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유혈사태?2021.11.03.
딱히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때로는 서로가 나누는 체온이 말보다 더 확실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잠시 따스함을 만끽한 뒤 알테어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 거리를 벌렸다. 고개를 드니 알테어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닦아주려던 포멜라 과즙은 여전히 뺨에 남은 채였다. 나는 픽 웃음을 흘리고 손을 뻗어 포멜라 과즙을 꼼꼼하게 닦아주며 물었다.
“며칠 동안…… 내가 아직도 화났을까 봐 안 보러 온 거였어요?”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말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묻어난 것이 느껴졌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날 만나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투정 부리는 셈이 되어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자 알테어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보러 갔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알테어가 건드린 이마를 매만지며 다시 고개를 들자, 그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조금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네가 자고 있을 때. 그때 상태를 보러 갔었어. 불편한 사람 얼굴을 보면 회복하는 데 도움이 안 될 거니까.”
“아, 안 불편했어요!”
“하지만…….”
서둘러 반박하니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매몰차게 외면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 그건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불편한 게 맞긴 했는데, 그런 이유로 불편했던 게 아니라……!”
내가 횡설수설하며 변명하자 알테어의 얼굴에 서린 의아함이 더욱 짙어졌다. 나는 알테어에게 사실을 말해도 좋을지 몰라 입안에서 말을 우물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봤거든요. 알테어가 쓴 편지요.”
“편지?”
“네. 그, 외투 주머니에 있던 거요.”
“아.”
정확하게 편지의 정체를 짚어주자 굳게 닫혀 있던 알테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게 왜 네 손에…….”
“리티 부인이 외투를 빨아주셨잖아요. 그때 주머니에 들었던 걸 발견하시고는, 제게 쓴 것 같다고 전해주셨어요.”
내 말에 알테어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렸다.
“다행히 리티 부인은 까막눈이라 글을 모르신대요! 우리가 루페스 사람인 건 모르셨을 거예요!”
혹시나 리티 부인이 루페스어로 쓰인 편지를 보았을까 봐 걱정하는 듯해서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지만, 알테어의 얼굴이 여전히 하얗게 질린 걸 보면 그의 신경을 자극한 것이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도대체 왜?’
눈을 껌뻑이며 알테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좀 더 멋지게 완성해서 줄 생각이었어.”
“편지요? 그걸 어떻게 더 멋지게 완성할 수가 있어요?”
“좋은 종이에, 색이 예쁜 잉크를 써서, 봉투도 금장이 들어간 거로 하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던 알테어가 어느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눈을 번뜩였다.
“그러니까 돌려줘. 제대로 완성해서 줄 테니까.”
“시, 싫어요! 난 그게 좋아요.”
“멋도 없고, 투박하기만 한데 그게 뭐가 좋아? 나도 멋있게 할 수 있다고.”
‘그 투박한 점이 알테어다워서 좋은 건데…….’
하지만 그런 이유를 입에 올리기도 전에 알테어가 당장 편지를 찾겠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에 뒀어?”
“아, 알려줄 것 같아요?”
“흐음.”
위기감을 느낀 내가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붕붕 젓자 알테어가 묘한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꼭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느껴져서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저, 절대 안 줘요!”
눈을 부릅떠서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자 오히려 알테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몸에 지니고 있는 모양이군.”
“그……!”
정확한 추리에 말문이 막혔다. 이 자리에 있으면 내가 불리하다! 빠른 깨달음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군이 기다리고 있을 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군을 찾기 위해 뛰어갈 필요도 없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건지 다소 멍한 얼굴의 의사가 나와 알테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체온이 떨어지면 또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채 잠시 굳어 있던 의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 어깨에 얇은 담요를 걸쳐 주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체온이 다소 떨어져 있었는지 담요의 포근함에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슬쩍 눈치를 살피니 알테어와 의사가 묘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의외의 곳에서 구세주가 등장했다.
“어라, 선생님? 왜 거기에 계십니까?”
마을 골목에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외지인임이 분명한 옷차림의 남자가 의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모양새며, 그의 뒤를 따르는 마차의 문양까지 확인하니 그의 정체를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단 사람인가?’
정확히 어떤 상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차에 금화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대체로 거대한 상단이 상징으로 많이 쓰는 문양이었다. 남자는 마차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웃는 낯으로 의사에게 다가왔다.
“주문하신 약품을 가지고 진료소로 가던 길이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잘못하면 엇갈릴 뻔했습니다.”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게 상인의 일이지요. 혹시 더 필요한 약품이 있으면 저희가 떠나기 전까지만 말해주세요. 다음에 올 때 또 구해오겠습니다.”
호쾌하게 웃는 상인의 말에 의사가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은 새 주문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뭔가 연구 중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계속 약품을 찾으셨잖습니까.”
“예. 감기약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요.”
“아이고…….”
의사의 말에 상인이 안타깝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의사의 진척 없는 연구를 안타까워하는 것인지, 좋은 손님을 잃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감기약이라. 그런 것도 연구할 수 있구나.’
내가 ‘이쪽’에서 다시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는 감기약이 흔했다. 약국에만 가면 간단하게 저렴한 감기약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쪽은 의학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서 감기 같은 가벼운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다. 의사를 만나기 힘든 평민들이 특히 그랬다.
‘그래서 소설에서도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지.’
제국을 비롯한 대륙 전역에 심각한 독감이 퍼져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나 지방을 전전하던 오르카 황자가 해결책을 가지고 나타나 순식간에 주목을 받는 에피소드였다. 그가 지방에서 요양하다 만났다는 의사가 독감을 다스릴 수 있는 약을 개발해 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오르카 황자는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급격히 치솟았다. 이후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에피소드까지 겹치며 완전히 평민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그래 봤자 3황자’라며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 오르카 황자가 데려온 의사도 성자로 칭송을 받으면서 꽤 인기를 끌었지.’
선한 인상에 외모까지 훌륭해서 그 의사를 정말 신이 보내준 성자라고 믿는 사람도 꽤 많았다. 그렇게 익숙한 기억을 더듬다 보니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감기약. 성자로 칭송받았던 선한 인상의 의사. 지방에 숨어 있던 인재. 몇 가지 키워드가 묘하게 눈앞의 사람과 겹쳐진 것이다.
‘어…… 어어……?!’
그리고 그것이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온!”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뜩이는 것처럼 그 성자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갑작스러운 외침에 씁쓸한 표정으로 상인을 떠나보내던 의사는 물론이고 나를 뒤따라오던 알테어까지 무슨 일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제 이름은 왜……?”
“이름이, 정말로, 리온?”
“처음에 분명 소개했던 것 같은데요.”
“의, 의사라고만 했어요! 수상한 사람 아니라고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아니, 만약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리온’과 이 ‘리온’이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반박에 미래에 성자로 칭송받을 위대한 의사 리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지금 인사드리죠. 리온입니다. 의사고, 이 마을에서 진료소를 합니다. 문제 있습니까?”
“무, 문제는 없죠…….”
없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얼떨떨해져 입을 떡 벌리자 점점 더 리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왜 그렇게 보시죠?”
“네?”
“신기한 동물 보듯 보고 계시잖습니까.”
“아…….”
소설 속에서 조그맣게 스쳐 갔던 인물이 이렇게 생생하게 움직이는 걸 마주하는 건 언제나 놀라웠다. 알테어를 만났을 때도 그랬고, 그보다 전에 소설의 주요 인물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래의 악역 오르카 황자가 영향력을 키우는 데 큰 힘을 보탠 인물을 꼽으라면 1번은 당연히 알테어가 될 것이고, 이 의사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힐 정도다.
‘그러니까 나쁜 놈이 주워가기 전에…….’
우리가 줍는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마자 나는 리온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깜짝 놀란 리온이 억지로 손을 빼내려 하자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떠돌다 겨우 형태를 만들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제 의사가 되어주세요!”
“……예?”
몹시도 형편없이 결론부터 튀어 나간 말에 리온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민망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감기약을 만드신다면서요. 계속 연구할 수 있게 돕고 싶어요! 그러니까, 에일스포드에서요!”
이어지는 말에 황당함으로만 가득했던 리온의 얼굴이 달라졌다. 그는 순식간에 진지해진 얼굴로 나와 알테어를 살피며 제안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이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리온은 알테어가 부모님을 죽였다는 무서운 오해를 하고 있고, 그 오해 속에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진실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에일스포드로 데려갈 수 있다면, 미래에 닥쳐올 비극을 미리 대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알테어의 과거에 꽁꽁 숨은 진실까지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알테어도 어서 거들어요!’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 않던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내 의도를 알아챈 것인지 알테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리온이 경계하며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아 리온에게서 살짝 떼어내며 태연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나디아의 제안을 순순히 따른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 그건 협박이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리온은 알테어를 오해하고 있는데! 나는 당황해서 알테어의 가슴팍을 마구 두드렸다. 하지만 알테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대신 협박해달라고 눈빛을 보냈잖아?”
“그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해석이…… 전혀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부부는 일심동체’가 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먼 모양이다. 그렇게 알테어와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풉’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리온의 웃음소리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껌뻑이자 리온이 숨을 크게 들이켜며 알테어와 나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우선 이야기는 들어보겠습니다. 저쪽은 몰라도, 이쪽 부인의 이야기는…… 꽤 신뢰가 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