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이걸 부부라고 할 수 있어? (85/170)

51화. 이걸 부부라고 할 수 있어?2021.11.28.

굳어지는 알테어의 표정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16551109096396.jpg‘역시 알테어는…….’

내가 제대로 남작 부인의 역할을 하지 않아서 심기가 불편한 거다!

16551109096396.jpg‘미,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잖아…….’

편하게 쉬라고는 했지만, 손님을 내버려 두고 이렇게까지 편하게 쉬다니. 남작 부인 역할은 언제 할 생각이었지? 제대로 아내 역할을 하겠다더니 이래서야 실격이군.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싸늘한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알테어가 먼저 남작 부인의 역할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 잘못을 알아채기를 바라서였겠지.

16551109096396.jpg‘너무 늦지 않게 알아차려서 다행이야…….’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의지를 불태웠다. 알아차린 것이 늦은 만큼 더 열심히 노력해서 제대로 안주인의 역할을 해볼 참이었다.

16551109096396.jpg‘게다가 오르카 황자의 마수로부터 알테어도 지켜야 하니까.’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도 없다.

16551109096396.jpg“알테어는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잘할게요.”

1655110909642.jpg“도대체 뭘…… 어떻게 잘하겠다는 거야.”

알테어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얼굴을 쓸어내린 손이 아래로 떨어지자 그의 선명한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1655110909642.jpg“아무것도 하지 마.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알테어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언제나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순간 압도당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불꽃 같은 의지를 불태운 덕분에 겨우 고개를 꼿꼿이 세울 수 있었다.

16551109096396.jpg“내가 못 미더운 거 알아요. 제대로 손님을 대접해본 적도 없는데, 황자님을 모신다고 하니 당연히 걱정되겠죠. 하지만 에일스포드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을게요.”

1655110909642.jpg“그…….”

알테어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입술을 뗐다가,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한번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1655110909642.jpg“그래도 안 돼. 넌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

16551109096396.jpg“난 멀쩡해요. 정말이에요. 오늘은 리온의 진료실 정리도 도왔다고요.”

1655110909642.jpg“뭐? 그걸 왜 네가 도와? 사용인들은 뭘 하고?”

16551109096396.jpg“리온이 에일스포드 사람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거절해서…….”

1655110909642.jpg“그러는 넌, 에일스포드 사람이 아냐?”

16551109096396.jpg“에일스포드 사람이죠. 하지만 출신은 수도니까…….”

이어지는 추궁에 대답을 하고 있자니 점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름대로는 할 일을 제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알테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걸 느꼈는지 알테어도 추궁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마음이 더욱 쪼그라드는 듯했다.

1655110909642.jpg“…….”

16551109096396.jpg“…….”

나와 알테어 사이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자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파벨이 슬그머니 중재에 나섰다.

1655110911052.jpg“마님. 영주님의 뜻을 따르시죠. 제가 보기에도 확실히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16551109096396.jpg‘그거야 알테어가 나를 계속 몰아붙이니까…….’

며칠 푹 쉰 덕분인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몸이 아주 가벼웠다.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의 좋았던 상태가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몸과 마음이 축 가라앉았다.

16551109096396.jpg“……내 상태는 내가 잘 알아요.”

내가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상태조차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고개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16551109096396.jpg“할 수 있으니까 하겠다고 한 거예요. 못 미덥겠지만 난 내 일을 할 거라고요.”

1655110909642.jpg“널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16551109096396.jpg“그게 아니면요?”

반박하려는 알테어의 목소리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동안 알테어와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믿음직한 아내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폐를 끼치지 않는 아내라는 건 잘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1655110909642.jpg“정말로 아냐. 네가 못 미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맹세하지.”

알테어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차분하게 말했지만, 결코 내가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16551109096396.jpg“내가 못 미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이런 건 치사해요.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가 있다면 말해주면 되잖아요. 그러지도 않으면서 나서지 말라고만 하는 건…… 정말로 치사하다고요.”

이래서야 회합에서 있었던 일의 반복일 뿐이다. 부부는 동등한 관계 아닌가. 한쪽이 일방적으로 보호받기만 한다면…… 그건 부부라고 할 수 없었다.

16551109096396.jpg‘그러니 나랑 알테어도 제대로 된 부부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큰해지려는 두 눈에 힘을 주었더니, 시선을 마주한 알테어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게 보였다.

1655110909642.jpg“나디아.”

16551109096396.jpg“난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에요. 그러니까 내 일을 하겠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렇게 선언한 뒤 몸을 돌렸다. 이렇게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한 게 얼마 만인지. 스스로가 놀랍고, 또 이 상황이 낯설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16551109096396.jpg‘내가 멋대로 군다고 알테어가 화났을지도 몰라.’

하지만 알테어도 멋대로 했으니까, 나도 멋대로 할 거야. 나도 알테어를 지키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16551109125362.jpg

  *** 나디아가 쿵쿵대며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파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1655110911052.jpg“……정말로 다 회복되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알테어가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알테어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으로 잠시 가출했던 그의 넋을 불러왔다.

1655110911052.jpg“이번에는 마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다짜고짜 이건 안 된다고 하면 마님이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1655110909642.jpg“……난 그저 내 아내가 걱정될 뿐이야.”

알테어가 가볍게 항변했지만, 파벨은 이미 나디아의 아군이었다.

1655110911052.jpg“걱정하는 방식을 조금 바꾸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님은 영주님의 아내이지 부하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야 명령하시면 따르지만, 마님은 다르시죠. 가족끼리는 명령할 수 없으니까요.”

잘 모르겠다. 부하를 걱정하는 방식과 가족을 걱정하는 방식이 다르단 말인가? 알테어는 선뜻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었기 때문에, ‘가족답게 걱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저 내 사람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 방식으로 훌륭하게 제 영지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끼리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걸까? 상대를 지키겠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한가? 알테어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오랫동안 그를 모신 파벨은 그 아래에 깔린 혼란을 알아챘다.

1655110911052.jpg‘조금 주제넘지만…….’

파벨은 작은 조언을 건네기로 마음먹었다.

1655110911052.jpg“마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으시는 게 어떨까요. 에일스포드의 사정이나 영주님의 고민 같은 걸요.”

1655110909642.jpg“나 혼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야. 뭐 하러 피곤한 소리를 나누지?”

1655110911052.jpg“가족이니까요?”

파벨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110911052.jpg“저도 블란과 그런 피곤한 소리를 자주 나눕니다. 물론 대체로 한 귀로 흘리게 됩니다만…… 가족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요.”

알테어는 묵묵히 파벨의 이야기를 들었다. 후계자를 얻기 위해 아내를 맞았고, 아내로 맞은 이상 확실히 지킬 생각이었다. 내 사람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1655110911052.jpg“후계자를 들먹이며 영주님을 부추긴 제가 할 말이 아닌 건 압니다. 하지만 마님은 영주님의 반려가 아닙니까. 평생을 함께할 가족이고요.”

1655110909642.jpg‘가족이라니.’

아내가 가족이라는 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이상하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부모님을 비극적인 사고로 잃은 후 ‘가족’은 알테어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였다. 결혼 역시 정략적인 결정이었기에 ‘가족’을 얻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족이라니. 가슴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가족? 내 가족은 전부 불에 타서 사라졌어. 활활 타올랐어.

1655110911052.jpg“영주님?”

알테어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을 발견한 파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5110909642.jpg“됐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오는 파벨을 저지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위태로운 모습에 파벨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찌푸려졌다.

1655110911052.jpg‘내가 실수한 건가……?’

하지만 파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1655110911052.jpg‘한 번은 극복해야 할 문제지.’

알테어의 내면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제부턴가 조금씩 그곳에 접근하는 존재가 생겼다는 걸 파벨은 알아차렸다. 정략결혼으로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된 마님, 나디아였다.

1655110911052.jpg‘영주님의 어긋난 무언가를 마님께서 제대로 맞춰주신다면…….’

파벨은 희망을 속으로 삼키며 재빨리 알테어의 뒤를 따라붙었다. *** 알테어에게 큰소리를 치고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정원이었다. 알테어와 함께 쓰는 안방, 알테어가 즐겨보는 책이 가득한 서재, 알테어와 함께 식사했던 식당……. 어디든 알테어의 흔적이 없는 곳을 찾다 보니 본능적으로 정원을 선택한 모양이다.

16551109096396.jpg‘그나마 여기가 내 공간이지.’

알테어는 다소 삭막한 사람이라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잘 찾지 않았다.

16551109096396.jpg‘원래 정원을 가꾸는 건 안주인의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정원이 얼마나 아름답게 잘 관리되어 있는가를 두고 안주인의 센스를 판단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성을 보수할 때 응접실과 함께 가장 공들인 부분이 바로 이 정원이었다. 사실 아무리 잘 꾸며도 정원의 풍경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 있었다. 예쁜 꽃이 있고, 푸르른 녹음이 가득하고,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 있고……. 약간의 특색은 줄 수 있겠지만 큰 틀은 다들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향기에 신경을 써서,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좋은 향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정원을 구성했다.

16551109096396.jpg‘눈으로 본 건 쉽게 잊히지만, 후각으로 남는 기억은 오래가니까.’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켜자 좋은 향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6551109153051.jpg“남작 부인?”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는 바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원 한편에 놓인 테이블에 오르카 황자가 앉아 있었다.

16551109168367.jpg

16551109096396.jpg‘조금 전까지 알테어와 오르카 황자가 여기서 티타임을 가졌었지.’

알테어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여서 당연히 오르카 황자도 자리에 없을 줄 알았는데…….

16551109153051.jpg“남작이 많이 바쁜지 먼저 자리를 떠서 혼자 남았습니다. 괜찮다면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까요.”

16551109096396.jpg“아.”

오르카 황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오르카 황자가 이 정원의 주인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황족의 특성일까? 아니면 오르카 황자라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황자의 권유를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게다가 알테어를 지키기 위해 오르카 황자를 밀착 방어하자고 결심한 참이었다.

16551109096396.jpg“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썩 좋은 상대는 아닐 테지만…… 좋은 차는 우려낼 수 있을 것 같아요.”

16551109153051.jpg“좋은 차요?”

오르카 황자가 내 말에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테어와의 티타임은 꽤 오래전인데, 아직도 그의 찻잔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의아하게 눈을 껌뻑이는 사이 오르카 황자가 찻잔을 들어 이미 식어버렸을 차를 모두 바닥에 흘려 버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16551109153051.jpg“사실 그게 가장 필요했답니다. 나쁜 차를 마셨더니 입 안이 텁텁했거든요.”

16551109168397.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