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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싫다면 네가 어쩔 건데? (84/170)

50화. 싫다면 네가 어쩔 건데?2021.11.24.

대화는 대체로 한 방향이었다. 오르카 황자가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면 알테어가 그에 대해 짧게 대답하고, 그대로 침묵이 이어졌다. 보통 대답한 쪽에서 새로운 화제를 꺼내는 게 사교적 담화의 기본이었지만 알테어는 그러한 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상대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더욱 그랬는데, 오르카 황자는 단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뚝뚝한 대처가 외려 오르카의 흥미를 자극했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못 받는다지만 그는 황자였다. 그 신분이 주는 힘은 아주 대단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가까이 지내면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라는 생각 때문인지, 알테어처럼 대놓고 그를 배척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16551108938793.jpg‘이 와중에도 무례하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게 인상 깊단 말이지.’

무례함으로 상대에게 선을 긋는 건 하수들의 방식이다.

16551108938793.jpg‘지켜야 할 것을 지키면서 우아하게 상대를 배척할 수 있다는 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16551108938793.jpg‘부부가 모두 흥미로워.’

이렇게 흥미로운 사람들이 어째서 사교계에 알려지지 않은 걸까?

16551108938793.jpg‘아니, 아니지.’

부인 쪽이라면 확실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는 바람에 작위를 지키지 못하고 처지가 나락으로 떨어진 불쌍한 아가씨라고 했었다.

16551108938793.jpg‘그 아가씨가 이렇게 흥미로운 사람이라는 소리는 없었다고.’

오르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매만지던 그때. 그들의 머리 위 높은 곳에 커다란 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마치 그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커다란 새가 긴 울음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 새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차린 것인지 오르카가 확신에 차서 물었다.

16551108938793.jpg“지라르 매군요?”

16551108938819.jpg“……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알테어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물었다.

16551108938819.jpg“바로 알아보시는군요?”

16551108938793.jpg“울음소리가 특이해서요. 까마귀처럼 온몸이 검은 것도 그렇고요.”

하지만 까마귀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몸집이 크다. 오르카 황자는 천천히 하강해 알테어가 뻗은 팔 위에 내려앉는 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16551108938793.jpg“똑똑하지만, 똑똑한 만큼 고집이 세서 길들이기 힘든 녀석들인데요.”

사실 전령 새의 미덕은 적당한 영리함이다. 전령 새는 지시를 알아들을 정도의 지능이 있어야만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데, 그 이상으로 지능이 높아 스스로 상황을 판단할 머리가 있는 놈들은……. 종종 지시를 어기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16551108938793.jpg‘그러니 부리는 처지에서는 적당히 똑똑한 게 좋지.’

그게 전령 새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16551108938793.jpg‘물론 필요 이상으로 똑똑한 존재들이 매력적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오르카 황자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평가를 하는 사이, 알테어가 매의 다리에 묶여 있던 작은 서신을 풀어냈다. 타인이 주시하고 있는데도 알테어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나는 음흉한 짓을 하지 않으니 당당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16551108938819.jpg“에일스포드는 오래전부터 지라르 매를 전령 새로 부렸습니다.”

알테어가 눈으로 서신의 내용을 훑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16551108938819.jpg“말씀하신 것처럼 똑똑해서 길들이기 힘든 녀석들이지만…… 그래서 통제 아래 두었을 때 더욱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쉽게 얻을 수 있는 놈들은 쉬운 일만 해내지만, 어렵게 얻은 놈들은 어려운 일도 거뜬히 해내죠.”

16551108938793.jpg“……과연.”

알테어의 말에 오르카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 눈을 휘어 늘 다정하게 웃고 있던 얼굴에도 진지함이 감돌았다. 선명하게 드러난 오르카의 주홍빛 눈동자와 알테어의 붉은 눈이 허공에서 부딪히는 순간, 오르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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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08938793.jpg“에일스포드 남작. 정적을 치우기 위해 날 이용했죠?”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질문에 태연하게 서신을 읽고 있던 알테어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1108938819.jpg“조금 더 돌려 말할 줄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16551108938793.jpg“확실히 그런 방식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남작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두 남자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파벨이 손을 들어 따뜻한 물을 보충하러 다가오는 시녀의 걸음을 막았다. 그러고는 자신도 천천히 뒷걸음질 쳐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렸다. 고요함 속에서 알테어가 먼저 입을 뗐다.

16551108938819.jpg“맞습니다. 이용했습니다.”

알테어는 깔끔하게 그를 이용했음을 인정했다. 정황을 모두 파악한 사람 앞에서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었다.

16551108938819.jpg“하지만 전하께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16551108938793.jpg“확실히 그렇습니다. 나를 향한 암살 사건 덕분에 황제 폐하께서 권위를 과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도 그분께 점수를 딴 셈이죠. 아예 쓸모없는 놈은 아니라고요.”

아무리 황제의 총애에서 멀어졌다고는 해도 황자는 황자다. 알테어가 그런 사람을 이용하면서도 두렵지 않았던 건, 진실을 알게 되어도 당사자인 황자가 진실을 밝히지 않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오히려 황자는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지 않을 거라고, 황제와 마찬가지로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두고 싶으리라 짐작했고, 그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만약 예측이 어긋나 황자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설치는 경우도 그려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크게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16551108938793.jpg“만약 내가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진실을 고한다면…… 멍청하게 황가의 권위를 그르치려 한다며 폐하께 혼쭐이 나겠죠. 그러니 침묵하고 있는 게 내게는 최선입니다.”

이용당한 오르카 황자 입장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구덩이에 쑥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6551108938793.jpg“아마 남작은 이런 복잡한 상황을 모두 계산한 것이겠죠?”

16551108938819.jpg“감히 황가를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모두 계산하지 않았다면 감히 제가 어찌.”

물론 예측이 어긋난 부분도 있었다. ‘오르카 황자’라는 사람에 대한 예측이었다. 알테어는 소문으로만 3황자를 접했다. 병약한 황자. 황제의 총애에서 멀어져 요양을 핑계로 지방을 전전하는 끈 떨어진 황자. 그래서 오르카를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른 연약한 황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오르카는 알테어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다.

16551108938819.jpg‘귀찮은 인간을 건드려버린 것 같군.’

이런 놈인 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건데. 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알테어는 읽고 있던 서신을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넣은 뒤 지라르 매를 날려 보냈다. 매는 익숙하게 날갯짓을 해 에일스포드 성의 첨탑을 향해 날아갔다. 그곳에 임무를 완수한 녀석에게 줄 먹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16551108938819.jpg“일방적으로 상황에 연루되신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담백한 사과의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지만, 전혀 송구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르카 황자가 빙긋 웃었다.

16551108938793.jpg“말로만 사과할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웠겠지요. 사람을 이용했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16551108938819.jpg“보상이라.”

알테어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108938819.jpg“그런 건 못 드리겠다면?”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어차피 네가 아무것도 못 할 걸 안다는 자신감이 담긴 태도에 오르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테어는 침묵을 지키는 오르카를 바라보며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파벨에게 손짓했다.

16551108938819.jpg“전하께서 이 차가 마음에 드신다니 돌아가시는 날에 넉넉히 챙겨드리도록 해라.”

1655110898107.jpg“예? 예에…….”

이건 결국 오르카가 돌아가는 날까지 다시 그를 만나지 않겠다는 이야기인지라, 파벨이 오르카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스럽게도 오르카는 딱히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지만…….

1655110898107.jpg‘그래도 황자님인데!’

파벨이 몰래 알테어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의 실체를 다 알고 있다며 패를 깐 마당에 예의 차려 대접해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알테어는 파벨의 엄청난 눈빛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오르카에게 까딱 고개를 숙였다.

16551108938819.jpg“그럼 돌아가는 날까지 편히 쉬시길.”

16551108938793.jpg“……그리하지.”

  *** 티타임이 그렇게 마무리된 후, 파벨이 빠르게 알테어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1655110898107.jpg“영주님! 아무리 그래도 황자님인데 그런 식으로…….”

16551108938819.jpg“수도에서 온 서신이다.”

알테어가 간단한 말로 끝없이 이어지려는 파벨의 잔소리를 막았다.

1655110898107.jpg“수도에서 온 서신이요?”

16551108938819.jpg“조금 전에 전령 새가 가져온 서신 말이야. 수도에서 온 것이라고.”

1655110898107.jpg“그럼…….”

알테어의 의도가 제대로 통했다. 파벨은 자신이 하려던 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금세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1655110898107.jpg“발하일이 처형되었습니까?”

알테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16551108938819.jpg“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평생 어두운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어쩌면 그것이 사형보다 더 잔인한 형벌이 될 수도 있었다. 발하일처럼 자신만만한 놈들에게는 더 그랬다.

1655110898107.jpg“……그 망나니를 이런 식으로 보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딘가 찜찜해 보이는 얼굴에 알테어가 파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16551108938819.jpg“누명을 씌워 발하일을 처리한 게 마음에 안 드나?”

1655110898107.jpg“그럴 리가요. 그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진즉에 말렸겠지요.”

하지만 파벨은 그러지 않았다.

1655110898107.jpg“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16551108938819.jpg“근본적인 문제?”

1655110898107.jpg“네. 발하일이 사라졌지만, 이제 또 다른 후계자가 등장할 것 아닙니까.”

가문의 변호인이 발하일 다음 차례의 후계자를 찾아내어 그에게 상황을 고지할 것이고, 갑자기 떨어진 행운을 알아챈 새 후계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운이 나쁘다면, 발하일보다 더한 놈이 후계자랍시고 나타날 수도 있었다.

16551108938819.jpg‘그래서 거슬리는 발하일을 남겨두면서 상황을 지켜본 거였는데.’

상황이 급변하여 결국 처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되었다.

1655110898107.jpg“그러니까 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에일스포드에는 소남작이 필요해요.”

파벨이 안경을 고쳐 쓰며 진지하게 조언했다.

1655110898107.jpg“마리 양의 이야기로는 에일스포드에 돌아오신 후 마님과는 단 한 번도 밤을 같이 안 보내셨다고…….”

16551108938819.jpg“너!”

태연하게 이어지는 파벨의 말에 알테어가 벌게진 얼굴을 하고는 커다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16551108938819.jpg“너희들끼리 그딴 걸 전부 공유해?”

맹수가 으르렁대듯 위협적인 목소리였지만 파벨은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1655110898107.jpg“그럼 안 하나요? 원래 사용인들의 임무에는 그런 것도 있는 겁니다.”

16551108938819.jpg“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 신경 꺼!”

1655110898107.jpg“알아서 하신다는 분치고는 영……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습니까? 혹시 영주님의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파벨이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묘한 곳을 향하는 그의 시선에 알테어가 발끈해서는 몸을 휙 돌렸다.

16551108938819.jpg“문제는 무슨! 너무 문제가 없어서 문제라고!”

알테어가 투덜거리며 잰걸음으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파벨이 재빨리 그 뒤를 따라붙었다.

1655110898107.jpg“문제가 없는데 왜 안 하시는데요?”

16551108938819.jpg“아픈 사람이야. 아직 회복이 안 됐다고! 하도 참아서 뭐든 시작하면 자제할 자신이 없는데, 그러다가 내가 다치게 하면…….”

16551109018862.jpg“누가 다쳐요?”

쏟아지는 알테어의 말을 익숙한 목소리가 끊어냈다. 알테어가 황급히 입을 다물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디아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16551108938819.jpg“그…… 넌 언제 여기에…….”

16551109018862.jpg“알테어가 자제할 자신이 없다고 할 때부터요. 뭘 그렇게 자제 중인데요?”

16551108938819.jpg“그러니까, 그러니까…… 넌 몰라도 돼.”

할 말을 고르던 알테어가 결국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08938819.jpg“아직 회복도 안 됐는데 뭐 하러 돌아다녀?”

16551109018862.jpg“손님이 와 계신데 제가 어떻게 쉬어요. 내일부터는 제대로 일하려고요.”

16551108938819.jpg“……뭐?”

나디아가 의욕에 불타 두 주먹을 불끈 쥐자 알테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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