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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이건 아무도 못 참아. (89/170)

55화. 이건 아무도 못 참아.20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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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 식사 이후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날이 저물었다. 늘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이 평소보다 빠르게 지나갔을 리는 없고, 이토록 빠르게 날이 저물었다고 느낀 건 온전히 내 기분에 따른 문제였다. 나는 따뜻한 물로 목욕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조금 나른해진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마리는 자연스럽게 머리의 물기를 털어낸 뒤 부드럽게 빗질을 시작했고, 안나는 향이 좋은 초를 구해와 방을 은은하게 밝혀주었다.

16551109897995.png‘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지 않았는데…….’

역시 다 알고 준비한 거겠지?

16551109897995.png‘점심 식탁에 오른 그 생선도 그렇고.’

나와 알테어의 사이가 냉랭한 것을 보고 사용인들이 합심해 작전을 짠 모양이었다.

16551109897995.png“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민망한 기분에 거울 너머로 마리와 안나를 보며 중얼거리자, 두 사람이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1655110989801.jpg“저희가 뭘요? 전 그냥 머리를 빗어드리고 있을 뿐이에요.”

16551109898015.png“전 그냥 침구를 정리하고 있을 뿐이고요!”

언제 이렇게까지 친해진 건지, 마리와 안나가 죽이 척척 맞아 대답했다. 두 사람이 합심한다면 절대 이겨낼 자신이 없다.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비죽이는 날 보고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1655110989801.jpg“그런데 얼굴이 좀 붉게 달아오르신 것 같네요.”

머리를 빗겨 주던 마리가 체온을 가늠하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에서 살짝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16551109897995.png“점심 식사에 그런 요리를 올리니까 이런 거잖아.”

1655110989801.jpg“그런 요리요?”

16551109897995.png“그…… 보양에 좋다는 생선 요리 말이야. 수도에서 유행하는 음식이니 마리가 알려준 거 아냐?”

1655110989801.jpg“아. 무슨 음식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알려준 게 아닙니다.”

16551109897995.png“응?”

그럼 동부 출신의 요리사들이 어떻게 알고 그 요리를? 당연히 마리가 알려준 거겠지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의아함에 눈을 껌뻑이자, 마리도 상황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1655110989801.jpg“아마 주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게 아닐까요? 마님이 좋아하실 만한 음식이 뭔지, 수도에서 어떤 음식이 유행하는지…… 아마 ‘그런 목적’에 대해서는 모르고 준비한 것 같았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날 위해 낯선 수도 음식에 대해 고민하며 열심히 연구했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괜히 가슴이 따뜻해졌다. 슬쩍 미소를 지으니 마침 빗질을 마친 마리가 나를 침대로 이끌며 작게 속삭였다.

1655110989801.jpg“물론 저는 ‘그런 목적’을 알고 있으니 겸사겸사 분위기를 맞춰 보는 거고요.”

16551109897995.png“마, 마리!”

화들짝 놀라서 마리의 등을 살짝 두드리자 그녀가 드물게 키득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1655110989801.jpg“저희는 방해되지 않도록 일찍 물러나 있겠습니다. 혹 필요한 게 생기면 설렁줄을 당겨주시고요.”

아마 일을 치르고 난 뒤 목욕이 하고 싶으면 개의치 말고 자신을 불러 달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16551109897995.png‘보통은 피곤해서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지만…….’

혹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가 안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혼자 남으니 고요함을 넘어 서늘한 침묵에 괜히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을 매만지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맴돌기도 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러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알테어가 일정을 마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어쩐 일인지 복도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사람을 불러 알테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금세 접었다.

16551109897995.png‘너무 재촉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이대로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16551109897995.png‘그럼 내가 찾으러 가면 되잖아.’

나는 빠르게 찾아낸 해답에 만족하며 드레스룸에서 외투를 찾아 잠옷 위에 걸쳤다. 잠옷에 외투라니. 조금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누구와 마주칠지도 모르는 복도를 몸이 훤히 드러나는 잠옷 차림으로 활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옷을 갈아입는 것도 힘들고 말이다. 나는 잠옷이 보이지 않도록 외투의 허리끈을 꼼꼼하게 묶었다. 거울을 보니 시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낑낑댄 탓에 어설픈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당히 민망하지 않은 차림새는 완성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깊은 밤인데도 복도 곳곳에는 불이 밝혀져 환했다. 바닥에는 단순하지만 신경 써서 짠 문양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창문의 유리도 투명하게 반짝거려 외부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16551109897995.png‘처음 에일스포드에 왔을 때는 복도를 걷는 것도 힘들었는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걷기 위해 벽을 더듬다가 알테어의 몸을 더듬는 바람에 어찌나 놀랐던지. 겨우 몇 달 전 일인데 마치 몇 년이나 지난 듯 아득한 기억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1109897995.png‘그땐 몰랐어. 이렇게까지 이곳에 익숙해질 줄을.’

단순히 도망치듯 결혼했고, 신랑이 악당 알테어라는 사실에 절망했고, 모든 사실이 두려워 덜덜 떨기만 했었다. 그때의 나디아에게 지금의 너는 이렇다-고 알려준다면, 아마 절대 믿지 못할 거다. 음산했던 에일스포드 성이 이렇게 밝아졌다는 것 역시 믿지 못할 테고. 나는 새삼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며 알테어의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알테어가 침실로 오지 않았다면 당연히 남은 업무를 처리하는 중일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집무실에 다다르기 전, 복도에 난 창밖으로 알테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환하게 밝혀진 복도와 달리 정원에는 은은한 조명만 깔려 있어 사람의 모습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까지는 어려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알테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 에일스포드에서 알테어처럼 큰 체격을 가진 남자는 없으니까 말이다. 단순히 체격 때문에 알테어를 알아본 건 아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반듯한 자세로 걷는 모습만 봐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창문에 바짝 붙어 알테어의 모습을 관찰했다. 어두운 정원에서 그가 이리저리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16551109897995.png‘뭐 하는 거지?’

아무리 살펴도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정원에 나가 보기로 했다. 실내화를 신은 상태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마리나 안나가 신발을 더럽혔다며 날 탓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16551109897995.png‘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엄청난 변화야.’

바인 후작가에 있을 때는 무슨 행동을 하든 질책이 날아왔고, 나 역시 그 사실에 잔뜩 쫄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서는 뭘 하든 모두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겨 정원의 입구에 다다르자, 복도의 창문 너머로는 잘 보이지 않던 알테어의 모습이 조금 자세하게 파악되었다. 알테어는…….

16551109897995.png‘나무를 심고 있잖아?’

부러진 채 엉망이 된 나무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멀쩡한 나무가 세워져 있었다. 알테어는 나무 앞에서 삽을 든 채 바닥을 열심히 다지는 중이었다. 얼마나 그 행동에 열중했는지 하얀 셔츠에 흙이 묻은 채로 내가 온 것도 모르는 듯했다.

16551109947232.png“가지가 이런 모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알테어가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나무를 살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새롭게 심은 나무가 내가 처음에 고심하며 골랐던 녀석과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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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09897995.png‘설마 내가 나무가 망가진 걸로 우울해해서…….’

그래서 직접 나서서 나무를 복구 시켜 준 건가? 최대한 비슷한 나무를 찾아내서? 아랫사람들에게 시켜도 됐을 텐데. 아니, 이미 파벨이 자신이 수습하겠다며 말까지 했는데.

16551109897995.png‘왜 남작이 직접 이런 일을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에일스포드에 일거리가 많아져 신경 쓸 것도 많은데! 고맙고, 미안하고. 복잡한 감정이 속에서 몰아쳤다. 머리가 복잡한 생각으로 꽉 채워진 탓에 몸이 먼저 의지를 갖고 움직였다. 나는 정원을 척척 가로질러 나무 심기에 열중하고 있는 알테어 앞으로 걸어갔다. 그 소리에 열중하고 있던 알테어도 내 존재를 알아챈 건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16551109947232.png“나디아? 아직 잠들지 않았나?”

그는 태평하게 내가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16551109897995.png‘점심 때 그런 음식을 먹여 놓고 태평하게 잠자는 부인이 어딨겠어!’

나는 그렇게 소리치는 대신, 엉망이 된 알테어의 몰골과 예쁘게 자리를 차지한 나무를 번갈아 보았다. 무언의 시위에 알테어가 내 심정을 알아챈 건지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16551109947232.png“어쩐지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서 뭐든 하고 싶었을 뿐이야. 덕분에 업무도 일찍 마무리했고. 딱히 무리해서 한 거 아니니까…….”

16551109897995.png“그 남아도는 시간을 왜 이런 데에다가 써요?”

16551109947232.png“네가 신경 써서 고른 나무를 망가뜨렸으니까 내가 수습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날 보며 말하는 알테어는 내 반응이 의외라는 눈치였다.

16551109947232.png“나무를 복구해 두면 네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16551109897995.png“난 나무가 망가진 것보다 알테어가 이런 걸로 일거리를 늘리는 게 더 속상해요.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아서 바쁜데…… 왜 이런 걸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알테어의 팔을 잡아끌었다.

16551109897995.png“일이 일찍 끝났으면 얼른 침실로 돌아와서 쉬어야죠!”

순순히 내 손길에 끌려와 알테어와 내 거리가 순식간에 확 좁혀졌다. 순간 그가 화들짝 놀라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뒤로 살짝 밀어냈다. 그 가벼운 손길에 내 몸은 맥없이 뒤로 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실내화가 벗겨지는 바람에 뒤로 중심을 잃어 바닥에 쿵 엉덩방아까지 찧고 말았다. 당황하고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고개를 들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무표정한 얼굴 위로 당황스러운 기색을 뿜어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16551109947232.png“괜찮은가?”

알테어가 가볍게 나를 안아 일으켜 세우고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가 다시 굳어진 채로 내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숙이자 단단히 묶어두었다고 생각했던 허리끈이 풀려 앞섶이 훤히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가벼운 잠옷 차림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잃은 알테어의 얼굴을 보니 마치 여고 앞에 출몰해 외투를 활짝 벌려 알몸을 자랑하는 노출증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16551109897995.png“자, 자려다가 나온 거라서…….”

나는 허둥대며 외투를 다시 수습하려고 했지만, 다급한 손길에 마음처럼 끈이 잘 묶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끈을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알테어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 뒤 내게 바짝 다가와 허리끈을 다시 주우려 애쓰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16551109947232.png“이건 반칙이야.”

16551109897995.png“뭐, 뭐가요…….”

16551109947232.png“이런 걸 보고 누가 참을 수 있겠냐고. 젠장. 아무도 못 참을걸.”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 낸 알테어가 그대로 허리를 숙여 내게 입을 맞춰 왔다.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깊어진 접촉에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한바탕 거칠게 입안을 헤집고 떨어진 알테어가 입술을 살짝 붙인 상태로 내게 말했다.

16551109947232.png“말했잖아. 오늘은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다고. 일부러 날 도발한 거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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