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같이 씻을까요?2021.12.15.
알테어의 경고에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옷을 헤집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거침없이 닿아오는 알테어의 손길에 놀라 움찔하며 그의 셔츠를 붙잡았다. 행동을 저지당한 알테어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으나, 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 여기서 하려고요?”
나는 불안함을 가득 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모두에게 공개된 정원이었다. 사방이 트여 있어 굳이 정원에 들어서지 않더라도 복도에서 내려다보면 누가 무얼 하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나도 복도를 거닐다 알테어의 모습을 발견하고 정원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 아닌가? 정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알테어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는 아무도 안 와.”
알테어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셔츠를 붙잡은 게 불편하지도 않은지 행동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 당당함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나는 그의 손이 예민한 곳을 쓰다듬는 감각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아, 안 돼요! 사용인들은 밤새 부지런히 움직인단 말이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성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복도를 밝히는 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사용인들은 밤새 당번을 정해 성 곳곳을 점검하곤 했다. 그들이 수상한 정원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사용인들을 왜 신경 써? 그놈들을 신경 썼다간 아무것도 못 해.”
“그, 그치만…… 이젠 예전과 달리 사용인도 많아졌고…… 또 별관에 손님도 계시니까…….”
우물거리며 몸을 틀어 알테어의 손길을 거부하자 결국 그가 한숨을 내쉬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죽을 것 같아.”
“어, 엄살은……!”
“엄살 아냐. 정말 죽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방법이 다소 거칠어도 이해해.”
알테어가 고개를 번쩍 들어 경고했다.
“뭘 이해하라는…….”
나쁜 예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묻는 순간 알테어가 흐트러져 있던 외투를 꼼꼼하게 여며준 뒤 한 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꺅!”
짐짝처럼 번쩍 들린 게 놀라 비명을 지르자 알테어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쉿!’ 하고 검지를 제 입술에 올렸다.
“조용히 해야지. 사용인들이 보면 어쩌려고?”
적절한 경고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자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와아…….’
나는 빠르게 지나가는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어찌나 알테어의 걸음이 빠른지 마차를 타고 복도를 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알테어가 단단히 나를 붙잡은 탓인지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밤에도 쉬지 않고 성을 정비 중인 사용인 몇 명과 마주쳤다. 남작 부인이 남작에게 덜렁 들려 복도를 걷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놀라웠을 텐데도 다들 프로답게 표정을 잘 수습하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주어 민망함을 덜 수 있었다.
‘그래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야.’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분명 숙소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오늘 본 광경을 속닥댈 테고, 금방 사용인들 모두 이 소란을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우리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하겠어.’
사실은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이 흐르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우릴 유난스러운 부부로 보는 게 이렇게 싫을 일인가? 아니면 기분이 상할 다른 이유가 있었나? 홀로 고민에 빠진 사이 어느새 우리는 침실에 도착했다. 알테어가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안나가 피워둔 초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너무 작정하고 분위기를 만든 것 같아 잊고 있던 민망함이 다시 몰려와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알테어도 느꼈는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보았다.
“아마 부인도 나와 같은 밤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제, 제가 시켜서 준비한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기특한 시녀와 하녀를 칭찬해야겠군.”
알테어가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가 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앉은 채로 알테어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그의 얼굴에 묘한 열기가 서려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열기가 서린 알테어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키가 워낙 큰 탓에 제자리에 선 그의 얼굴을 만지는 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모자란 거리 때문에 허공에 멈춘 손이 민망해 그대로 거두려는 찰나. 알테어가 손을 맞잡아왔다. 살짝 허리를 굽혀 맞잡은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허리를 세웠다.
“더러워.”
“네?”
“내 손 말이야. 조금 전까지 나무를 심느라 엉망이야. 하.”
알테어가 짜증스럽고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질끈 감고 붙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찬물로라도 간단히 씻고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알테어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아쉬운 듯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알테어가 멀어지기 전에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알테어를 붙잡은 나도, 내게 붙잡힌 알테어도. 서로 영문을 몰라 상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보다 먼저 움직여버린 몹쓸 손을 질책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가, 같이 씻을까요?”
“……뭐?”
“그러니까, 나도 바닥에 넘어져서 흙투성이가 됐으니까, 같이 씻으면…….”
“지금…….”
횡설수설하며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마구 쏟아내니 조금 얼빠진 듯한 알테어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슬그머니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목소리만큼이나 얼빠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네가 날 작정하고 유혹하는 거지……?”
무척이나 직설적인 질문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 그, 그런 걸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내가 맞다고 대답할 수가 있겠어요?”
이럴 때는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미덕을 발휘하면 안 되는 거야?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이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이자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을 때, 알테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달아오른 초조함만이 은연중에 느껴졌다. 알테어는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셔츠를 바닥에 툭 던지고, 뒤이어 바지가, 또 속옷이 차례로 벗겨져 나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알테어의 시선은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벗겨진 날것의 상태로 날 바라보는 알테어의 눈빛에 긴장해 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씻을 거면 옷부터 벗어야지?”
나는 긴장된 마음에 조심스럽게 외투를 벗었다. 얇은 잠옷 차림이 되니 서늘함에 몸이 떨려 어색하게 웃자, 순간 알테어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냐. 꼭 옷을 벗고 씻으라는 법은 없지.”
알테어가 또다시 나를 번쩍 안아 들며 안방에 연결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절대 내가 못 참겠어서 핑계 대는 거 아냐. 내가 고작 잠옷 벗는 그 시간을 못 참아서 이럴까 봐?”
혼잣말인지 핑계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알테어의 모습에 어느새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긴장이 풀린 몸을 알테어에게 조심스럽게 기대자 그가 움찔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아.”
“노래요? 갑자기?”
“제국군가…… 제국군가가 필요해…….”
도대체 갑자기 왜? 어리둥절해서 눈을 껌뻑였지만 알테어는 내 시선을 회피한 채 벌써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중간중간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알테어 에일스포드…… 너는 인간이다…… 짐승이 아니다…… 씻는 것까진 해야 한다…….”
***
‘으으…….’
다음 날. 나는 익숙한 느낌과 함께 아침을 맞았다. 알테어와 밤을 보낸 뒤에는 항상 이렇게 몸이 무거웠기 때문에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어제는 유독 힘들어서…….
‘으으.’
이어지는 생각에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면 아침은 훌쩍 지난 모양이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역시나 점심 무렵이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그런 생각으로 꾸물꾸물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사람이 들어섰다.
“나 씻고 싶어.”
당연히 마리나 안나겠거니 생각하고 상대를 보지도 않고 말을 걸었는데, 바로 대답이 들려와야 할 상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의아해져 고개를 돌리자 손에 쟁반을 든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서 있었다.
“정말로? 씻고 싶어?”
‘헉!’
어제 알테어에게 같이 씻자는 말을 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떠올린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알테어인 줄 몰랐어요…….”
“알아. 어제 그렇게 시달렸는데 또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리고 내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수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차도 준비해오려고 했는데 오히려 입만 버릴 것 같아서. 황자에게 대접했더니 얼굴이 아주 일그러지던데.”
“음. 알테어의 차는…….”
차마 괜찮다고 말을 할 수가 없어 말끝을 흐리자 알테어가 멋쩍은 듯 제 머리를 헤집으며 나를 재촉했다.
“됐으니까 어서 식사나 해. 풀을 담갔다 뺀 물이 뭐 그리 다르다고 그러는지 원.”
투덜거리는 알테어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서, 나는 속으로 키득대는 웃음을 참으며 빵과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역시 에일스포드의 빵은 최고였다. 첫날 알테어의 눈빛에 벌벌 떨 때에도 빵이 어찌나 맛있는지 긴장이 풀어졌던 생각이 났다.
‘이 빵을 밖에 내다 팔면 엄청나게 인기를 끌 것 같아.’
원래 세계에 있을 때는 이런 빵집 프랜차이즈가 많았으니까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흘러가듯 떠올린 생각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머릿속으로 하나둘 계획을 세워보고 있으니 알테어가 컵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오후에는 의사 선생이 올 거야. 잘 이야기 나눠 봐.”
“아. 연구에 투자하기로 한 문제 때문에요? 그건 모두 정리해서 알테어에게 보내라고 했어요. 알테어가 검토하고 지원 범위를 결정할 거라고요.”
리온과 알테어의 접점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주고자 일부러 알테어에게 연구 지원 문제를 떠넘겼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성에 대한 오해가 풀리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아. 연구 문제는 이미 마무리했어. 지원 범위도 서로 합의했고.”
“그럼 리온이 날 왜 찾아와요?”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닌데 밤새 그…… 무리를 했으니까.”
“네?”
나는 깜짝 놀라 먹고 있던 빵을 내던지듯 쟁반에 내려놓았다.
“그, 그런 문제로 왜 의사를 불러요!”
“그런 문제를 상담하라고 의사가 있는 거야. 확실히 진료해달라고 했으니까 피할 생각은 하지 마.”
“정말로 다 회복됐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의사를 불렀다간 엄살 부리는 남작 부인이라고 생각할걸.’
하지만 리온을 통해 확실히 내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민망함은 조금 참기로 했다.
‘이렇게 유난스러운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본인이 워낙 튼튼한 데다, 본인처럼 튼튼한 기사들과 주로 지내서 다른 사람의 기준을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좋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겠어! 내가 아주 평범하게 튼튼하다는 걸 말이야!’
*** 하지만 내 계획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흐음…….”
약속에 맞춰 나를 진찰하러 온 리온의 표정이 예상외로 무겁고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