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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무슨 문제일까? (91/170)

57화. 무슨 문제일까?2021.12.19.

16551110232243.jpg“월경은 일정한 편이십니까?”

16551110232251.jpg“네. 가끔 어긋날 때도 있지만 대체로…….”

16551110232243.jpg“통증은요? 심하진 않으시고요?”

16551110232251.jpg“그냥…… 평범했어요. 평소보다 기운이 없긴 하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고…….”

진지한 얼굴로 계속 질문을 던지는 리온의 태도에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턱을 매만졌다.

16551110232251.jpg“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16551110232243.jpg“아.”

진단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묻자 리온이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살짝 고개를 저었다.

16551110232243.jpg“지금으로서는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저도 확신하는 것은 아니라…….”

16551110232251.jpg“그 말은, 뭔가 문제가 있긴 하다는 소리네요?”

알테어에게 ‘나는 전혀 문제없다!’라는 걸 보여주려고 순순히 리온에게 진찰을 받겠다고 한 건데. 그의 걱정처럼 정말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건가?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마주한 리온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긁적였다.

16551110232243.jpg“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그런 겁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조금 더 자료를 찾아보고 확실해지면 말씀드리지요.”

16551110232251.jpg“……심각한 건가요?”

16551110232243.jpg“…….”

리온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확신 없이 입을 열 수 없는 이유도 짐작이 된다. 아마 그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내 몸에 큰 이상이 있다는 소리일 거다. 걱정되고 무서운 마음에 얼굴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걸 본 리온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10232243.jpg“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목숨이 위험한 병에 걸린 건 아닙니다. 제 짐작이 맞다고 해도요. 다만…….”

목숨이 위험한 병이 아니라고? 그럼 왜 이렇게까지 신중하고 심각한 반응일까? 나는 더욱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리온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제 머릿속에 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16551110232251.jpg“처음 날 치료할 땐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요. 갑자기 병이 생긴 건가요?”

16551110232243.jpg“그때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만, 워낙 큰 사고를 겪어 일시적으로 나타난 증상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기운이 쇠약한 걸 보면…… 아무튼 조금 더 자료를 찾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사가 입을 다무는데 환자가 그걸 캐낼 방법은 없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리온을 바라보았다.

16551110232251.jpg“저…… 확신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한테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알테어가 아니라요.”

16551110232243.jpg“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본인의 문제는 본인이 제일 먼저 알아야죠.”

리온은 왜 그렇게 당연한 걸 당부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16551110232251.jpg‘내겐 그게 당연하지 않았어.’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귀족 가문 여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주도할 수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귀속되고, 혼인하면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아들에게 몸을 의탁해야 했다. 정당한 가문의 핏줄이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선대의 작위와 재산도 물려받을 수 없는 입장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16551110232243.jpg“아무튼 몸이 쇠약해진 것은 확실합니다. 건강한 부부생활을 막는 건 아닙니다만,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건강한 부부생활이라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무어라 말을 못 하고 헛기침을 내뱉으니 리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16551110232243.jpg“뭐, 이건 마님이 아니라 영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문제겠군요. 잘 당부하겠습니다.”

진찰을 마친 리온이 도구를 정돈하는 사이 마리가 조심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16551110245757.jpg“마님. 황자님께서 찻잎을 보내셨어요. 지난번에 약속하신 거라고 하시면서요.”

16551110232251.jpg“아. 황자님…….”

마리의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16551110232251.jpg‘어제 오르카 황자를 내버려 두고 알테어에게 달려갔었지.’

무례도 그런 무례가 없었다. 제대로 대접하며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16551110232251.jpg‘그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테지.’

16551110232251.jpg“마리. 전하께 찻잎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오늘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도 전해 줘.”

16551110245757.jpg“오늘 저녁이면…… 주방에도 말을 전해 놓겠습니다.”

16551110232251.jpg“응. 마침 수도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준비되어 있으니 그걸 대접할까 싶어. 전하께서는 오래 지방을 전전하셨으니 고향의 맛이 그리우실 테지.”

16551110245757.jpg“예.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단, 생선 요리는 빼고 준비하라 전할게요.”

16551110232251.jpg“으…… 마리!”

차분한 말투로 사람을 놀리다니! 원망을 담아 입을 비죽거리는 날 보며 리온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왜 생선 요리를 빼고 준비하라는 건지 도무지 맥락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무어라 설명하기도 난처해 어색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그와 오르카 황자의 인연이 떠올랐다.

16551110232251.jpg‘원래대로라면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지역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내가 리온을 에일스포드로 데려오는 바람에 소설과는 다른 흐름이 만들어졌다.

16551110232251.jpg‘이게 영향을 미칠까?’

사실 그런 걸 걱정할 거라면 이미 알테어와 내가 결혼한 시점부터 문제가 됐겠지만 말이다.

16551110232251.jpg‘어째 멀어지려고 했던 소설 속 인물들과 계속 엮이고 있는 기분이야…….’

심란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자 리온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내가 아닌 마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16551110232243.jpg“마리 양.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16551110245757.jpg“저와 무슨 이야기를…….”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마리가 물러서지 않는 리온의 눈빛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10245757.jpg“알겠습니다. 우선 마님께서 분부하신 일이 있으니, 마치고 진료실로 가겠습니다.”

16551110232243.jpg“네. 기다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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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소 급하게 준비했지만, 저녁 만찬은 상당히 훌륭했다. 내가 오르카 황자가 선호하는 음식 스타일을 미리 전달한 덕분인지 그는 식사하는 내내 접시를 깨끗이 비워내는 것으로 만족감을 드러냈다. 흔한 말보다 더 확실한 긍정의 신호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오르카 황자의 얼굴을 살폈다.

16551110232251.jpg‘다행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아.’

겉으로는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는 소설 속에서 온갖 비극을 초래하는 반역자였다. 그러한 얼굴을 알고 있으니 방심할 수 없었다.

16551110232251.jpg‘뭐 하나 잘못 대접해서 원한을 사면 나중에 에일스포드가 숙청 대상에 오를지도 몰라.’

오르카 황자의 숙청 대상에 이름이 오르면 소설에서처럼 목이 뎅겅 잘려서…….

16551110232251.jpg‘으으. 생각하지 말자!’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라 눈을 질끈 감으니 맞은편에서 내 상상 속의 무시무시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부드러운 인상의 오르카 황자가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16551110245757.jpg“에일스포드에서 수도 음식을 먹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16551110232251.jpg“마침 재료가 준비되어 있어서요. 전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음식을 준비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16551110245757.jpg“제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라…….”

오르카 황자의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기이하게 번뜩였다.

16551110245757.jpg“에일스포드에 온 날부터 느꼈는데, 남작 부인은 내 취향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16551110232251.jpg“황실 분들의 취향을 유념하고 모시는 건 신하 된 자의 당연한 의무인걸요.”

16551110245757.jpg“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요양을 이유로 수도를 오래 비워 제 취향이 잘 알려지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16551110232251.jpg“그럴 리가요. 아무리 자리를 오래 비우셔도 황자님이신 걸요.”

16551110245757.jpg“글쎄요.”

예를 갖춰 대꾸한 말에 오르카 황자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16551110245757.jpg“요양을 이유로 여러 영지에 머물렀지만, 대체로 형님들의 취향대로 날 대접하더군요. 두 형님의 취향은 상당히 비슷하거든요.”

확실히 그랬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오르카 황자의 두 형님은 상당히 취향이 비슷했다. 황제의 취향을 그대로 닮은 탓이었다.

16551110245757.jpg“아마 나 역시 ‘황자님들’이라는 카테고리 안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접한 걸 테지요. 사실은 전혀 다른데 말입니다. 다들 관심조차 없지요.”

따지고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황위 계승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난 뒷방 황자의 취향을 누가 신경 쓸까. 다들 1황자와 2황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급급했다. 하지만 훗날 누가 황제가 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나는 그들과 반대였다. 항상 3황자 오르카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대해 파악하려고 애썼다. 덕분에 그의 취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6551110245757.jpg“그러니 남작 부인이 신기하지 않겠습니까? 날 오르카 ‘황자’가 아니라 ‘오르카’ 황자로 대접하고 있는 건…… 어째서일까?”

오르카 황자가 턱을 괴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다정한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비위를 맞춰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려고 한 게 지나쳤던 걸까. 오히려 의심을 산 것 같았다. 오르카 황자는 힘을 갖추고 한방에 상황을 역전하기 전까지 완벽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 정도로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그 레이더에 내가 걸려든 모양이다.

16551110232251.jpg‘세상에! 잘해 줘도 문제라니!’

악당을 상대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열심히 대접하고 비위를 맞췄던 게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지만 당장은 상황을 모면하는 게 중요했다. 나는 오르카 황자를 향해 태연한 척 빙긋 웃으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16551110232251.jpg‘뭐, 뭐라고 변명해야 오르카 황자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아 식은땀이 주룩주룩 흐를 것 같았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16551110232251.jpg“팬이라서…….”

16551110245757.jpg“팬?”

16551110232251.jpg“네. 팬이에요!”

나는 조금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16551110232251.jpg“그러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전하의 팬이었어요!”

16551110245757.jpg“…….”

16551110232251.jpg“어, 어렸을 때 황실 소식지에서 전하의 초상화를 보고 팬이 됐거든요. 그 이후로 계속 전하의 소식과 이야기를 찾아들었어요. 좋아하는 분의 소식을 쫓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오르카 황자가 살짝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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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무서운 악당 오르카를 피해 다니려고 그의 소식에 귀를 기울인 거지만, 정말로 그의 소식을 열심히 쫓아다닌 건 맞다.

16551110232251.jpg‘조, 좋아. 살짝 먹혀든 거 같아!’

나는 기세를 몰아 더욱 열정적으로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6551110232251.jpg“그래서 취향도 확실히 알게 됐고…… 마침 대접할 기회가 생겨서 들떠서 준비를…… 아! 물론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저는 팬으로서 멀리서 전하를 응원하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오르카를 바라보았다. 소설 속 오르카 황자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흉이지만, 그가 삐뚤어진 인간이 되는 계기도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일찌감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 황실 내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아왔고, 누구 하나 애정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일그러진 마음이 태어났다.

16551110232251.jpg‘어찌 보면 외롭고 가엾은 캐릭터야.’

16551110232251.jpg“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응원하고 있다고요. 히, 힘내세요. 파이팅?”

도무지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오르카의 입꼬리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터무니없는 변명이라는 걸 알아챈 건가 싶어 절망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며 고개를 들자 오르카 황자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태였다.

16551110232251.jpg“……전하?”

의아하게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르카 황자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르카의 부하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16551110232251.jpg‘으으…… 역시 팬이라는 게 무리수였던 걸까?!’

어쩌면 좋아……. 나는 겨우 그런 변명밖에 떠올리지 못한 스스로를 질책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16551110232251.jpg‘하지만 당장 그런 이야기밖에는 안 떠올랐단 말이야…….’

식탁에 그대로 머리를 들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심함에 한숨을 내쉬는 사이, 후식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마리가 돌아와 손님이 떠나버린 식탁에서 홀로 자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1110245757.jpg“마님. 전하께서 급히 떠나시던데요. 디저트도 안 드시고요.”

16551110232251.jpg“응.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서 기가 막히셨겠지. 하아…….”

16551110245757.jpg“네? 실수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마리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아 손을 휘휘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16551110232251.jpg“괜찮아. 나중에 내가 수습할게. 그보다 아까 리온과는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16551110245757.jpg“아…….”

가볍게 꺼낸 질문에 마리가 난처한 듯 웃으며 내 앞에 디저트를 내려 놓았다.

16551110245757.jpg“별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준비한 디저트가 아까우니 마님이라도 즐기셔요.”

16551110232251.jpg“으응…….”

16551110232251.jpg‘별 이야기가 아니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불안함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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