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진짜 반한 상대.2021.11.14.
3황자라니. 멜리사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이보다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3황자가 왜?’
내게 무례하게 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멜리사와 달리 3황자는 귀족의 예의를 충분히 아는 인물이었다. 미리 일정을 조율하지 않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게 얼마나 결례인지 알면서도 방문을 감행했다는 소리다.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건지 알테어도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분이 무슨 일로 에일스포드를 찾아와?”
“딱히 우리 영지를 찾아오신 건 아니고…… 이 근처를 지나다 마차에 문제가 생기셨다고 합니다. 마차 바퀴가 빠져버렸다나요.”
“마차 바퀴가 빠져?”
“예. 가장 가까운 영지가 에일스포드라 도움을 얻고자 찾아오셨답니다.”
파벨의 설명에 알테어가 코웃음을 흘렸다.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차다. 어설프게 바퀴가 빠질 리 없지.”
혹시라도 마차에 문제가 생겨 황족이 다치기라도 하면 제작자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러니 황가에서 들어온 주문이라면 장인들도 특별히 신경 써서 제작하는데, 회합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마차의 바퀴가 어설프게 빠져버릴 리 없다는 생각인 듯했다. 내 생각도 똑같았고 말이다.
“그야 그렇겠지만…….”
파벨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떨떠름한 얼굴을 하면서도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황자 전하를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잖습니까? 우선 맞이하러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나가지.”
알테어가 내게 쉬고 있으라는 듯 눈짓을 보내고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무려 황족을 맞이하는 일이다. 당연히 부부가 함께 나가 예를 갖춰야 한다.
‘나중에 꼬투리 잡힐지도 모르잖아.’
그런 일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후다닥 알테어의 옆에 따라붙자마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다시 침대로 떠밀었다.
“이제 막 돌아왔어. 입구에서는 쓰러질 뻔했고. 손님을 맞이할 상태가 아냐.”
“이제 막 돌아온 건 알테어도 마찬가지고, 입구에서는 쓰러질 뻔한 게 아니라 잠깐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너랑 내가 같아?”
알테어가 힘을 과시하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한 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으앗!”
나는 깜짝 놀라서 알테어의 어깨를 짚으며 중심을 잡았다. 그런데도 단단한 알테어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파벨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러면 어떡하냐는 항의의 의미로 알테어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이 상태로 나가도 좋다면 같이 가지.”
“이, 이 상태로 어떻게 손님을 맞이해요?!”
“그러니까 얌전히 쉬고 있으라는 말이다.”
알테어가 척척 걸어와 침대 위에 나를 눕히고 꼼꼼하게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절대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알았어요.”
나는 결국 포기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내가 필요한 상황이면 절 불러주세요. 꼭이요.”
“그렇게 하지.”
“알테어.”
누가 들어도 건성인 게 분명한 대답에 질책을 담아 이름을 부르자, 이번에는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렇게 하겠다.”
조금 전과 같은 대답이었지만 진심이 조금은 더 담긴 말투였다. 그러나 뒤이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질문이 이어졌다.
“이해가 안 돼. 왜 쉬라는 말을 싫어하지? 다들 일하는 걸 싫어하지 않나?”
“전 일하는 게 좋아요.”
그게 내 필요와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니 나도 궁금해졌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나의 필요와 쓸모를 증명하고 싶다는 건 이상한 걸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서 일하는 걸 싫어하나? 바인 후작가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나의 필요와 쓸모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그런 부분들을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선 뭐든 할 수 있어.’
내게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러니까 난 일하고 싶어.’
뭐든 열심히, 멋지고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다. 의지를 불태우며 이불을 꼭 쥐자 알테어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 건드렸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안 했어요.”
억울해져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는 영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자리를 떠났다.
‘오르카 황자는 왜 왔지?’
걱정과 의문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 알테어는 뚱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편안함을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불청객이 들이닥쳤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표정 관리 좀 하십시오. 아무리 끈이 떨어졌다지만 황족입니다.”
보다 못한 파벨이 슬쩍 조언했지만,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쓸 알테어가 아니었다. 끈이 떨어진 황족이든, 끈이 제대로 붙어 있는 황족이든. 불편하게 했다면 불편한 거다.
‘아무튼 못 말리겠네.’
파벨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성의 입구에 다다랐다.
“전하를 뵙습니다.”
알테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정확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 올렸다. 정식이 아닌 약식 인사였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서 정식 예법으로 인사를 올릴 필요는 없었다.
“남작.”
인사를 받은 3황자 오르카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 알테어는 기꺼이 자세를 풀었다.
“마차 바퀴가 빠지셨다고요.”
알테어의 물음에 오르카가 제 뒤편의 마차를 슬쩍 바라보며 난처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동부 지형이 험하더군요. 평탄한 수도를 달리던 마차라 견디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러셨군요.”
확실히 동부의 지형은 험하다. 평야가 넓게 펼쳐진 수도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지만 황가의 튼튼한 마차가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뻔한 거짓말을 뻔뻔하게도 한다. 알테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오르카 황자를 바라보았다. 동부 회합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이 있었다.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테어는 이런 쪽의 감이 좋았다. 여러 사람에게 배신당하며 경험으로 체득한 감이었다.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류.’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노선을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적의를 겉으로 드러내는 건 매우 멍청한 짓이었다. 알테어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삐딱한 속내를 감추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럼 도움이 필요해서 저희를 찾으신 거로군요, 전하.”
“마침 에일스포드 영지가 가깝기에 실례인 줄을 알면서도 도움을 청하러 왔지요. 동부 회합에서 안면을 텄으니 남작이 기꺼이 도와줄 거라 생각하면서요. 내가 착각을 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마차 수리공을 불러줄 수 있겠습니까? 마차가 수리될 때까지 잠시 쉬어갈 자리도 내어준다면 고마울 겁니다.”
이런 시골 영지에 마차 수리공이 있을 리가 없다. 외부로 사람을 보내 마차 수리공을 데려와야 하는데, 이런 고급 마차를 만질 수 있는 건 장인이라 불리는 정도의 실력자들뿐이었다. 그런 이들을 에일스포드로 데려오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릴 거다. 빠르면 사흘, 늦어지면 보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동안 에일스포드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겠다는 심산일 테지.’
문제는 오르카 황자가 ‘왜’ 에일스포드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으려는지 모른다는 거다.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한데 그걸 알 수 없으니…….’
하지만 꺼림칙하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파벨의 말대로 ‘아무리 끈이 떨어졌다지만 황족’이 아닌가? 알테어는 입구를 막고 있던 몸을 살짝 틀어,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짧은 환영 인사에 오르카 황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야말로 소문의 에일스포드에 발을 들이게 되어 영광이지.”
허공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느껴지는 묘한 기류에 눈치 빠른 파벨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일개 사용인인 파벨로서는 답을 알아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도 성 정비가 마무리된 상태라 다행이군.’
마님과 함께 분주하게 성을 보수하고 꾸민 보람이 있었다. 언젠가 손님에게 멋지게 변한 성을 자랑할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처럼 빠르게 기회가 오다니. 파벨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그러나 결코 오만하거나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자세로 오르카 황자를 안내했다.
“우선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차와 다과를 드시는 동안 휴식을 취하실 방이 준비될 겁니다.”
달라진 에일스포드 성에 첫 손님이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
“흐음…….”
오르카 황자는 응접실에 앉아 흥미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성의 수준이 상당하군. 그렇지 않아?”
처음부터 그림자처럼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부관에게 툭 말을 던지니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에일스포드의 부유함에 대한 소문은 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과장된 면이 있으려나 했는데 말이야.”
오히려 소문이 소박한 수준 아닌가?
“게다가 이렇게 성을 꾸미는 건 단순히 돈만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소박한 듯하지만 품격 있는 성의 분위기는 돈만 많이 쓴다고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것은 에일스포드에 제대로 된 귀족이 있다는 뜻.
“보통 성은 안주인이 관리하는 것인데.”
오르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에 띄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던 여자는 조용하고 여린 이미지였다. 그런 사람이 앞장서서 성을 관리하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도 결국 남작의 솜씨인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알테어 에일스포드’라는 남자에 더욱 흥미가 간다. 씩 웃는 오르카를 보며 부관이 슬쩍 물었다.
“그를 끌어들이려고 하십니까?”
“우선은 파악 중이야.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들어야 하는데, 보통은 그게 집이지. 인간이 가장 마음을 놓는 장소잖아?”
그런 의미에서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여 마신 차도 아주 훌륭했다.
‘내가 선호하는 차를 내왔군.’
산뜻하고 담백하다. 수풀과 연기 향이 살짝 배어 묘한 깊이감이 느껴진다.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정보력도 인정할 만하다. 자신의 정보력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 차를 내놓은 방식도 마음에 든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찻잔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해주었던 집사가 다시 등장해 고개를 숙였다.
“전하. 방이 준비되었으니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오르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차가 반쯤 남은 잔을 가리켰다.
“좋은 차를 내어왔더군. 남작의 호의에 감사한다고 전해주게.”
“아.”
적당히 예의를 갖추는 척, 남작에게 ‘네가 정보력을 과시한 걸 잘 알겠다’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한 것인데, 집사가 의외의 말을 들려주었다.
“차를 준비하신 건 저희 마님입니다. 그분께 전하의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마님? 이걸 남작 부인이 준비했다고?”
“예. 손님 대접은 안주인의 몫이라며 직접 차를 우리셨습니다.”
다시금 못 박는 말에 드물게 오르카 황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