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또 다른 불청객. (92/170)

58화. 또 다른 불청객.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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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10400526.jpg“전하.”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오르카가 부하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자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하의 얼굴이 보여 오르카는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부하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말을 고르고 골라 결국 짧은 질문만 오르카에게 건넸다.

16551110400526.jpg“왜 아직도 이곳에 머무르고 계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에일스포드에 처음 올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의문은 없었다. 오르카는 언제나 얻을 게 명확한 일만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에일스포드에서의 일정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분명히 에일스포드의 영주를 포섭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그에게는 접근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남작 부인과 시간을 보내며 그의 경계심만 키우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혹시 이것도 자신은 짐작하지 못하는 계획의 일환인 걸까?

16551110400526.jpg“원래 계획대로라면 저희는 지금쯤 남부 국경 지대에 있어야 합니다.”

1655111040054.jpg“그래. 그곳에 쓸 만한 인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 에일스포드는 그곳에 가기 전에 잠깐 들른 건데 말이야…….”

오르카가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겨우 열린 입이 다시 꾹 닫히자 부하가 다소 답답한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16551110400526.jpg“전하. 마차 장인의 도착을 늦추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곧 에일스포드를 떠나셔야 합니다.”

1655111040054.jpg“으음…….”

오르카의 시큰둥한 반응이 이어지자 부하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1110400526.jpg“혹시 정말로 남작 부인에게 흥미가 있으신 겁니까? 이성적인 의미로요?”

직설적인 물음에 오르카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부하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냉철한 오르카의 눈빛에 부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1655111040054.jpg“내가 그런 사소한 감정에 휘둘릴 인간으로 보이는 건가?”

16551110400526.jpg“아닙니다. 하지만 평소와 너무 다르게 행동하셔서…….”

1655111040054.jpg“남작 부인에게 뭔가 있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가정이 아니라 상당한 확신이 담긴 말투였다.

1655111040054.jpg“그렇지 않고서야 날 이렇게…….”

눈앞에서 부하가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르카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남작 부인의 몇 마디 말에 동요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그건 정말로, 고작 몇 마디의 평범한 말이었을 뿐인데.

1655111040054.jpg“……아무튼 수상하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날 지나치게 잘 파악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걸려.”

16551110400526.jpg“뭐…… 본인의 말로는 전하의 ‘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린 귀족 소녀들에게 황자라는 존재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였다. 그즈음의 소녀들은 모두 멋진 황자님과 결혼하는 꿈을 꾸지 않나. 썩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르카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1655111040054.jpg“그러니 수상하지. 어떻게 내 팬이 되나. 황자를 흠모하는 소녀들의 시선은 언제나 형님들에게 머물러 있었는데.”

16551110400526.jpg“…….”

이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체로 소녀들의 관심은 1황자와 2황자를 향하고 있었고, 3황자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러나 부하된 자로서 감히 동의할 수는 없는 이야기라 그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1655111040054.jpg“……그러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조금만 더.”

오르카 황자가 깊은 밤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기이하게도 그 소리가 다짐처럼 들리기도 해서 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마리는 깊이 잠든 나디아가 덮은 이불을 꼼꼼하게 정돈한 뒤 조심스럽게 남작 부부의 침실을 떠났다. 이제 마님이 잠들었으니 시녀의 일과도 끝이었다. 평소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을 테지만, 오늘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도무지 편안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유는 자명했다. 나디아를 진찰한 의사, 리온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마리는 곰곰이 그와의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1655111040054.jpg‘왜 따로 저를 부르셨나요?’

16551110400526.jpg‘마리 양은 마님의 친정에서 온 시녀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잘 아실 것 같아서요.’

1655111040054.jpg‘마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고 있지요.’

16551110400526.jpg‘그럼 혹시…… 마님께서 따로 복용 중인 약이 있습니까?’

주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하는 건 사용인의 도리가 아니었지만, 가문에 소속된 의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리는 순순히 고개를 저어 그의 질문에 답했다.

1655111040054.jpg‘아니요. 그런 약이 있다면 벌써 말씀드렸겠지요.’

16551110400526.jpg‘그렇군요. 귀부인들은 은밀히 약을 쓰는 경우도 있어서…… 아무튼 지금은 따로 먹는 약이 없다는 거지요?’

1655111040054.jpg‘네.’

16551110400526.jpg‘하면 예전에 특정 약물을 장기적으로 복용하신 적은요?’

1655111040054.jpg‘딱히 그런 적은…….’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리가 번뜩 떠오른 사실에 입을 꾹 다물었다.

1655111040054.jpg‘생각해 보니 잠시 약을 드신 적이 있어요.’

16551110400526.jpg‘어떤……?’

1655111040054.jpg‘마님의 양친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후에 한동안 불안증세를 보이셔서…… 가문의 의사가 처방한 진정제를 한동안 드셨지요.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으셔서 많이 힘들어하셨거든요.’

16551110400526.jpg‘혹시 어떤 약을 처방했는지는……?’

1655111040054.jpg‘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단지 그걸 드신 후에는 차분하게 행동하시고 잠도 푹 주무셔서 진정제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캐묻는 리온에게 대답하고 있으니 점점 불안함이 밀려와 마리는 다급하게 질문을 덧붙였다.

1655111040054.jpg‘혹시 그게 문제가 됐을까요? 몇 년은 꾸준히 드셨어요.’

16551110400526.jpg‘정확히 어떤 약인지 알아야 파악이 되겠지만, 그런 강한 진정제라면 장기 복용이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1655111040054.jpg‘그런…… 하지만 가문의 의사는 그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16551110400526.jpg‘우선 지금은 약을 끊으신 상황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여쭤본 것이고,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닙니다.’

1655111040054.jpg‘그 말은, 뭔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마리는 충격받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리온의 표정을 떠올렸다. 나디아에게 쉽게 확진하기 힘든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리온은 과거의 이력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1655111040054.jpg‘정말로 그 진정제가 문제인 걸까?’

하지만 가문의 의사를 통해 처방받은 약이었다. 오랫동안 바인 후작가에서 일한 의사였기에 누구도 그 약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1655111040054.jpg‘하지만…….’

생각해 보면 선대 후작 부부가 돌아가신 직후 나디아의 숙부, 그러니까, 지금의 후작이 빠르게 후작가를 장악해 모든 것을 컨트롤 했었다. 당시에는 그의 속셈을 몰랐기에 마리를 비롯한 사용인들도 모두 그의 지휘를 따랐다.

1655111040054.jpg‘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빨리 바인 후작가를 휘어잡긴 했어.’

작위를 정식으로 상속받기 전인데도, 마치 모든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처럼 말이다.

1655111040054.jpg‘의사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어.’

내일 날이 밝자마자 편지를 보내면 일주일 안으로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할 일을 찾아낸 마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 아침에 눈을 뜨니 허리가 단단히 붙잡혀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건지 알테어가 나를 껴안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틀어 알테어를 마주 보았다.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평소에는 여전히 무서운 인상이라는 느낌인데, 두 눈을 감고 잠들어 있을 때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느껴져 늘 신기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알테어의 얼굴을 쿡 찔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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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드릴 때마다 표정이 변하는 게 재밌어서 키득대며 알테어의 뺨을 쿡쿡 찔러대니 결국 그가 두 눈을 뜨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16551110484479.png“날 괴롭힌 대가를 어떻게 치르려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매섭게 묻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짜증은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겨우 이런 걸로 내게 화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행동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16551110484483.png“그냥 얼굴 좀 만졌을 뿐인데…… 대가까지 치러야 해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항의하자 알테어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했다.

16551110484479.png“……혹시 일부러 이러는 거야?”

16551110484483.png“뭘요?”

16551110484479.png“아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네.”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확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져 서로의 몸이 바짝 붙으니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상태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확실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16551110484483.png“아, 아침인데요?!”

나는 화들짝 놀라 알테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거대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황하는 내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을 뿐이다.

16551110484479.png“아침이면, 그게 뭐?”

16551110484483.png“하, 하지만 아침이고…… 날도 완전히 밝았는데…… 이제 일도 시작해야 하고…….”

16551110484479.png“이것도 남작 부부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알테어가 몸을 더욱 바짝 붙여오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16551110484483.png“그, 그거야 그렇지만…….”

얼굴 몇 번 찌른 대가로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6551110484483.png‘아침부터 그걸 하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해!’

저택에는 아직 손님이 남아 있고, 정원도 다시 손봐야 하고, 리온과 그가 걱정하는 일이 뭔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했다. 할 일이 아주 많은데, 이렇게 하루를 날릴 수는 없었다.

16551110484483.png“밤까지 참으면 안 될까요? 할 일이 많단 말이에요…….”

16551110484479.png“그러게 누가 자극하래? 할 일은 조금 미뤄도 돼. 남작 부인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16551110484483.png“영지 일이야 그렇게 미룰 수 있지만 손님이 계시잖아요.”

16551110484479.png“손님.”

내 주장에 알테어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16551110484479.png“그 손님에게 왜 그렇게 신경 써? 티타임이며 식사 대접이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16551110484483.png“그야…… 황족이니까…….”

게다가 그가 보통 황족인가? 훗날 반역을 일으킬 무서운 악당 황족이다. 신경 써서 대접해 적으로 찍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

16551110484483.png‘물론 이런 사정을 누구한테 말할 수는 없지.’

16551110484483.png“알테어는 신경 안 써도 돼요. 원래 손님을 대접하는 건 안주인의 일이니까요! 지금처럼 쭉 맡겨만 줘요!”

16551110484479.png“……그러니까 그 부분이 신경 쓰이는 거라고.”

16551110484483.png“네?”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16551110484479.png“손님을 대접하는 건, 그래. 안주인의 역할이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둘만 시간을 보낼 필요 없잖아.”

16551110484483.png“그렇지만 황자님은 혼자 오셔서…… 다른 일행이 계셨다면 동석했을 거예요.”

16551110484479.png“내 말은, 나도 같이 손님 대접을 할 수 있단 이야기였어.”

16551110484483.png“알테어는 바쁘잖아요!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알테어가 오르카를 함께 대접하는 건 절대 안 될 이야기였다. 오르카가 그 좋은 말솜씨로 이렇게 저렇게 알테어를 꼬드겨 소설 속에서처럼 악당 동지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

16551110484483.png‘내가 뭐 때문에 오르카 황자를 계속 붙잡고 있는데!’

16551110484483.png“알테어는 정말로 신경 안 써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절대 알테어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외치자 그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16551110484479.png“그렇게까지 거부하면…… 더 반발심이 생긴다는 거 알아? 이 일도, 그 일도. 모두 마찬가지야.”

16551110484483.png“이 일? 그 일?”

도대체 그게 뭐지? 명확하지 않은 알테어의 말에 눈을 껌뻑이자, 그가 곧 내 얼굴을 감싸 입을 맞춰왔다.

16551110484479.png“우선은 ‘이 일’부터 밀어붙여야겠지. 이게 먼저야.”

뒤이어 알테어의 손이 옷 아래로 쑥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세 알게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말이다. ***

16551110484483.png‘히, 힘들어어어어…….’

아침부터 침대 위에서 뒹굴어서인지 배로 힘이 든 것 같았다. 알테어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서둘러 침실을 떠나면서도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왜 나만 이 꼴이지. 역시 체력이 약하긴 한 모양이다.

16551110484483.png‘우선은 씻자.’

아무리 힘들어도 나 역시 마님의 일을 해야 한다. 나는 계속 늘어지려는 몸을 겨우 움직여 설렁줄을 붙잡았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줄을 당기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마리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16551110484483.png‘알테어가 집무실로 가면서 마리를 불러줬나?’

하지만 금세 내 짐작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655111040054.jpg“마님.”

마리가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힐끗대며 내게 말했다.

1655111040054.jpg“손님이 왔습니다.”

16551110484483.png“손님? 아, 혹시 마차 장인이 왔어? 슬슬 도착할 때가 됐지.”

1655111040054.jpg“아뇨. 그쪽은 아직…….”

16551110484483.png“그럼 무슨 손님? 누가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1655111040054.jpg“그게…… 멜리사 님께서…….”

16551110484483.png“응?”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리가 난처해진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1655111040054.jpg“멜리사 님이 정문에서…….”

마리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문 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6551110608724.png“나디아! 어서 마중 나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정말로 내 사촌, 숙부인 바인 후작의 딸, 멜리사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제야 멜리사가 보냈던 편지에 적혔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에일스포드로 오겠다는 이야기. 그게 진짜였던 거다. 놀란 내 시선과 난처한 마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에일스포드에, 정말로 멜리사 바인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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