈 텐데요.”

16550928038255.jpg“그건 걱정 없어요. 부인의 남편이 손질하고 있거든요!”

16550928038255.jpg“부인의 남편이라면…….”

리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리티 부인이 킥킥대며 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16550928038255.jpg“예. 그 무섭게 생긴 양반이요. 좀 어설프기는 한데 영 틀리진 않았다우.”

고개를 돌리자 정말로 나무 아래에 앉은 알테어가 커다란 바구니에 담긴 열매껍질을 진지한 얼굴로 벗겨내고 있었다.

16550928038255.jpg“……순순히 하던가요?”

16550928038255.jpg“부인의 기력 회복에 좋다니까 군말 없이 하던걸요.”

무서운 기세로 껍질을 벗겨내고 있는 알테어의 모습에 리온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도무지 힘 조절이 안 되는 모양인지 껍질을 벗기다 열매가 터지는 바람에 과즙으로 옷이며 얼굴이 엉망이었다.

16550928038255.jpg“표현은 별로 없지만, 부인을 많이 아끼는 것 같아요.”

흐뭇한 리티 부인의 목소리에 리온이 믿을 수 없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16550928038255.jpg“……아낀다고요?”

16550928038255.jpg“그럼요.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겠는데요.”

16550928038255.jpg“둘이 마주쳤을 때 부인의 반응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깨어나서 남편 얼굴을 보자마자 식은땀을 흘리던데요.”

16550928038255.jpg“네? 그럴 리가요. 남편이 쓴 편지를 볼 때 부인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사이 좋은 부부가 분명한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티 부인이 곧 오해의 이유를 알겠다는 듯 가볍게 리온의 등을 두드렸다.

16550928038255.jpg“어휴! 선생님은 연애를 안 해봐서 모르는 거예요! 그러게 참한 아가씨랑 연애도 하고 그러라니까!”

16550928038255.jpg“……이야기가 왜 갑자기 그렇게 흐릅니까.”

이야기가 자신에게 불리한 흐름으로 흐를 조짐이 보이자 리온이 슬그머니 발을 뺐다.

16550928038255.jpg“혹시 모르니까 하루에 두 번, 부인의 상태를 살피러 오겠습니다. 문제없도록 잘 지켜봐 주세요.”

16550928038255.jpg“걱정 없다니까요.”

리티 부인은 리온의 걱정이 부질없다며 귀찮은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녀의 재촉에 걸음을 옮기면서도 리온은 나무 아래에 앉아 열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알테어의 얼굴을 힐끗댔다.

16550928038255.jpg‘의심을 거두면 안 돼.’

돌아가신 아버지는 선대 남작 부부와 그 아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나는 똑같이 당하지 않으리라. 리온은 마음을 굳게 먹으며 쿵쿵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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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는 하루에 두 번 나를 찾아와 상태를 살폈다. 그때마다 그에게 알테어의 좋은 점을 은근슬쩍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이렇게 알테어의 좋은 점을 알고 나면 오해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시작한 일인데, 의사의 반응은 늘 시큰둥했다.

16550928094985.png‘생각처럼 잘되진 않는구나.’

뭐든 내 생각처럼 됐다면 피하려던 소설 속 악당과 결혼할 일도 없었겠지. 나는 리티 부인이 준비해 준 주스를 홀짝거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힐끗대며 그 모습을 본 의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16550928038255.jpg“그건 맛있습니까?”

16550928094985.png“아.”

포멜라 주스!

16550928094985.png“드셔 보실래요? 새콤달콤해서 아주 맛이 좋아요.”

날 진료하느라 고생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혼자 맛있는 걸 먹었나 싶어 재빨리 컵을 내밀어 주스를 권하자, 그가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 이상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16550928038255.jpg“전 여기에 오래 살았습니다. 포멜라 주스는 많이 마셔봤어요.”

16550928094985.png“그, 그렇겠네요…….”

민망함에 손을 거두며 다시 주스를 홀짝이기 시작하니 그가 한숨을 내쉬며 진료 도구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16550928038255.jpg“그런 사소한 거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 자식은 진짜 무서운 놈이라니까요.”

16550928094985.png“네?”

16550928038255.jpg“그 주스 말입니다. 괜히 부인을 위하는 척, 열매 손질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속셈이라고요. 그런 식으로 마음을 사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겠죠.”

16550928094985.png“그게 무슨 말이에요?”

열매 손질하는 모습을 보여줘? 누가?

16550928094985.png“이건 리티 부인이 만들어주신 거예요.”

16550928038255.jpg“열매는 남작이 손질했죠.”

16550928094985.png“네에?!”

전혀 몰랐던 사실에 놀라서 펄쩍 뛰자 의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16550928038255.jpg“설마, 몰랐습니까?”

16550928094985.png“전혀 말해주지 않았어요. 리티 부인도 그렇고, 또 알테어도…….”

그날 매섭게 알테어를 외면한 이후 좀처럼 그와 마주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직 기력이 없어 침대를 벗어나는 게 힘들었고, 알테어도 어쩐 일인지 얼굴을 전혀 비추지 않았다. 리티 부인에게 조심스레 그의 행방을 물었더니. 요즘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느라 바쁜데, 알테어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거기에 내가 마실 주스에 들어갈 열매를 손질한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16550928038255.jpg“오늘도 나무 아래에 앉아서 열매를 손질하고 있던데요. 난 일부러 부인이 잘 볼 수 있는 곳에서 시위라도 하는 줄 알았죠. 아니면 도망칠까 봐 감시하거나. 그런데…….”

의사가 말끝을 흐리며 굳게 닫혀 커튼까지 쳐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찬바람이 들면 몸에 좋지 않을 거라면서 리티 부인이 창문을 굳게 닫아둔 탓에 침대에서는 밖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태였다.

16550928094985.png‘설마 알테어가 저기에서?’

16550928038255.jpg“잠깐, 갑자기 그렇게 일어나면!”

나는 의사의 만류에도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그의 말처럼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알테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앞에는 열매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건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은 상태였다.

16550928094985.png‘정말로 알테어가…….’

나는 매일 리티 부인이 묘하게 웃으며 건넸던 주스를 떠올렸다. 정성이 들어가서 더 맛있는 주스라고 했던가. 이제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재촉해 집 밖으로 나섰다. 한달음에 나무 아래로 가 알테어 앞에 섰지만, 정말로 피곤했는지 그는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16550928094985.png‘조금 뛰었다고 숨이 차네.’

확실히 몸 상태가 좋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혀 알테어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주해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늘 갖춰진 옷을 입은 알테어만 보다가, 시골 농부들이나 입는 편한 옷을 입은 알테어를 본 것도 새로웠다.

16550928094985.png‘머리도 조금 부스스한 것 같아.’

요즘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돕고 있다고 했으니 제대로 머리를 정돈할 시간도 없었을 거다. 아마 파벨이 이 모습을 봤다면 영주님의 체면이 무너진다며 한탄을 했을 것이다.

16550928094985.png‘게다가 이게 뭐야.’

하얀 셔츠에 붉은 포멜라 과즙이 튀어 엉망이었다. 뺨에도 과즙이 묻은 채였다.

16550928094985.png‘……어린애 같아.’

편안하게 잠든 알테어의 몸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잠든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16550928094985.png‘뺨에 묻은 과즙은 닦아줘야겠다.’

나는 알테어가 편안한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에 묻은 과즙을 닦아주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려 노력했는데도 예민한 알테어의 감각에는 크게 느껴졌던 것인지, 손이 닿는 순간 그가 움찔하더니 강하게 내 손목을 낚아채며 눈을 번쩍 떴다.

16550928094985.png“읏!”

붙잡힌 곳이 아파 작게 신음을 흘리자마자 손목을 압박하고 있던 힘이 확 풀렸다. 손목을 매만지며 조금 원망스럽게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어울리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16550928094985.png“아프잖아요.”

입술을 비죽이며 항의하니 굳게 닫혀 있던 알테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나는 멍하니 날 바라보는 알테어의 머리를 정돈해주며, 그가 걱정스러워 미간을 찌푸렸다.

16550928094985.png“내가 가까이 온 것도 모를 정도로 피곤했나 봐요.”

알테어라면 잠결에라도 사람의 기척을 느꼈을 사람인데.

16550928094985.png“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요즘 마을 사람들 일을 도와준다면서요.”

16550928184189.png“그런 거 아냐. 고작 그걸로 피곤하면 기사의 이름이 아깝지. 이건 그냥…….”

16550928094985.png“그냥?”

16550928184189.png“네 기척은 너무 편안해서…… 전혀 경계하지 않으니까…….”

어울리지 않게 횡설수설하던 알테어가 곧 무엇인가 깨달은 듯 다시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아프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는지, 이번에는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16550928184189.png“이거 꿈이야? 나 아직 잠에서 안 깬 건가?”

16550928094985.png“꿈인 거 같아요?”

16550928184189.png“이건 너무 내가 바라던 대로니까…… 현실감이 없는데.”

16550928094985.png“……내가 머리 만져줬으면 했어요?”

알테어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16550928184189.png“네 화가 풀렸으면 좋겠다고, 예전처럼 날 똑바로 봐줬으면 했다.”

16550928094985.png“아.”

그러고 보니 나 화내는 중이었나? 아니지. 화내기로 한 날은 다 지났는데. 얼마 전에 매몰차게 외면한 사람이 갑자기 이러는 건 역시 이상한가? 머릿속이 복잡해져 알테어에게 붙잡힌 손목을 슬그머니 빼내려는데, 그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내 행동을 저지했다.

16550928184189.png“안 돼. 꿈이든, 꿈이 아니든 넌 못 가.”

16550928094985.png‘어딜 가려던 건 아닌데.’

내가 이대로 돌아갈 줄 알았나? 알테어의 오해를 정정해주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 그가 붙잡은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몸이 그대로 끌려가 알테어의 품에 꼭 안겼다. 묘한 안정감과 익숙한 체향에 심장이 쿵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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