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갑자기?2021.11.10.
알테어가 마음먹었다면 반항은 어림도 없다. 나는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알테어의 품에 안긴 채 편안하게 침실까지 이동했다.
‘마차를 탔다고 생각하지, 뭐.’
그런 식으로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해봤지만, 걸을 때마다 얼굴에 날아드는 사용인들의 시선 탓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이제는 사용인들도 많이 늘어났는데…….’
예전과 달리 보는 눈도 많은데 이렇게 민망한 상황을 연출해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알테어는 정말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하긴. 이 무심한 남자가 평생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이 있기는 할까.
‘항상 나만 민망하지.’
에일스포드 성의 보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활용하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예전 같은 적은 인원으로 성을 유지하는 건 어려워졌다. 그래서 집사인 파벨과 머리를 맞대고 필요한 인원을 고용해 지금은 꽤 그럴듯하게 성을 관리하고 있었다.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들은 당연했고, 손님을 맞을 풋맨과 주방을 보조할 인력들, 수풀이 우거진 채 방치되어 있던 정원을 관리할 정원사들도 모두 고용했다. 수도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명문가, 바인 후작가에서의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절대 뒤처지지 않을 정도의 인력이었다.
‘다행히 회합을 떠나기 전에 겨우 제대로 모습을 갖출 수 있었어.’
이제는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민망하지 않게 상대를 대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많은 시선을 뚫고 침실에 도착하니 나만의, 아니, 우리만의 공간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걸 무슨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알테어가 나를 침대에 눕혀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픈 거야? 의사를 불러올까?”
“아뇨! 괜찮아요!”
묻는 것과 동시에 리온을 부르러 갈 기세라, 나는 재빨리 알테어의 옷자락을 붙잡아 그를 저지했다. 그리 큰 힘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알테어는 순순히 걸음을 멈췄다. 알테어 특유의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게 걱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처음에는 그의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었는데. 이런 여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니. 엄청난 발전 아닌가? 그런 내 모습이 어쩐지 우습게 느껴져 웃음을 흘리자 알테어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뭐가 우스워?”
“제가 우스워요. 이젠 알테어와 당당히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됐잖아요.”
“아. 확실히 그건 그렇지.”
알테어도 동의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아내의 얼굴보다 정수리를 더 많이 봤었지.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니까.”
“저, 정수리!”
나는 화들짝 놀라서 두 손으로 정수리를 덮었다. 그때는 알테어가 무서워서 시선을 피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시야에 어떤 모습이 담길 것인지는 생각도 못 했다.
“머, 머리숱은 많아요…….”
“내가 머리숱이 없다고 했어?”
“그건 아니지만…… 신경 쓰여요. 정수리가 휑하면 보기 안 좋잖아요.”
마리나 안나가 머리를 빗겨줄 때마다 바닥에 엄청나게 많은 머리카락이 떨어지곤 해서, 이러다 머리카락이 다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머리카락이 잘 빠진다고들 하던데. 그러니 나같이 소심해서 스트레스에 취약한 인간들은 탈모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어쩐지 비장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더듬거리며 거울을 바라보자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휑하지 않아. 아주 풍성하다고. 네 머리인데, 그걸 몰라?”
“정수리는 스스로 볼 수 없잖아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거울에 비춰 정수리를 살피려고 했지만 머리카락이 계속 시야를 가려 쉽지 않았다. 낑낑대며 노력하는 날 보고 알테어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걱정할 거 없어. 아주 풍성하니까.”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알테어라면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알테어도 풍성해요. 아마 할아버지가 되어도 풍성할 거 같아요.”
“할아버지? 벌써 그때를 걱정하는 거야?”
“중요한 문제라고요. 뭐, 대머리가 된 알테어라니, 상상은 안 되지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애써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알테어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의 얼굴이 너무 잘난 탓인지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모습도 의외로 멋질 것 같았다.
‘음. 그럼 알테어는 머리카락이 없어도 큰 문제는 안 되겠다…….’
역시 모든 것의 완성은 얼굴인가?! 나는 무엇이든 괜찮아 보이게 만드는 놀라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알테어가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졌다.
“왜 그렇게 봐.”
“새삼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칭찬을 들은 사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빈말로 아부할 필요는 없어.”
그는 내가 아부하기 위해 달콤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빈말 아니에요. 내가 알테어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고요.”
“그야…….”
알테어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에게 아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역할을 잘 해내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진심이라는 걸 온몸으로 내뿜으며 계속 얼굴을 바라보자 알테어가 참지 못하고 휙 고개를 돌렸다.
“그만 봐. 민망하니까.”
“민망해요? 알테어도 그런 기분을 느껴요?”
이번에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민망함이라니. 알테어는 워낙 무심해서 그런 걸 전혀 못 느끼는 줄 알았다.
‘조금 전에 날 안고 복도를 가로지를 때도 아주 뻔뻔했고.’
어떻게 하면 저런 뻔뻔함을 배울 수 있을까 존경스럽기까지 했었는데. 고작 얼굴이 잘생겼다는 말에 민망함을 느끼다니. 어쩐지 우스워 웃음을 터트리자 알테어가 귀가 살짝 붉어진 채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제를 바꾸기 위해 뭐라도 찾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럴 만한 화제가 있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편지가 많이 왔군.”
알테어가 협탁 위의 은쟁반에 쌓여 있던 편지들을 내게 가져왔다. 알테어에게 온 편지는 모두 그의 집무실로 전해지니, 이곳에 있는 편지의 수신인은 모두 나였다.
‘어느새 이렇게 편지를 많이 받게 되었구나.’
처음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되었을 때는 그 흔한 축하 편지도 없었다. 티 파티나 무도회 초대장도 당연히 날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에일스포드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긴 한 것인지, 언제부턴가 이렇게 수많은 편지와 초대장이 내게 날아들었다.
‘알테어 쪽으로 보내면 무조건 거절당한다는 걸 아는 거야.’
차갑고 무서운 남작보다는 이제 갓 시집온 남작 부인 쪽을 공략하는 게 더 쉽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게다가 사교는 확실히 안주인의 몫이니까.’
무작정 거절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걸러내어 얼굴을 비추긴 해야 한다.
‘알테어는 딱히 그런 말이 없었지만…….’
나는 쌓여 있는 봉투를 만지작대며 알테어를 힐끗댔다. 말을 아끼고 있지만, 그 역시 내가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길 바라고 있을 거다. 보통 귀족 사내들이 아내에게 바라는 역할은 그런 거니까.
‘도, 동부 귀족 회합도 어떻게든 이겨 냈잖아. 난 할 수 있다고.’
단지 이겨 냈을 뿐, ‘잘’ 이겨 냈다고 말하긴 힘들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봉투를 넘기다가 익숙한 문장을 발견하고 손이 멈췄다. 그걸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알테어가 봉투를 가져가더니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바인 후작가에서 온 편지군.”
“……네.”
한때는 내 이름이었던 ‘바인’ 후작가의 문장.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똑같은 문장으로 봉해진 봉투가 세 개나 더 있었다. 보통 일은 아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머뭇대는 내 반응에 알테어가 가볍게 봉투를 흔들었다.
“내가 읽을까?”
“아뇨. 저한테 온 편지인걸요. 제가 읽어야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입이 바싹 마르는 게 느껴졌다.
“같이 보지.”
알테어가 봉투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가 함께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져서, 나는 조심스럽게 봉인을 뜯었다. 숙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것도 네 통이나 보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라?’
그러나 생각과 달리 발신인은 숙부가 아니었다.
‘멜리사가 보낸 편지야.’
동갑내기 사촌인 데다 한집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냈지만, 멜리사와는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멸시를 당했다. 그런데 편지에 담긴 멜리사의 말투는 무척이나 친근하고 다정해서, 지난날의 악연이 모두 착각인가 싶어질 정도였다. 우리 사이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편지를 봤다면 사이좋은 사촌이 쓴 메시지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거다.
옆에서 내용을 함께 읽던 알테어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역시 바인 후작가에도 에일스포드 이야기가 들어간 거겠지.”
“네.”
멜리사는 최근 수도에 돌고 있는 에일스포드의 행운이 진실인지, 진실이라면 자신이 에일스포드에 한번 방문할 수 있을지 묻고 있었다. 다른 세 통의 편지도 내용은 비슷했다. 다만, 내가 동부 귀족 회합 때문에 자리를 비워 답장을 보내지 못한 것을 다른 의도로 오해했는지, 이어진 편지에서는 어서 답장을 보내라는 독촉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내게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이 너무 걱정되니 빠른 시일 내에 에일스포드로 찾아가겠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에, 에일스포드로 온다고?!’
나는 너무 놀라서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었지만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멜리사는 한다면 하는 애였다. 분명히 빈말로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다. 에일스포드로 오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더는 편지가 오지 않은 것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귀족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엄청난 실례였지만, 멜리사는 나에 한해서는 어떠한 실례라도 저지를 준비가 된 애였다.
“메, 멜리사가 온대요!”
알테어를 바라보며 그렇게 외치고 나니 그가 멜리사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멜리사는 제…….”
“알아. 네 사촌이잖아.”
재빨리 그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알테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멜리사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데…….”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순간 밖에서 다소 급한 파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손님이 오셨어요!”
차분한 파벨이 이렇게 다급하게 달려올 정도라면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라는 뜻.
‘정말로 멜리사가 온 거야?!’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데 알테어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침실의 문을 열어 파벨을 맞이했다.
“바인 후작가에서 손님이 왔나?”
태연한 알테어의 질문에 파벨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였다.
“아뇨. 바인 후작가, 그러니까, 마님의 친정에서 손님이 오십니까?”
나와 알테어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파벨의 ‘예상을 벗어난 손님’은 멜리사가 아니었던 거다.
‘그럼 누구지?’
의아함에 눈을 껌뻑이는데 파벨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황족이 왔습니다, 황족이요!”
“황족?”
“예. 3황자 전하께서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