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런 걸 먹고 힘이 나?2021.12.05.
다음 날에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파벨을 불렀다. 좀처럼 그를 소환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파벨은 뭔가 중요한 문제가 생긴 것인가 싶어 심각한 얼굴이었다. 파벨의 짐작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라 나도 조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어제 정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써둔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편지로군요?”
“네. 우리 정원에 묘목을 납품한 상인에게 보내려고요.”
“그 사람에게는 왜…… 묘목을 추가로 주문하시려고요?”
파벨이 편지를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원은 막 정비가 끝난 참이라, 새로 묘목을 주문할 필요가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아뇨. 그 사기꾼에게 앞으로 묘목을 주문할 일은 없을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정원에 있는 나무도 전부 가져가라고 하고 싶은걸요.”
분명히 파벨, 정원사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오는 묘목을 꼼꼼하게 점검했는데. 어떻게 혼자 픽 쓰러지기나 하는 불량한 나무가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상인이 교활하게 우리를 속인 거야.’
내가 강경하게 분노를 표현하자 파벨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파벨. 아직 정원을 못 봤군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파벨을 창가로 이끌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볼품없이 쓰러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저게 갑자기 왜…….”
파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창밖으로 몸을 빼서 쓰러진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쓰러진 모양이 조금 부자연스러운데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망가뜨린 게 아닐까요?”
“아니에요. 어제 황자님과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나무가 쓰러지더라고요. 상인이 병든 나무를 납품한 게 틀림없어요.”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유령이 한 짓이겠지.’
공감을 바라며 파벨에게 한탄을 쏟아냈지만, 돌아온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 어제 황자님과 차를 마시셨습니까?”
“어어…… 지금 그 이야기가 중요한 타이밍이었어요?”
“정원에서요? 복도에서 영주님과 그렇게 헤어지신 후에요?”
파벨이 의아해하는 나를 앞에 두고 연신 질문을 던졌다. 나는 도대체 파벨이 왜 이러나 하는 의아한 마음을 안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원에 갔더니 황자님이 계셔서…….”
“아아.”
내 대답에 파벨은 엄청난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속 시원한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어제 영주님께서 그렇게 뚱한 얼굴로…….”
“영주님? 알테어가 왜요?”
갑자기 왜 여기서 알테어 이야기가 나오지?
“아닙니다. 그럴 만한 일이 조금…….”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향해 파벨이 황급히 말을 수습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나무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묘목에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니 상인에 대한 화도 푸시고요.”
파벨이 내가 건넨 편지를 눈에 띄게 어색한 태도로 만지작대다 품 안에 집어넣었다. 덕분에 나는 더욱 의아해졌다.
“묘목에 문제가 없었다뇨? 그걸 이렇게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안다고요?”
파벨이 그렇게까지 식물에 해박했던가? 물론 파벨은 여러모로 잡다한 지식이 많아서, 정원을 꾸밀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쓱 쳐다보는 것만으로 묘목의 문제를 알아차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 네에…… 뭐어…….”
감탄해서 눈을 반짝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파벨이 헛기침을 했다.
“우선 부러진 나무는 새로운 녀석으로 교체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점심은 영주님께서…….”
“마님.”
파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시간에 맞춰 모시러 오셨다고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파벨과의 이야기가 예상보다 길어져 시간이 많이 흐른 줄도 몰랐다.
“지금 바로 나갈게, 마리!”
나는 마리에게 대답하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시간에 맞춰 준비는 해두었기에 마지막 점검 정도의 의미였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며 몸을 돌리자마자 어색하게 자리에 선 파벨을 발견했다.
“아. 그렇지. 파벨, 뭔가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아…… 점심 약속이 있으신 거로군요?”
파벨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내게도 들리는 것 같았다. 에일스포드에 남작 부인과 점심을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일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황자님과 함께 식사하려고요.”
나는 그가 더는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도록 재빨리 답을 알려주었다.
“어제 티타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약속을 잡았거든요. 귀한 찻잎을 나눠주신다고 해서요.”
“그렇군요…….”
“네. 손님이 오셨으니 안주인으로서 식사 대접을 한 번은 해야 하고…… 겸사겸사 점심을 함께하고 티타임을 갖기로 했죠.”
“아아…… 일이 그렇게…….”
파벨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파벨?”
사정이 있다면 말해보라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파벨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마님의 일정을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일을 벌여둔 게 있어서…… 제가 잘 수습하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내가 도울 수 있다면 같이 수습할게요.”
“음…… 아닙니다. 지금은 황자 전하를 대접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네에…….”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건지 파벨이 명확하게 결론을 내려주었지만, 난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찜찜하게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파벨이 괜찮다는데 계속 캐묻는 것도 그렇고…….’
나는 포기한 채 방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미소의 오르카 황자가 나를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요청에 손을 포개며 슬쩍 뒤를 바라보니 파벨이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걸 어떡한담.’
파벨은 오르카 황자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젯밤. 에일스포드에는 매우 은밀하게 제2회 대책 회의가 소집되었다. 알테어와 나디아의 사이에 찬 바람이 부는 것을 본 파벨이 주도하여 소집한 회의였다. 참석자는 파벨과 주방 식구들이었다.
‘마님과 영주님께서 화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자리를 마련해봅니다. 마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수도 음식을 중심으로 한 정찬을 준비하면 어떨까요?’
파벨의 제안에 주방 식구들은 의기투합했다. 밤을 꼬박 새워 수도 귀족들이 주로 먹는다는 음식을 연구하고 만들었다.
‘이 정도면 마님께서도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알테어에게도 시간에 맞춰 연회장으로 오라고 전달해두었는데, 정작 나디아의 일정을 생각지 못했다.
‘마님께 다른 약속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문제의 오르카 황자와 점심 식사라니. 알테어가 알면 심기가 불편할 것이 뻔했다.
‘이번에는 나무를 부러뜨리는 걸로 안 끝날걸.’
파벨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바닥에 널브러진 나무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날, 알테어는 파벨의 재촉에 나디아의 뒤를 밟았다. 아마 정원에서 오르카 황자와 나디아가 다정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분해서 나무에다 화풀이한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생각보다 빨리 집무실로 돌아와서는 뚱한 얼굴을 하고 계셨지.’
그 얼굴만 봐도 제대로 화해한 게 아닌 듯해서 사정을 길게 묻지 못했는데, 오늘 나디아와의 대화를 통해 이유를 알게 됐다.
‘우선 영주님이 연회장으로 가기 전에 일정이 달라졌다고 알려야겠군.’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파벨은 서둘러 알테어의 집무실로 향했지만, 이미 그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집무실을 정돈하는 사용인을 붙잡고 상황을 물었더니 알테어가 이미 연회장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고.’
파벨은 꼬여버린 상황에 한숨을 내쉬며 한달음에 연회장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알테어가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둔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람이 들어서는 기척에 슬쩍 시선을 돌렸던 알테어가 파벨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 대단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너와 식사를 하라고?”
“그게…… 그럴 계획은 아니었지만…….”
파벨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디아가 앉았어야 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나 하시죠. 저랑 먹는 점심이 싫은 건 아니시겠죠?”
연회장에서 집사와 마주하고 식사하는 영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지만, 알테어는 그런 부분에서는 까다롭게 굴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파벨은 평범한 사용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더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지하게 점심 식사에 초대하더니. 결국 같이 밥이나 먹자는 거였냐.”
알테어가 맥빠진 얼굴로 헛웃음을 흘리며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눈으로 훑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너…… 이런 음식을 좋아했냐?”
“이런 음식이라니요?”
“고상한 귀족들이나 먹을 것 같은 음식인데.”
알테어가 애피타이저로 준비된 샐러드를 포크로 헤집으며 뚱한 얼굴을 했다.
“이런 걸 먹고 힘이 나긴 하냐?”
“뭐. 그런 모양이던데요.”
파벨이 나디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아는 평소에도 가벼운 식단을 즐겼다. 식사때마다 늘 고기를 찾는 알테어와는 식성이 완전히 달랐다.
‘그러고 보면 정말 다른 게 많지.’
식성도, 성격도 모두 정반대였다.
‘그런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으니…… 순탄할 리가 없지.’
파벨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알테어가 ‘이런 거’라고 표현한 샐러드를 먹어보았다.
‘음.’
인정하기는 싫지만, 영주님의 말처럼 이런 걸 먹고 힘이 나는 건가. 마님의 식성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뼛속까지 동부 사람인 두 남자는 수도의 고상한 음식을 앞에 두고 어색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정말로,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식사였다. ***
“남작 부인?”
“아.”
나는 오르카의 부름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햇살 좋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정신이 계속 다른 곳으로 흘렀다. 떠나기 전 보았던 파벨의 얼굴이 계속 떠오른 탓이었다.
‘분명히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는데…….’
파벨이 그렇게까지 고심하며 꺼낼 이야기라면 알테어에 관한 이야기였을 테고…….
“몸이 안 좋으신가요?”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무는 와중에 오르카 황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 손님을 대접하는 건 큰 실례가 아닌가?
‘계속 이렇게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을 할 거라면…….’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죄송하지만, 식사는 다른 날 다시 대접해도 될까요?”
손님을 대접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엄청나게 큰 실례였지만, 내내 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오르카 황자는 오히려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선뜻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입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방까지 에스코트하지요.”
“괜찮습니다. 음식은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니 부디 끝까지 식사를 즐겨 주세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오르카 황자가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하고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음식을 내어오던 사용인이 자리를 떠나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붙잡고 작게 속삭여 파벨의 위치를 물었다.
“지금 집사는 어디에 있어?”
“아마 연회장에 계실 겁니다.”
“연회장? 거기에는 왜?”
“영주님과 식사를 하시는 중이라고 들었는데요…….”
사용인의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파벨이 나와 알테어의 식사 자리를 마련한 거였구나! 머리가 딩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