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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정말 처음이야. (82/170)

48화. 정말 처음이야.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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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복도 모퉁이에서 고개를 슬쩍 내밀어 오르카 황자가 있는 응접실을 감시하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1655110845003.jpg“마님…… 왜 여기에서…… 영주님께서 푹 쉬라고 하셨는데요…….”

시선으로 문을 뚫어버릴 듯한 내 기세에 나를 따라나선 마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시선에는 이렇게까지 손님맞이에 열을 올리는 내가 이상하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16551108450035.png“하지만 손님을 대접하는 건 안주인의 몫인걸. 마중 나가 인사드리는 건 못 했지만, 차와 다과는 내가 준비해야지.”

1655110845003.jpg“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감시까지 하실 필요는…….”

16551108450035.png“가, 감시가 아니라 그냥 지켜보는 거야!”

1655110845003.jpg“마님. 보통 이런 걸 감시라고 합니다.”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마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날 설득해 방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한 거다.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하는 마리를 생각하면 미안했지만 감시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16551108450035.png‘오르카는 보통 손님이 아니잖아!’

오르카 황자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황족’이 왔다는 점에 긴장하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상대는 무려 소설 속의 진짜 악당! 모든 비극을 계획하는 흑막!

16551108450035.png‘사람 좋은 척하고 있지만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소설 속에서도 그랬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생기면 뒤에서 조용히 움직여 상대를 쓱싹 해치우고는 했다. 겉으로는 하하호호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이다.

16551108450035.png‘그러니 방심할 수 없지.’

나는 눈을 부릅뜨고 굳게 닫힌 문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대접에 소홀해서 꼬투리를 잡히면 오르카 황자가 어떤 식으로 보복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16551108450035.png‘어쩌면 이미 꼬투리를 잡힌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난 회합에서 오르카 황자가 암살당할 뻔했다. 물론 그건 발하일을 처리하려는 알테어의 계획이었고, 발하일이 처리하려고 했을 상대도 나나 알테어였을 거다. 그런데 알테어가 오르카 황자가 참석한다는 점을 이용해 발하일의 상대를 그쪽으로 교묘하게 틀어 큰 죄를 뒤집어씌운 상황이니…….

16551108450035.png‘알테어가 오르카 황자를 이용한 거지.’

오르카 황자는 문제를 해결할 때 타인을 이용하는 방식을 즐기지만, 자신이 타인의 문제 해결에 이용당하는 건 매우 불쾌해하는 사람이다. 타인은 나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지만, 나는 타인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나 할까?

16551108450035.png‘역시 악당 겸 흑막답게 이기적인 생각!’

하지만 원래 악당들은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런 악당이 존재하는 소설에 뚝 떨어진 여주인공들은 보통 그들을 갱생시키려 노력하지. 하지만 나는 내 주제를 안다.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16551108450035.png‘그러니까 나한테, 아니, 나와 이 에일스포드에 불똥이 튀지 않을 정도로만 노력하자.’

상황을 바꾸는 것까지는 자신 없지만,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작전은 간단했다. 오르카가 좋아하는 걸 먹이고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서 에일스포드를 향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무디게 만드는 거다! 원래 사람은 맛있는 걸 먹고 잠을 푹 자면 경계심이 풀어지기 마련이니까. 대단히 소박한 작전이지만 이게 내 한계였다.

16551108450035.png‘오르카 황자의 취향이라면 잘 알지.’

오르카는 소설에서 비중 있는 역할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호오를 파악할 수 있었다.

16551108450035.png‘물론 소설을 50번 정도밖에 못 읽어서 완벽하게 파악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100번은 읽었어야 하는 건데. 난 왜 항상 이렇게 한 끗이 부족한 걸까. 스스로의 허술함에 작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바짝 긴장한 채 문을 바라보니 오르카 황자와 그의 부하가 파벨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자에게 내어줄 방이 다 준비되어 응접실을 떠나려는 듯했다.

16551108450035.png‘침실도 자신 있어! 완전히 오르카의 취향에 맞게 꾸며뒀다고!’

다소 시간이 급박했지만, 오르카가 좋아하는 향과 색을 떠올려 방을 꾸밀 수 있었다. 파벨과 안나가 급히 움직여 준 덕분이었다.

16551108450035.png‘그러니까 자신 있어!’

나는 선전포고하듯 눈을 부릅뜨고 멀어지는 오르카 황자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걸어가던 오르카 황자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16551108450035.png‘헉!’

오르카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오르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밖으로 나가 인사를 하는 게 자연스러웠겠지만, 나의 소심함이 그런 대범한 일을 해낼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며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뒤늦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심장이 쿵쿵 뛰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16551108450035.png‘지, 지금이라도 나가서 인사할까?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고민 끝에 ‘지금이라도 인사하자!’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나는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아 복도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16551108450035.png‘어어……?’

휘잉- 하고 스쳐 가는 바람에 나는 그저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 오르카 황자는 복도를 걸으며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앞장서서 안내하던 집사 파벨이 무슨 일인가 싶어 오르카를 힐끗댔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파벨의 시선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조금 전 복도에서 마주쳤던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을 떠올렸다.

1655110845003.jpg‘뭐, 그걸 마주쳤다고 할 수 있으려나?’

자신을 몰래 지켜보던 남작 부인을 그가 일방적으로 발견했다는 게 더 옳은 설명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니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1655110845003.jpg‘그렇게 놀라다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이 선명했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감히 나를 감시하는 건가? 어째서?’라는 생각에 의심과 경계심이 무럭무럭 자라났을 텐데.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얼굴에 써 붙인 듯한 남작 부인의 표정을 떠올리니 그런 날 선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평생 타인을 경계하고 의심해 온 남자의 머리에서 그런 결론이 떨어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웠다.

1655110845003.jpg‘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무해하게 보이는 외모와 행동으로 사람의 경계심을 허무는 능력은 흔치 않았다.

1655110845003.jpg‘게다가…….’

16551108511558.png“마차가 수리될 때까지 여기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전하.”

집사가 안내해 준 방의 모습은 완전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장 먼저 코에 닿는 향기가 그의 마음을 녹였고, 이어진 풍경에 가득 찬 푸른빛이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모두 그가 선호하는 것들이었다.

1655110845003.jpg“이것도 전부 남작 부인의 솜씨인가?”

오르카의 질문에 딱딱하게 안내하던 파벨의 얼굴이 풀어졌다.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16551108511558.png“예. 향과 침구, 커튼과 소품까지 모두 마님께서 직접 고르셨습니다.”

1655110845003.jpg“놀랍군.”

오르카는 감추지 않고 감탄했다. 황궁 구석진 공간에 마련된 3황자의 방보다 이곳이 훨씬 자신의 취향에 맞았다.

1655110845003.jpg‘거기선 이렇게까지 내 취향을 고려하는 사람이 없지.’

황제는 붉은색을 선호하고, 달콤한 차를 즐겨 마셨으며, 은은한 꽃향기를 좋아했다. 푸른색을 선호하고, 풀 내음이 나는 차를 즐겨 마시고, 우디한 향을 좋아하는 오르카와는 취향이 완전히 달랐다. 황실의 모든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황후이고, 그 뒤로 황위 계승권에 가까운 후계자들이 입김을 발휘했다. 3황자라는 위치는 그 순서의 끄트머리에 존재했다. 그러니 이토록 완벽하게 자신의 취향에 들어맞는 대접을 받는 건…….

1655110845003.jpg‘처음이야.’

자신의 취향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이들을 신경 썼고, 자신을 성심껏 대접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의 취향을 몰랐는데.

1655110845003.jpg“……남작 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

16551108511558.png“예. 제가 전하겠습니다.”

오르카 황자의 말을 인사치레라고 생각한 파벨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1655110845003.jpg“아니. 직접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데.”

16551108511558.png“예?”

1655110845003.jpg“응접실에서 마셨던 차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남작 부인께 티타임을 청하고 싶은데. 물론 부인께서 많이 바쁘지 않으시다면 말이야.”

16551108511558.png“아아…….”

언뜻 가벼운 제안처럼 들리지만, 거절하면 ‘바빠서 널 상대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니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것을 알아챈 파벨이 잠시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이다 곧 고개를 깊이 숙였다.

16551108511558.png“마님께서도 기쁘게 수락하실 겁니다. 제가 마님께 전하의 요청을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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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벨은 한달음에 제 주인, 알테어를 찾아갔다.

16551108511558.png“우선 3황자는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환대에 썩 만족한 것 같았고, 의심스러운 기색은 없었습니다.”

16551108533669.png“그런가.”

서류를 보고 있던 알테어가 펜을 내려놓으며 피곤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16551108533669.png“그래도 잘 지켜보도록 해. 우리가 발하일을 처리하느라 그를 이용한 걸 알아채고 뭔가 얻어 내기 위해 에일스포드로 온 게 분명하니까.”

16551108511558.png“정말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유한 분 같았습니다.”

16551108533669.png“네 눈까지 속였다니 더욱 보통내기는 아니겠군.”

알테어가 코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동부 회합에서, 그리고 다시 마주한 에일스포드 성에서 확실히 느꼈다.

16551108533669.png‘그자는 나와 동류다.’

동류는 서로를 쉽게 알아보는 법이니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16551108533669.png‘아마도 파벨이 오르카 황자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그와 동류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의심 많고, 항상 타인을 경계하며, 항상 자신의 이익을 고민하는 인간. 하지만 파벨은 여전히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1108511558.png“하지만 정말로 에일스포드의 호의에 감격한 눈치였습니다. 특히 마님께 아주 고마워하더군요.”

16551108533669.png“마님?”

처음 듣는 소리에 알테어가 얼굴을 확 구기자 파벨이 ‘아차!’ 하면서도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디아가 내어준 차를 마시고 오르카 황자가 감탄한 것 같았다는 이야기, 나디아가 꾸민 방을 보고 오르카 황자가 조금 감격한 듯 보였다는 이야기, 결국 오르카 황자가 나디아에게 티타임을 청했다는 이야기. 어차피 에일스포드 성에서 알테어가 모르는 일은 없으니 오래 숨길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16551108533669.png“나디아가 손님맞이를 준비했나? 분명히 쉬라고 했는데, 언제 그런 일을 한 거지?”

16551108511558.png“안나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들으신 모양입니다. 급히 저를 찾아오셔서는, 3황자 전하는 까다로운 손님이니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모든 걸 직접 지휘하셨어요.”

16551108533669.png“……3황자가 까다로운 손님인 건 어찌 알고.”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불편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16551108533669.png‘그러고 보면…….’

동부 회합에 3황자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나디아의 반응이 이상했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렇게까지 3황자를 신경 쓰는 나디아를 보고 있으니 단순히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나 싶어졌다.

16551108511558.png“마님께서는 수도 출신이시니 황족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계실 수도 있지요. 저희 같은 시골 촌놈들이 모르는 이야기도 많이 아실 테고요.”

16551108533669.png“1황자도, 2황자도 아니고 3황자다. 이름만 황족인 자인데 무슨 정보가 그리 떠돌아다니겠나.”

16551108511558.png“뭐, 수도는 가십의 중심지니까요.”

찜찜함에 미간을 찌푸리는 알테어와 달리 파벨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알테어의 생각은 달랐다.

16551108533669.png“……티타임 이야기는 나디아에게 전하지 마.”

16551108511558.png“전하지 말라니요. 황자 전하의 제안인데 어떻게 그럽니까?”

16551108533669.png“내가 대접할 거다.”

16551108511558.png“네?”

알테어의 편리한 주장에 파벨이 얼굴을 확 구겼다.

16551108511558.png“영주님이 어떻게 차를 대접합니까?”

16551108533669.png“못할 게 뭐 있다고?”

16551108511558.png“차를 제대로 못 우리시잖습니까?”

16551108533669.png“…….”

정확한 지적에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입으로 들어가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 먹는 것에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그건 차에도 마찬가지라, 신경 써서 차를 우려 제대로 맛을 낸다는 게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풀에 적신 물인데 뭐가 그렇게까지 다르다고?

16551108533669.png‘물론 나디아가 우려주는 차는 어째서인지 맛이 좋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차를 우려내는 나디아의 모습이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그 맞은 편에 오르카 황자가 웃으며 앉아 있는 모습까지 그려지자 머리가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둘만의 티타임이라니. 절대 안 되지!

16551108533669.png“배울 거다. 차 우리는 방법.”

16551108511558.png“……안 될 거 같은데.”

벌써부터 그려지는 미래에 파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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