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에일스포드가 달라졌어요!2021.11.07.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마주 앉으니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졌다. 리티 부인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인지 매우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리온의 진지한 이야기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러면서도 ‘싸우면 안 돼요!’라고 신신당부했던 걸 보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알테어와 리온의 신경전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자.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볼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알테어였다. 그는 내가 전혀 합의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 리온을 영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의아한 듯했다. 무슨 일이든 항상 알테어와 이야기하고 그의 동의를 받은 후 진행해왔으니 그로서도 이런 상황이 놀라웠을 거다. 리온 역시 내가 왜 그런 제안을 한 건지 궁금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 남자의 뜨거운 눈빛을 한몸에 받고 있자니 소심함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취, 취조받는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범죄자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려는 거니까 이렇게 쪼그라들 필요가 전혀 없었다! 용기를 내어 눈을 부릅떠보았지만, 그런 것으로 극복이 될 소심함이라면 애초에 소심한 사람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이며, 그 소설을 읽은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고, 몇 년 뒤 심각한 독감이 퍼져 대륙 전역이 뒤집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어 줄 사람은 없을 테니 정신 나간 여자 취급받기 딱 좋다.
‘그러니까 최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로 설득하자.’
“……투자하고 싶어요.”
“투자요?”
생각지도 못한 흐름이었는지 리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 에일스포드의 이름으로 당신의 연구에 투자하겠어요.”
귀족들이 학자들의 연구에 투자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돈을 충분히 번 귀족들이 명예를 살 목적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투자하고는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예술가들의 활동을 후원하는 예도 있었다.
“최근 에일스포드가 많은 부를 쌓게 되었거든요. 마석 광산과 좋은 과수원을 얻었죠.”
“아마 이 대륙에서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가난뱅이라고 손가락질당했던 영지가 하루아침에 부유함을 거머쥐었으니 이보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어디 있겠나?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곳곳에서 ‘혹시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라며 화제가 되었을 거다.
“마냥 부를 축적하기만 한다면 졸부라는 인상을 줄 뿐이죠. 벌어들인 만큼 지혜롭게 쓰는 것도 필요해요. 그래서 좋은 일에 투자하려는 거지요.”
제국의 시작부터 뿌리내린 명문가가 아니라면 이런 이미지 메이킹은 필수적이다. 자신의 부유함을 믿고 사교계에서 콧대를 높였던 자들은 모두 외면당했다. 알테어의 욕심이 사교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까지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힘을 갖게 된다는 건 좋은 일 아니겠나.
‘선택권을 준다는 건 좋은 일이지.’
동의를 구하듯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민에 빠진 것 같기도 했고, 조금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를 이용하시겠다는 거군요?”
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설마 내가 그런 이유로 ‘제 의사가 되어주세요!’라는 말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용이라기보다는 서로 돕는다고 생각해주세요. 선생님도 원하시는 바가 분명히 있잖아요?”
객관적인 기준에서 지금의 리온은 무명의 의사에 불과했다. 소설을 읽은 나야 그가 미래에 대단한 의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런 정보가 없는 이들에게는 한낱 시골 의사일 뿐이다.
‘게다가 평민들을 위한 감기약이라니?’
그런 건 귀족들이 원하는 연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감기 같은 사소한 병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불치병을 연구하는 등의 멋들어진 연구를 원했다. 몇 년 뒤, 그 사소한 병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걸 전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물론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도 이유 중 하나예요. 덕분에 능력 있는 분이라는 걸 알았으니 손해 보지 않을 장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지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솔직하고 좋지 않나요?”
순진하고 달콤한 이유로 리온을 꼬드길 수는 있을 거다. 그쪽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더 좋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런 건 치사하니까.’
이용할 생각이 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내가 리온의 입장이라면 분명 그럴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연구 지원은 확실하게 할게요. 아시다시피 이제 에일스포드는 돈이 넘쳐나거든요. 아, 물론 이건 영주님의 허락이 떨어져야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알테어를 슬쩍 바라보니 그가 허락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확실한 지원을 약속하지.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겠어. 단, 연구결과는 우리가 가장 먼저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해. 연구를 통해 만들어지는 약은 우리가 제조해서 판매하게 될 거야. 물론 판매금에 대한 이득은 그쪽과 나누게 될 거고.”
알테어의 입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술술 흘러나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세워왔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언제 그런 계산을 다 한 거지?’
미리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내가 리온에게 연구 제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빠르게 그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 아닌가?
‘확실히 머리가 비상하기는 한 것 같아.’
그러니 악당 오르카 황자의 눈에 들어 심복이 된 거겠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이 제대로 능력을 펼칠 수도 없을 정도로 영지가 가난했던 게 문제구나.’
이제 부유함이라는 날개를 달았으니, 알테어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갈 테지.
‘그렇게 높이 올라가면…….’
그 이후의 일을 상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저릿해졌다. 대단한 능력을 지닌 소설의 주역 알테어와 달리 나는 소심하고 평범한 소시민 단역이 아닌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그에게 발맞춰 걷는 건 어려울 터였다.
‘그, 그래도 나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야.’
나는 우울해지려는 소심한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당장은 알테어가 그토록 원하는 후계자를 갖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알테어가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거니까. 응.’
그런 식으로 하나씩 역할을 찾아간다면 내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리온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당신과 만나자마자 그런 제안을 들었다면 절대 수락하지 않았겠지만.”
리온의 시선이 알테어를 지나 내게 꽂혔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니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당신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먹는다는 게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인데…….”
“필요하다면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거지. 내가 진짜 적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판단하게 될 일이고.”
리온이 자신에게 보이는 적개심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을 알테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한 태도에는 알테어의 자신감이 묻어나 있었다. 나는 거리낄 것이 전혀 없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건 오해일 거다. 당당한 모습에 혼란스러운 듯 리온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나디아도 회복되었으니 슬슬 에일스포드로 떠나도 괜찮겠지. 장거리 이동도 무리가 없을 거 같고. 내킨다면 함께 떠나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곳 분들에게 여러모로 신세를 지기도 했고, 진료소를 대신 맡아줄 의사도 구해주고 싶습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뒷정리를 잘하는 녀석이 있으니까.”
알테어가 창밖을 슬쩍 바라보며 말하자 어째서인지 나무가 흔들거리며 나뭇잎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신기해서 눈을 껌뻑였지만 알테어는 그런 신기한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리온을 바라보았다.
“이틀만 기다려. 대신 진료소를 맡을 의사를 찾아오지.”
알테어의 호언장담에 다시 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 알테어의 장담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이틀 만에 진료소를 맡을 새 의사를 구해왔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는 걸 도와줄 일손도 한가득 데려와서 조용한 마을이 크게 떠들썩해졌다.
“저와 제 아내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품삯은 제가 모두 지급했으니 밭을 모두 일구실 때까지 편히 부리시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극구 사양했지만, 알테어의 뚝심도 만만찮아서, 결국 그가 불러온 장정들이 농사를 돕게 되었다. 장정들의 작업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그들을 구경하러 나온 마을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리온도 마을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마쳤다. 자신의 연구를 위해 오래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려니 많이 아쉬운 모양인지, 리온은 길을 떠나면서도 계속 마을이 있던 자리를 힐끗댔다.
‘정든 곳을 떠나는 기분은 어떤 걸까?’
나는 바인 후작가를 떠나면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언젠가는 다시 그곳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그곳에 남겨둔 아쉬움도 없었다. 그래서 아쉬워할 만한 자리가 있는 리온의 처지가 조금 부러워졌다.
‘나도 내 자리가 있다면 좋을 텐데.’
그곳이 에일스포드가 된다면 더욱 좋을 테고. 나는 긴 여정 끝에 점점 가까워지는 에일스포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
‘이, 이게 뭐야?’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분명히 에일스포드 성이 확실한데, 떠나기 전과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낡은 흔적이 역력했던 성벽에는 에일스포드 가문을 상징하는 휘장이 길게 걸려 있었고, 군데군데 깨져있던 유리창도 모두 새것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떠나기 전에 성벽을 장식할 휘장과 유리를 주문해두긴 했었지.’
회합이 끝난 뒤 돌아와 직접 손볼 생각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사고로 귀환이 늦어지는 바람에 보수가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낡은 흔적을 가린 에일스포드 성은 누가 보아도 웅장하고 거대해서 ‘이것이 귀족의 성이다!’라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주인인 내가 그런 기분을 느낄 정도이니 방문자인 리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에일스포드 성의 모습에 놀란 건지 살짝 입을 벌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런 기분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듯했지만,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님!”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성을 둘러보고 있으니 안에서 마리가 다급한 걸음으로 튀어나왔다. 주인 앞에서 뜀박질을 하는 시녀라니! 평소의 마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제 괜찮으세요? 요양이 생각보다 길어지셔서 걱정했어요.”
마리는 옆에 선 알테어가 보이지도 않는지 내 몸을 마구 더듬으며 상태를 살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파벨이 진정하라는 듯 몇 번이나 헛기침했지만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결국 내가 그녀를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마리. 나 멀쩡해!”
말로만 해서는 신뢰를 주기 어려울 것 같아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하지만 멀쩡하리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순간 머리가 어질하며 몸이 비틀거렸다. 긴가민가하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가 경악해서 눈을 크게 떴다.
‘어어……!’
비틀거리며 몸이 기우뚱 넘어가려는데 단단한 힘이 양쪽에서 나를 지탱해주었다.
‘어어…….’
오른쪽은 알테어, 왼쪽은 리온. 동시에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은 두 사람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양팔이 붙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썩 우습게 보일 것 같아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고, 고맙지만 혼자 설 수 있어요.”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하자 양쪽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닐걸요.”
알테어와 리온이 동시에 나를 타박했다.
“아, 아닌데…… 잠깐 어지러웠을 뿐인데…….”
“평범한 사람은 잠깐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아. 몸이 약해진 거다.”
“평범한 사람의 기준을 알테어로 잡으면 안 돼요!”
“블란이나 카인도 그런 적 없어.”
“아니, 그분들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소심한 항변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알테어가 반대편에서 날 붙잡은 리온의 손을 툭 떼어내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앗!’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혀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알테어는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 건지 태연한 얼굴이었다.
“혼자서 걷는 건 힘들겠군. 내가 침실까지 데려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