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게 아니야!2021.11.21.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커튼을 매만지며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테어와 오르카가 같이 차를 마시고 있어……!’
그것도 정원에서! 티타임 테이블을 펼쳐놓고! 단둘이! 두 사람의 티타임은 화기애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리서 이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찌나 찬 바람이 부는지 그들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파벨이 불편한 얼굴로 연신 분위기를 살필 정도였다.
‘도대체 뭐 하는 거람.’
알테어는 스스로 나서서 티타임을 주도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대화를 즐기지 않으니까.
‘뭔가 알아내고 싶은 게 있다면 뒤에서 움직이는 쪽이지.’
그렇다면 이 티타임을 제안한 사람은 오르카 황자일 터. 오르카 황자는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호감을 얻고, 그 호감을 바탕으로 중요한 정보들을 끌어모아 적을 겨눌 무기로 활용했다. 때로는 대화 상대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헛소문을 흘리기도 했다.
‘알테어에게 뭔가 캐낼 속셈인 건가? 아니면 알테어를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만들 생각?’
아니면 소설에서처럼 알테어를 꼬드겨 악당 동지로 만들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래. 확실히 그쪽이겠지.’
하지만 나는 알테어가 소설에서처럼 무시무시한 악당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악당으로 각성한 알테어의 곁에 머무르다가 허무하게 죽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래도 그 이유가 첫 번째다. 하지만 알테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 이유가 더 많이 생겼다. 소설에서 묘사된 알테어의 삶은 어둡고 외로웠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가 어둡고 외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에일스포드에 와서 마주한 알테어는 어두운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있었고,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모든 걸 등지고 무시무시한 악당이 되는 걸까.’
아직도 그 계기는 알 수 없었지만, 알테어를 악당의 길로 끌어들이는 원흉이 오르카 황자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경계심을 가득 품고 오르카 황자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계기를 알 수 없다면 원흉을 멀리해야겠지.’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접점을 줄여 오르카가 알테어를 꼬드겨 낼 기회 자체를 안 주는 거다.
‘그러니까 저런 티타임도…….’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으니 등 뒤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요, 마님.”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니 이 공간의 새로운 주인 리온이 책더미를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보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간단했다.
“정리를 도와주겠다고 하시더니, 오히려 저를 방해하는 중이시군요.”
“아!”
그제야 내가 창밖을 내다보느라 바로 옆에 세워진 책장을 막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서둘러 뒤로 물러나 자리를 내어주며 리온이 든 책으로 손을 뻗었다.
“같이 할게요!”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리온이 나의 호의를 가볍게 거부하며 책장에 책을 꽂아 넣었다. 눈치껏 주위를 살피니 한쪽 구석에 가득 쌓인 책더미가 보였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책을 가득 들어 올렸다. 너무 욕심을 부린 건지 묵직한 무게감에 순간 몸이 휘청했으나 책장 앞까지 도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팔이 조금 후들거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거뜬하다고! 나는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며 슬쩍 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든든하게 연구를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리온을 데려온 데다, 그가 오르카 황자가 아니라 우리 쪽에 남도록 호감을 사야 하는 입장이니 여러모로 그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느낀 건지 리온이 책을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에일스포드에 돌아온 소감은 어떤가 싶어서요. 진료소를 같이 정리할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리온이 그것도 거절했다고 해서…….”
감기약 개발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에일스포드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에일스포드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었다. 리온의 선은 분명했다. 진료소를 내어주고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까지는 받아들였지만 그 외의 도움은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투자가 아닌 인간적 호의는 모두 거절하겠다는 소리다.
‘그나마 나는 에일스포드 출신이 아니라서 경계심이 덜한 것 같아.’
과거의 비극과 완전히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그의 벽을 살짝 허문 듯했다.
“글쎄요. 아직 제대로 에일스포드를 둘러보지는 못해서. 하지만 분위기가 사뭇 다르더군요.”
그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면서도 성실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뿌리 깊은 곳까지 악한 자가 아니라면, 자신을 돕겠다는 사람에게 모질게 굴지는 못할 거다. 리온도 그런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얻어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떻게 다른가요?”
“제 기억 속의 에일스포드보다 훨씬 활기가 넘치더군요. 오래전에는 조용하고 소박한 동네였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인지 리온의 눈이 잠시 아득해졌다. 나는 그의 추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책 정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오래 지나지 않아 리온이 옅은 숨을 토해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관리하지 않으셔도 제대로 할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과 연구는 별개니까요.”
“네?”
“제가 혹시라도 개인감정 때문에 제대로 연구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렇게 직접 나서서 돕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걱정은 처음부터 전혀 안 했어요.”
나는 리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리온이 가진 의료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잘 알고 있었다. 개인감정 때문에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을 거였다면, 애초에 에일스포드로 따라오지 않았을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도, ‘모두를 위한 연구’라는 대의를 위해 에일스포드 행을 선택했다.
‘소설에서 괜히 성자로 추앙받은 게 아냐.’
리온의 의술이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그런 그의 심성도 한몫했을 거다.
‘리온의 인간적인 호의를 얻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지만…….’
연구에 대한 의심이라니? 그건 정말로 머릿속에 없던 이야기다. 내 반응에 리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실과 거짓을 가늠하려는 듯 한참이나 나를 빤히 보던 리온이 어쩐지 난처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요? 왜요?”
나처럼 생각이 고스란히 다 드러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자랑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감추고 꾸미는 일에는 재능이 없는 편이라 리온의 말이 의아했다. 그는 그런 나의 반응마저 이상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의심한다고요. 내가 다친 당신을 치료해줬다고 해도요.”
“왜 리온을 의심해야 하는데요?”
“내가 남작에게 품은 적의를 알잖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남작을 움직여 내 연구에 크게 투자했어요. 꿍꿍이가 있어서 받아들인 건 아닐지, 복수하겠다며 연구비를 다 날려 먹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게 보통이죠.”
“네? 리온은 안 그럴 거잖아요.”
연구라면 진심일 테니까. 소설만 생각하고 리온을 굳게 믿고 있던 나는 뒤늦게 놀라서 펄쩍 뛰었다.
“설마 그런 생각이었어요?!”
“당연히 아니지요!”
리온도 덩달아 펄쩍 뛰며 반박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책을 정리하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이. 그럼 뭐가 문제예요. 리온은 리온이 할 일을 하세요.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테니까.”
“당신의 할 일이요?”
“리온이 과거의 사건을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그걸 바로잡는 거지요. 연구가 잘되어서 에일스포드의 명성과 부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좋고요.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 없이 무작정 퍼주는 거 같아 의심스러웠다면 깨끗하게 거둬도 돼요.”
“의심이라기보다는…… 그냥 이해가 안 될 뿐입니다.”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 와중에 나를 빤히 쳐다보던 리온이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영주님에 대한 오해도요.”
“글쎄요.”
알테어에 대해 언급하자 조금 풀어졌던 공기가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리온이 책장 옆의 창문 너머로 오르카 황자와 차를 마시고 있는 알테어를 힐끗대며 가볍게 혀를 찼다.
“황자와 연줄을 만들고 싶어서 어울리지도 않게 티타임을 함께 하는 사람에 대해 제가 어떤 오해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그것부터가 오해예요!”
나는 발끈해서 책을 정리하던 손을 허리에 얹으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과한 반응이었는지 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 오해는 당장 바로잡아야 했다.
“티타임을 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황자님이에요. 상대를 꼬드겨서 연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쪽도 분명히 황자님이시고요. 보세요. 알테어는 지금도 곤란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요!”
나는 어색하게 차를 따르고 있는 알테어를 가리키며 동의를 종용했다. 하지만 리온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남작은 아주 편안한 얼굴인데요.”
“무슨 말이에요. 왼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축 처졌다고요.”
“도대체 그게 무슨……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왜 몰라요? 당연히 알지요.”
리온과 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절대로 리온을 이해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터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되겠네요. 역시 내가 알테어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줘야 할 것 같아요.”
“구해 준다고요? 어떻게요?”
“오르카 황자님이 알테어를 꼬드길 수 없도록 내가 완벽하게 차단할 거예요.”
나는 코웃음을 흘리며 음흉한 오르카 황자의 두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티타임을 좋아하면 제가 매일 차를 대접해주죠! 내일부터는 에일스포드 성을 떠나는 날까지 알테어의 그림자도 못 보게 할 거예요. 내가 여기저기 끌고 다닐 테니까!”
말을 하다 보니 점점 머릿속으로 계획이 그려졌다.
‘그래. 진즉에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오르카 황자는 알테어를 꼬드겨 제 동료로 만들 속셈이니까, 그걸 막고 싶다면 애초에 그가 알테어를 꼬드길 기회를 안 주면 된다.
‘안주인이 손님을 대접하고 싶다는데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은 없지!’
*** 나디아가 그렇게 의지를 불태우는 순간.
“…….”
“…….”
알테어와 오르카 황자는 마주 앉은 채 어색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제가 기억하던 차 맛이 아니군요.”
“찻잎은 같은 겁니다.”
“예. 그건 알겠습니다만.”
도무지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알테어도, 오르카도 머릿속으로는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녀석이랑 차를 마시고 있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