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꽥꽥. (93/170)

59화. 꽥꽥.2021.12.26.

16551110679823.png“나디아 바인! 날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거야?!”

내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도 멜리사는 계속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자랑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의 기분 탓인지, 아니면 성의 구조 덕분에 소리가 잘 울려서인지. 멜리사의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려왔다. 본성의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별채의 손님에게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하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16551110679829.png“우, 우선 마중을 나가야겠어. 그래야 저 애가 입을 다물지.”

16551110679833.jpg“네, 마님.”

마리는 멜리사의 무례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당장 저 애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듯했다.

16551110679829.png“우선 옷…… 옷부터!”

하필 알테어와 아침부터 ‘부부의 일’에 열중한 덕분에 몰골이 아주 엉망이었다. 제대로 씻고 단장까지 한 뒤에 나가고 싶었지만 계속 소리를 질러대는 멜리사 때문에 도저히 그럴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능숙한 마리의 손놀림 덕에 나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다급한 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걷는 동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멜리사라니. 멜리사 바인이라니. 바인 후작가를 떠나며 다시는 그녀를 못 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그쪽을 찾을 일도, 그쪽에서 나를 찾을 일도 없다고…… 이 관계는 영원히 끝난 거라고만…….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이어지던 생각은 정문에 도착해서야 어떻게든 끊어졌다. 잔뜩 짜증 난 표정의 멜리사가 삐딱하게 서서 파벨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16551110679829.png‘그런데 몰골이 왜…….’

언제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치장까지 완벽하게 한 채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던 멜리사의 몰골이 아주 허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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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히 보니 드레스는 예전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긴 여정 탓인지 잔뜩 구겨지고 더러워진 상태였고, 머리며 화장은 말할 것도 없이 엉망이었다. 물론 기세등등한 태도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다.

16551110679852.png“지금 에일스포드에 귀한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소란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언제부턴가 멜리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니, 파벨이 먼저 나와 상황을 수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멜리사는 그런 파벨의 단호한 태도에 크게 기분이 상한 것인지 뚱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고 있었다.

16551110679823.png“집사 따위가 후작가의 레이디에게 훈계하는 거니?”

16551110679852.png“지금 레이디께서는 집사 따위에게 훈계를 들으실 정도로 품위 없이 행동하고 계십니다. 이곳은 에일스포드입니다. 방문객으로서의 품위를 갖춰주십시오.”

16551110679823.png“뭐, 뭐라고? 품위?”

멜리사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파벨의 뺨을 후려칠 기세였다. 파벨은 자신을 향한 공격을 뻔히 보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멜리사의 무례함을 참지 못해 훈계를 늘어놓긴 했지만 감히 귀족에게 할 언사는 아니었다. 파벨이 그 정도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니, 처음부터 한 대 맞는 것 정도는 감수하자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게 분명했다.

16551110679829.png‘아, 안 돼!’

멜리사의 손이 얼마나 매서운데! 바인 후작가에서도 그녀의 사정없는 손속에 나가떨어진 사용인이 여럿 있었다. 종종 내게도 성질을 부리며 손을 휘둘러서……. 순간 나쁜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잔상을 떨쳐내기 위해 눈을 질끈 감으며 재빨리 파벨의 앞을 막아섰다.

16551110679829.png“그, 그만해!”

잽싸게 끼어든 날 보며 멜리사가 여전히 손을 든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16551110679823.png“나디아, 나디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내가 편지도 보냈는데, 날 맞이할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잖아.”

16551110679829.png“이, 일방적으로 보낸 편지잖아. 난 답장도 안 했는데, 네가 멋대로 온 거면서…….”

16551110679823.png“멋대로라니? 넌 내 사촌이잖아. 사촌을 만나러 오면서 허락까지 받아야 한단 말이야?”

‘고작 널 만나러 오는데?’라는 말이 생략된 듯한 말투에 어깨가 움찔했다. 매섭게 눈을 부라리는 멜리사를 보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멜리사는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코웃음을 흘리며 턱 끝으로 내 뒤에 선 파벨을 가리켰다.

16551110679823.png“그리고 너, 잠시만 비켜 봐. 아직 저 건방진 녀석을 나무라지 못했으니까.”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야 이런 취급을 받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에일스포드 사람들까지 멜리사의 패악에 휘둘리게 할 수는 없었다.

16551110679829.png‘나, 나는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잖아. 이 사람들의 마님이고.’

그러니까 바인 후작가에서처럼 멍청하게 굴면 안 된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에일스포드 사람들을 지켜줘야 한다.

16551110679829.png“그러지 마. 여긴 바인 후작가가 아니니까 네게 사용인을 훈계할 권리도 없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16551110679823.png“내게 권리가 없어? 네가 알아서 한다고?”

16551110679829.png“그래.”

나는 옆으로 비켜서는 대신 두 팔을 벌려 파벨을 보호했다. 등 뒤에서 파벨이 ‘마님’ 하고 조심스럽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무시했다. 그 모습에 멜리사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16551110679823.png“세상에. 마님이 됐다고 기가 아주 폈구나?”

멜리사가 까르르 웃음을 흘리며 높이 들었던 손을 내렸다. 어떻게든 상황이 일단락되었구나 싶어 안심하며 자세를 바로 하는 순간. 멜리사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16551110679823.png“그럼 나는 아랫사람을 제대로 못 길들인 주인에게 무례의 대가를 물어야겠네.”

무어라 반박할 새도 없이 멜리사가 손을 들어 빠르게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미처 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순간 바인 후작가에서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멜리사가 무섭게 짜증을 부리며 내 머리채를 잡았던 기억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눈을 질끈 감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맞는다는 걸 직감하자마자 고통이 느껴지는 대신 눈앞에 거대한 벽이 솟아났다. 아니, 자세히 보니 벽이 아니라 사람의 등이었다.

16551110679829.png‘알테어?’

16551110679823.png“악!”

동시에 멜리사의 비명이 귀를 찔렀다. 시야를 완전히 가린 등 뒤에서 빠져나와 상황을 살피니 알테어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멜리사의 손목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

16551110679823.png“도대체 이게 뭐 하는!”

멜리사가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싸늘한 알테어의 얼굴을 보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16551110735579.png“그러는 너야말로…….”

한순간에 넋이 나가 입까지 떡 벌린 멜리사를 향해 알테어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며 더욱 강하게 그녀의 손을 틀어쥐었다.

16551110679823.png“악!”

16551110735579.png“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감히 에일스포드에서?”

16551110679823.png“아악! 아파! 이거 놓…… 으앗!”

알테어가 제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멜리사를 던지듯 밀어내며 풀어주었다. 그 엄청난 힘에 멜리사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망신에 멜리사가 이를 바드득 갈며 알테어를 노려보았다.

16551110679823.png“기사가 이따위로 레이디를 대하다니, 역시 시골 기사라 무식하기 짝이 없네. 영주를 불러와! 당장 이 무식한 처사에 사과를 받아야겠으니까!”

16551110735579.png“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내가 영주거든.”

16551110679823.png“……뭐?”

16551110735579.png“내가 에일스포드의 영주라고.”

16551110679823.png“영주라니…… 그럼…… 당신이 나디아의 남편, 에일스포드 남작이라고?”

멜리사가 얼빠진 얼굴로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알테어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눈을 껌뻑이기 시작했다.

16551110679823.png“말도 안 돼. 분명 에일스포드 남작은 불구에 추남이랬는데? 이렇게 멀쩡한 미남일 리가…… 그럴 리가…….”

자랑스러운 영주님을 눈앞에 두고 불구라느니, 추남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자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에일스포드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상황을 마주한 멜리사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그런 걸 느꼈더라도 개의치 않을 사람이기도 했다.

16551110735579.png“발하일 그 자식이 퍼트린 고약한 소문이 동부를 떠나 수도까지 흘러갔나 본데.”

알테어가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지며 삐딱하게 섰다.

16551110735579.png“안타깝게도 난 불구가 아냐. 추남이라는 소리도 들은 적은 없고.”

차갑고 무서운 인상이지만, 알테어가 미남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었다. 이유 있는 자신감에 멜리사가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16551110679823.png“너, 너, 너……! 네가 어떻게 이런 미남과 결혼을……! 말도 안 돼!”

내가 에일스포드로 시집오기 전. 멜리사는 잔뜩 신이 나서 신랑에 대한 소문을 늘어놓았었다. 눈에 거슬리는 사촌이 불구에다 추남이라는 소문이 도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못내 즐거운 듯했었지. 그게 완전히 틀린 소문이라는 건 나도 에일스포드에 와서야 알았으니, 멜리사는 여전히 그 소문을 진실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16551110679823.png“말도 안 돼…….”

멜리사는 연신 말도 안 된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나와 알테어를 번갈아 보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테어가 코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감싸 쥐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성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16551110679823.png“이, 이봐요!”

덩그러니 버려진 멜리사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16551110679823.png“그렇게 가 버리면 어떡해요? 이봐요! 야!”

귀를 찌르는 목소리에 알테어가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만 돌려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어깨를 움찔하며 소리 지르던 것을 멈췄다.

16551110735579.png“그럼, 뭘 어쩌라는 거지?”

16551110679823.png“어, 어쩌라는 거라뇨? 손님이 왔으면 정중히 안으로 모셔야…….”

16551110735579.png“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사람도 손님으로 치나? 그런 건 불청객이라고 해.”

16551110679823.png“하, 하지만 나는 나디아의 사촌이에요! 편지도 보냈고요!”

16551110735579.png“내 부인이 방문을 허락했나?”

16551110679823.png“그, 그건 아니지만…….”

알테어의 날카로운 눈빛에 점점 쪼그라들던 멜리사가 슬그머니 옆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주눅 들었던 기세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다시 당당해졌다.

16551110679823.png“날 이딴 식으로 대접하면 수도에 무슨 소문이 돌 줄 알고 이래요? 나디아 바인이 시집가서 졸부가 되더니 배은망덕하게 군다고, 그런 이야기가 쫙 퍼져도 괜찮은가 보죠?”

16551110735579.png“내세울 게 그딴 것밖에 없나? 불쌍하군.”

알테어가 혀를 차며 파벨에게 지시했다.

16551110735579.png“대충 별채에 방을 하나 내줘라. 계속 꽥꽥대면서 시끄럽게 구는 건 귀찮으니까.”

16551110679823.png“꽥꽥이라니……!”

멜리사가 과격한 언사에 항의했지만, 알테어도 파벨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깨끗하게 무시했다.

16551110679852.png“하지만 별채에는 아직 그분이 계시는데…… 괜찮을까요?”

16551110735579.png“오히려 잘됐지. 누가 계속 저렇게 꽥꽥대면 잔뜩 질려서 버티던 걸 그만두고 빨리 떠날지도 모르잖아?”

알테어가 다시 멜리사를 바라보며 매서운 눈빛을 보내자, 길길이 날뛰던 멜리사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16551110735579.png“너.”

16551110679823.png“네, 네?”

알테어는 조금 전까지 멜리사를 향해 매섭게 굴던 태도를 싹 바꾸어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아주 음산한 미소였다.

16551110735579.png“방에 가서도 지금처럼 계속 꽥꽥대도록 해. 그게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에게 방을 내주는 대가야. 알겠나?”

  *** 멜리사는 곧 별채의 손님용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 남게 된 것과 동시에 알테어의 당부를 그대로 이행했다.

16551110679823.png“아아아악! 짜증 나!”

물론, 알테어의 당부에 따르고자 하는 온순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16551110679823.png“도대체 뭐야? 이건…… 이건 완전히 달라!”

멜리사는 부들거리며 방 안의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를 짜증이 치밀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551110679823.png‘불구에다 추남인 거지 남작은 어디 있어? 가난에 찌들어 보잘것없이 사는 나디아 바인은 어디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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