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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너무 힘이 나서 문제. (88/170)

54화. 너무 힘이 나서 문제.2021.12.08.

연회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품위 없이 달릴 수는 없어 잰걸음으로 빠르게 걷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름대로는 엄청나게 속도를 내는 거였다. 좀처럼 서두르는 일이 없는 사람이 황급히 걷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복도를 청소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놀라서 인사하며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들의 시선을 흘려보내고 연회장 앞에 도착하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16551109626183.png‘하나, 둘, 셋…….’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연회장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리자 내부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테이블에 보기 좋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알테어와 파벨이 마주 앉아 단란하게 식사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등장에 식기를 놀리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지는 것이 보여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16551109626183.png“식사를…… 어어……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구에 선 채 우물거리고 있으니 파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테이블 앞으로 안내했다.

16551109626194.png“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마님. 식기는 새로 내어오겠습니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파벨의 말을 따라 자리에 앉자 그가 능숙하게 자신이 쓰던 식기를 거두어가며 시중을 들던 사용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16551109626183.png“아니…… 식사하던 걸 내가 방해하는 건…….”

파벨의 자리를 뺏은 것 같아 미안해져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니 그가 드물게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1109626194.png“방해라뇨. 오히려 절 구제해 주신 거지요.”

파벨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빠르게 식기가 새로 준비되었다. 조금 전까지 파벨이 먹고 있던 샐러드도 새로 내어왔다. 다소 정신없이 식사 준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던 건지 알테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말다툼 끝에 어색하게 등을 돌린 후 처음 마주하는 남편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정답을 찾지 못한 것은 알테어도 마찬가지인지 무거운 침묵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16551109626194.png“그럼 두 분, 맛있게 식사하십시오. 차례로 음식을 내어오겠습니다.”

파벨이 인사하고 연회장을 떠나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이며 연신 알테어의 눈치를 살폈다. 어딘가 심통이 난 얼굴로 샐러드를 먹고 있는 알테어를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뭐든 이야기해 침묵을 깨트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적당한 화제를 떠올렸다.

16551109626183.png“나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샐러드를 먹던 알테어의 손이 멈췄다.

16551109626183.png“나무가 부러졌어요. 정원에 있는 나무요. 갑자기 혼자서 쿵 쓰러졌는데, 병에 걸린 나무가 아닐까 싶어요.”

16551109626216.png“……병에 걸린 나무?”

알테어가 다소 찜찜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그와 어떻게든 대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에 안도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저런 표정인 걸 보면 역시 알테어도 묘목을 납품한 상인이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16551109626183.png“파벨은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장담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나무가 갑자기 혼자 쓰러질 리가 없잖아요.”

16551109626216.png“……그렇지. 나무가 갑자기 혼자 쓰러지지는 않지.”

알테어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하며 동의했다. 무슨 말이든 명확하게 하는 알테어답지 않은 반응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16551109626183.png“모두 신경 써서 고른 나무인데 이렇게 되어서 속상해요. 묘목을 하나하나 눈으로 보면서 골랐거든요.”

16551109626216.png“……그랬군.”

16551109626183.png“네. 정말로 신경을 많이 썼는데…… 병든 나무일 줄이야…… 제가 꼼꼼하게 살피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한숨을 푹 내쉬자 알테어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분위기를 풀어보겠다며 꺼낸 이야기인데 오히려 알테어의 근심을 더한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이야기를 덧붙였다.

16551109626183.png“파벨이 수습해 주기로 했어요! 정원이 망가진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16551109626216.png“아니, 그게 아니라…….”

침묵을 고수하던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16551109626216.png“그 나무, 내가 부러뜨린 거야.”

16551109626183.png“네?”

16551109626216.png“그…… 내가 부러뜨린 거라고. 병에 걸리거나 한 건 아니니까, 네가 실수한 건 없어.”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지만, 나는 빠르게 정신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16551109626183.png“나무를 왜…….”

16551109626216.png“…….”

알테어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모습이 제 잘못에 대한 변명을 찾으려는 어린아이의 행동과 비슷하게 느껴졌다면 착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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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09626216.png“훈련을…… 하다가…… 발차기가 빗나가서…… 나무에 그만.”

16551109626183.png“…….”

16551109626183.png‘세상에.’

지적할 곳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지적해야 하나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왜 그 시간에, 왜 정원에서, 왜 훈련을 했으며, 몸 쓰는 일은 당해낼 자가 없는 알테어가 왜 발차기 하나 못해서 목표가 빗나갔는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의문들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결국 알테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16551109626216.png“……봤어.”

16551109626183.png“네?”

16551109626216.png“봤다고. 네가 황자와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거.”

16551109626183.png“어어…….”

16551109626216.png“등 돌리고 떠나버린 내 아내가 다른 놈과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는 걸 봤더니 화났어. 그래서 애꿎은 나무에 화풀이한 거야.”

알테어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서서히 입이 벌어졌다.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이는 나를 보며 알테어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16551109626216.png“그렇게 신경 써서 고른 나무인 줄 알았다면 다른 데다가 화풀이할 걸 그랬군. 미안하다.”

16551109626183.png“아니…… 전 사과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진지한 얼굴로 고개 숙인 알테어의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16551109626183.png“푸흡.”

사과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웃음을 터트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아 보려고 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웃음이 터져나갔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리자 알테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제대로 웃음이 터졌다.

16551109626183.png“하핫.”

도대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알테어의 얼굴이 점점 의문으로 물들어, 나는 겨우 웃음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16551109626183.png“그냥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잖아요. 나무가 이상한 거라고,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걸 솔직히 다 말해요?”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면 나는 끝까지 진실을 몰랐을 거다. 그렇다면 알테어는 자신의 체면을 지킬 수 있었을 터. 하지만 그는 내가 실수했다며 탓하는 걸 보고는 자신의 체면이 상하는 걸 감수하고 내게 진실을 말해 줬다. 이게 알테어가 가진 다정함 아닐까? 그런 알테어식의 제멋대로 다정함에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어쨌든 그가 나쁜 마음으로 날 대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풀어진 마음으로 테이블을 보니 그제야 차려진 음식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수도 귀족들이 즐겨 먹는 식단으로, 알테어가 선호하는 동부식과는 거리가 먼 음식들이었다.

16551109626183.png“식사도 일부러 내게 익숙한 걸로 준비한 거죠? 화해하고 싶어서?”

16551109626216.png“아. 이건 내가 준비한 게 아니라 파벨이…….”

16551109626183.png“그것도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다시 웃음을 터트리자 알테어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16551109626216.png“나디아.”

알테어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웃음이 뚝 멎었다.

16551109626216.png“난 누군가에게 맞춰 사는 게 익숙하지 않아. 언제나 혼자였고, 명령하는 게 익숙하고, 다들 그걸 당연하게 여겼어. 하지만 이제 달라져야겠지. 이해했어. 아니,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 같군.”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으니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09626216.png“그러니 내가 틀린 행동을 한다면 지금처럼 화를 내. 난 네가 화낸 이유가 뭔지 고민하고, 정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겠지. 그러다 보면 서로가 원하는 부부의 모습에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해.”

서로가 원하는 부부의 모습이라.

16551109626183.png“사실 나도 모르겠어요. 어떤 부부가 되고 싶은지 같은 건요. 그냥 당장은…… 알테어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게 전부예요.”

바인 후작가 사람들은 날 귀찮은 짐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을 것 같았다. 알테어도 반길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16551109626216.png“넌 이미 짐이 아닌데?”

16551109626183.png“하지만…….”

16551109626216.png“게다가 부부라면 한쪽이 상대의 짐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너처럼 작은 짐은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어.”

16551109626183.png“자, 작다뇨! 그렇게 작지 않거든요?”

16551109626216.png“작은데.”

알테어가 자신의 몸집과 내 몸집을 눈대중으로 비교하며 확신에 차서 말했다.

16551109626183.png“물론 알테어와 비교하면 작지만, 전 그냥 평범한 수준이라고요.”

16551109626216.png“그렇다면 너처럼 평범한 짐은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다고 하면 되나?”

16551109626183.png“그게 아니라……!”

발끈해서 식기를 꽉 쥐니 이번에는 알테어 쪽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나는 크게 부푼 풍선에서 푸슈슈 바람이 새어 나가는 것처럼 감정이 쪼그라들어 눈을 껌뻑이며 알테어가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알테어가 이렇게 웃는 건 드문 일이기에 그 모습을 눈에 담는 게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16551109626216.png“어떤 경우에서든 네가 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야. 네가 열심히 노력하려는 게 자기만족이라면, 그래, 좋아. 하지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는 거라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는 게 나의 만족이라면, 결국 같은 이야기 아닌가? 차마 말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테어가 다시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16551109626216.png“그리고 이런 풀 말고 고기를 많이 먹는 건 어때? 이런 걸 먹고 힘을 낼 수는 있나?”

16551109626183.png“충분히 힘이 나요. 게다가 어차피 알테어가 과보호하는 바람에 힘든 일은 하지도 못하는데, 여기서 더 힘을 내서 뭐 해요?”

16551109626216.png“힘을 내서 뭐 하긴. 그거야…….”

16551109626183.png“그거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던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묘한 열기가 담겨 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다음 요리가 나왔다. 이렇게 순서에 맞춰 식사하는 것도 수도 귀족들의 문화였다. 동부 귀족들은 한 번에 모든 요리를 내어 식사를 즐기곤 하니까 말이다. 순식간에 묘했던 공기가 흩어졌다. 나는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에 속으로 숨을 고르며 다음 요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음식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사레가 들어 콜록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16551109626183.png‘저, 저건!’

수도에서 남자의 힘에 좋다며 소문이 나 대유행 중인 생선 요리!

16551109626183.png‘저걸 먹고 효과(?)를 봤다면서 많은 귀족들의 생생한 후기가 사교계를 떠돌고 있다던데…….’

의도가 뻔히 보이는 요리였지만, 알테어는 그것을 전혀 모르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생선을 뒤적거렸다.

16551109626216.png“이것 봐. 생선이라니. 겨우 이런 걸 먹고 힘이 나냔 말이야.”

16551109626183.png‘너, 너무 나서 문제일걸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생선 살을 발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용히 지나갈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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