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생각지 못한 전개.2021.12.01.
예상하지 못한 티타임이었지만, 빠르게 찻잎과 따뜻한 물, 함께 먹기 좋은 다과가 준비되었다. 조금 전까지 알테어와 오르카가 티타임을 가졌던 탓에 필요한 것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덕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찻잎이 든 찻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따르며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따뜻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소설 속에서 끔찍한 살인을 지시했던 원흉이라는 걸 믿기 힘들었다.
‘어딜 봐도 선량한 인상인걸.’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알테어만 하더라도 겉모습만 보면 무시무시한 악역인걸. 그래서 처음에 엄청나게 경계했던 거지만, 함께 지내면서 그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 뿐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인.”
“네?”
알테어를 떠올리자마자 마음이 무거워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니 오르카 황자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를 부르며 턱 끝으로 찻주전자를 가리켰다.
“물이 넘치네요.”
“네…… 네에?!”
화들짝 놀라 찻주전자를 바라보니 정말로 물이 흘러넘쳐 하얀 테이블보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따뜻한 물이 들어 있던 주전자를 던지듯 트롤리에 내려놓은 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찻주전자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르카 황자가 벌떡 일어나 찻주전자로 향하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물이 뜨겁습니다. 그대로 만지면 다쳐요.”
“아…….”
생각지 못한 배려에 놀라서 눈을 껌뻑이는 사이 오르카 황자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찻주전자 밖으로 흐른 물을 닦아냈다.
“아, 안 돼요! 황자님이 이런 일을 하신다니요. 제가 할게요.”
“사실 남작 부인이 할 일도 아니죠. 조용히 차를 마시고 싶다며 사람들을 물린 건 나니까 내가 수습하지요.”
오르카 황자는 꿋꿋했다. 손에서 손수건을 강제로 뺏을 수도 없는 일이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어느새 수습을 마친 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이상하네. 귀부인들은 날 보통 편하게 여기는데…… 유독 남작 부인만 날 이렇게 어려워한다니까요. 도대체 왜 그럴까.”
부드러운 웃음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오르카 황자는 동부 회합에서도 이런 식으로 나를 떠본 적이 있었다.
“제가 조금 소심한 성격이라서……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
“그런 분께서 에일스포드 남작과 결혼한 건 조금 의외네요. 사실 누구보다 사람을 어렵게 하는 인상인데.”
다소 뚱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슬쩍 흘러나왔다. ‘누구보다 사람을 어렵게 하는 인상’이라니. 알테어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잘 어울리는 표현이 어디 있을까. 동부 회합에서 마주쳤던 오르카 황자에게서는 묘한 벽이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오늘 그에게서는 묘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소심하게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조금 열렸다.
“상대의 얼굴을 봤다면 결혼 안 했을지도 몰라요.”
당시의 나는 소설에서 묘사된 비극을 피하고자 어떻게든 수도를 벗어나려고 했었다. 상대가 소설 속의 악당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이 결혼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도 남작은 부인을 많이 아끼는 것 같습니다.”
“네. 저를 많이…… 배려해주고 있어요.”
때로는 나를 모든 일에서 배제한다고 느껴질 만큼 넘치는 배려를 하고 있지.
“남작 부인?”
대답하며 어두워지는 내 안색을 느꼈는지 오르카 황자가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손님 앞에서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 귀부인의 소양이 아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아하고 여유로운 남작 부인!’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애써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차가 다 우러났을 거예요. 따라드릴게요.”
오르카 황자는 찻잔을 채우는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르카 황자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조금 독특한 것을 대접하고 싶어서 수색이 푸른빛을 내는 차를 선택했는데, 그 점이 제대로 그의 흥미를 끈 것 같았다.
“물이 넘치는 바람에 평소처럼 자신 있는 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수색과 향이 좋은 차라 색다른 느낌이 있으실 거예요.”
“가나트 지방의 찻잎을 썼군요.”
“알고 계신가요?”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가나트 지방의 차는 훗날 사교계에 크게 유행하지만, 지금은 숨겨져 있는 명물이었다.
‘덕분에 싼값에 차를 들여올 수 있어서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그런데 그 숨겨진 명물을 오르카 황자가 이미 알고 있다니?
“아. 난 요양을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편이라서요. 가나트 지방에도 머무른 적이 있답니다. 그때 영주가 대접했던 차가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죠.”
“그러셨군요.”
소설 속에서도 확실히 묘사되기는 했었다. 오르카 황자가 순식간에 정국을 장악한 비결이 이 요양 기간에 수집한 인재와 정보라고 말이다.
‘이래서 견문이 넓은 게 중요하구나.’
내가 감탄하는 사이 오르카 황자가 차를 마시며 향을 음미했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리는 게 보였다.
“이렇게 산뜻한 차는 찾기 힘들지요. 수색이 독특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비흐람 지방의 차도 비슷한데, 드셔본 적이 있을까요?”
“비흐람……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요.”
가나트 지방의 차가 숨겨진 명물이라면, 비흐람 지방의 차는 이미 스타 중의 스타라고 할 수 있었다. 가격이 비싸기도 하지만, 시중에 풀린 물량이 워낙 적어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물량 대부분은 황실로 가장 먼저 들어가기 때문에 평범한 귀족들은 이 차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 그렇다면 제가 조금 나눠드리지요. 마침 얼마 전에 비흐람에 다녀와 가지고 있습니다.”
“네? 그 귀한 차를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불청객에게 과분한 대접을 해주셨으니 그렇게라도 보답해야지요.”
“보, 보답이라니요! 전하를 대접하는 건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하하.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안 믿는 편이라. 보답은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져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확실히 오르카 황자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는 힘이 있다고나 할까?
‘새,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가?’
그를 단단히 ‘악당’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거나, 나의 경험을 줄줄 늘어놓게 되었다. 상대가 잔뜩 경계심을 품고 있던 소설 속 악당이라는 것도 어느새 희미해져 나와 오르카는 몇 번이나 따뜻한 물을 보충하며 차와 다과를 나누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 상대는 오랜만입니다. 내일은 내가 주기로 약속한 비흐람 차를 함께 마시면 어떨까요?”
오르카 황자가 떠나는 날까지 그가 알테어와 마주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둘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이런 제안을 해오다니. 아주 운이 좋았다. 나는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왜인지 등 뒤가 서늘해졌다.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오르카 황자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뭔가 있나요?”
“아뇨.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한 기분에 목덜미를 매만지자 오르카 황자가 내 등 뒤로 시선을 던지며 묘한 침음을 흘렸다.
“글쎄요.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분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분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 머릿속에 불확실한 존재의 검은 형체가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전하.”
심각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자 오르카 역시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혹시……?”
“유령을 보시나요?”
“네……?”
진지한 나의 질문에 잠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오르카 황자가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유령이요?”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를 기세로 크게 웃는 황자를 보며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노, 농담이었어요…….”
소심하게 변명해보았지만, 워낙 진지하게 물었던 터라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오르카 황자는 거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애써 웃음을 삼키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질투심 강한 유령이 남작 부인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 같긴 하네요.”
“유, 유령 이야기는 농담이었다니까요…….”
“음. 저는 농담이 아닌데요?”
오르카 황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턱짓으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나를 놀리려는 게 분명한 행동에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날 비웃는 건 상관없지만,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반편이더라’라는 이야기가 퍼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니 오르카 황자가 큭큭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정말로 남작 부인이 좋아지네요. 이건 정말 생각지 못한 전개인데…….”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소리라 무어라 대답하기도 애매했다.
‘사실은 오르카 황자가 생각했던 전개가 뭔지 궁금한데…….’
묻는다고 순순히 답해줄 리도 없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 오르카 황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귀부인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돌아가는 길은 내가 에스코트하지요.”
“아, 아니에요! 전하께 어떻게 그런 일을 맡기겠어요.”
“귀부인을 에스코트하는 건 신사의 의무인데요. 황자는 신사가 아닌가요?”
“그건 아니지만…….”
오르카 황자가 절대 물러날 기색이 아니라,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설 속의 레이디들이 오르카 황자를 보며 꺅꺅댔던 이유를 좀 알겠어.’
그는 사람의 호감을 사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나같이 소심하고, 그를 경계하고 있던 사람의 마음까지 건드릴 정도이니,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이야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르카 황자를 바라보자 그가 특유의 부드럽고 다정한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이게 활자로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사르르 녹여내는 미소’라고 표현되었었지. 활자가 현실이 되는 순간을 보는 건 언제든 놀라운 일이다. 신기한 마음에 입을 살짝 벌리며 오르카 황자의 미소를 빤히 바라보는 순간, 뒤에서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멀쩡했던 나무가 처참하게 두 동강 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 갑자기 왜…….”
“질투심 많은 유령이 분을 못 이겨서 나무를 발로 찼거든요.”
“네에?”
오르카 황자는 끝까지 나를 놀릴 셈인가 보다.
‘하지만 나도 쉽게 넘어가진 않는다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쓰러진 나무에서 고개를 돌렸다.
‘묘목을 들여올 때 병든 녀석이 섞여 있었던 거겠지.’
당장 상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불량품을 보냈다며 항의해야겠다.
“유령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어서 자리를 떠나도록 할까요.”
병든 나무가 더 있어서 우르르 쓰러진다면 상당히 위험할 것이다.
‘에일스포드의 정원에서 황자가 쓰러진 나무에 맞아 다친다면…….’
생각도 하기 싫은 사고다. 내가 정원을 떠나는 것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오르카 황자가 자연스럽게 나를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확실히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에스코트였다. 그렇게 정원을 벗어나자마자 등 뒤에서 우지끈, 쿵, 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나쁜 상인 같으니라고.’
이렇게 불량 나무를 많이 납품하다니!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