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뺏고 싶어. (94/170)

60화. 뺏고 싶어.2021.12.29.

한참이나 물건을 집어 던진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긴 여정으로 지쳐서 더이상 패악을 부리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멜리사는 씩씩대며 침대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방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날 때부터 후작 영애가 아니었던 탓에 안목이 다소 떨어지는 멜리사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방이 그럴듯했다. 이 방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열심히 에일스포드 성 곳곳을 살폈는데, 모두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16551110941674.png‘최근 수도에 도는 소문이 진짜였단 말이야?’

요즘 수도 사교계에서는 멀리 에일스포드에서 들려온 소문이 주요한 화제였다. 징그러운 마물을 때려잡으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영지에서 마석 광산이 발견되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소문을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마석 광산이 발견되었다지만 그렇게까지 부자가 될 수 있겠느냐. 아니다. 마석 광산이 발견된 것도 헛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다. 마석 광산이 발견된 것도, 영지가 부유해진 것도 맞지만 돈도 써 본 사람이 쓴다고, 졸부답게 우스운 꼴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 각종 소문이 사교계를 맴돌았다. 멜리사는 그 소문의 에일스포드가 나디아가 시집간 그곳이라는 걸 알아차린 후 곧장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든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도 나디아는 답장이 없었다. 감히 이 계집애가 시집을 갔다고 날 무시해? 졸부가 되었다고 처지가 달라진 줄 아는가 본데, 아직도 제 처지가 여전하다는 걸 알려줘야지. 그런 생각에 발끈해서는 당장 짐을 꾸리고 에일스포드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아버지인 바인 후작도 멜리사의 에일스포드 행을 반겼다. 그곳에 가서 에일스포드의 상황이 어떤지 잘 살펴보라고 했다. 정말로 소문처럼 에일스포드가 큰 부자가 된 거라면, 바인 후작가는 남작 부인의 친정이니 이것저것 얻어낼 수 있을 거라면서 말이다.

16551110941674.png‘그 계집애가 정말 부자가 되긴 한 모양이야.’

멜리사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사실 그녀는 에일스포드에 도착하는 순간, 거대한 성의 위용에 쫄아 버렸다. 잠시나마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이 자존심 상해서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던 건데, 제 위엄을 세우기는커녕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16551110941674.png‘게다가 남작이라는 자는 또 왜 멀쩡하고 난리야?’

확실히 불구랬다. 정말로 추남이랬다. 그런데 갑자기 건장한 체격의 엄청난 미남이 나타나서 나디아의 남편이라니? 멜리사는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16551110941674.png‘이렇게 괜찮은 혼처였다면 내가 가졌어야 하는데!’

에일스포드 남작은 수도의 내로라하는 미남보다 훨씬 잘생긴 남자였다. 평온한 수도 생활에 익숙해 비실비실한 사내들과 달리 건장하고 단단한 몸도 넋을 빼놓았다.

16551110941674.png‘그런 남편감은 흔치 않다고.’

영지가 시골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결혼한 후에 수도에 저택을 사서 사교 시즌 내내 그곳에 머무르면 별로 문제 될 것도 없었다.

16551110941674.png‘헛소문을 덜컥 믿어버린 게 잘못이었어.’

조금만 더 자세히 알아봤다면 이 행운이 자신의 것일 수도 있었는데. 후회와 질투가 마음속에서 뒤섞여 심기가 아주 불편해졌다. 게다가 이상한 점도 있었다.

16551110941674.png‘나디아 고 계집애는 그런 이상한 소문이 있는 남편감을 왜 순순히 받아들인 거지?’

바인 후작은 멜리사가 남편에 대한 소문을 나디아 앞에서 물색없이 늘어놓았다며 크게 화를 냈다. 남편감이 그따위라는 걸 알게 되면 나디아가 싫다며 울고불고할 텐데 도대체 왜 그랬냐는 것이다. 하지만 후작의 걱정과 달리 나디아는 멜리사가 떠들어대는 남편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도 순순히 에일스포드로 떠났다. 당시에는 나디아가 자포자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의심이 치솟았다.

16551110941674.png‘설마…… 남편감이 괜찮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 아냐?’

사소한 일에도 벌벌 떠는 계집애가 이런 큰 문제에 덤덤했던 걸 생각하면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괘씸하고 짜증스러웠다.

16551110941674.png‘하. 좋은 혼처를 채가려고 여우 같이 굴었던 거야?’

처음은 짐작이었지만 생각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멜리사는 머릿속으로 ‘나디아 그 여우 같은 계집애!’를 외치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바인 후작가는 수도의 명문가지만, 멜리사의 아버지가 작위를 이은 후 급격히 재산이 줄어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잔고가 조금씩 메마르고, 온갖 보물로 가득 찼던 창고가 조금씩 빈자리를 드러냈다. 멜리사의 아버지도, 멜리사도 돈을 써본 적만 있지 벌어본 적은 없었다. 가문 운영이라는 걸 겉핥기로만 배웠으니 핵심적인 부분에서 돈이 줄줄 샜다. 그걸 만회하고자 자신 있게 여러 사업을 벌였지만 하는 일마다 손해를 보니 가만히 있는 것만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에일스포드는…… 어쩌면 자신이 가질 수도 있었던 이 부유한 영지의 남작 부인이라는 자리는……. 매우 탐이 났다.

16551110941674.png‘탐이 나면…… 가져야지.’

그걸 가진 상대가 나디아라는 점에서 딱히 긴장감도 들지 않았다. 예전부터 멜리사는 자연스럽게 나디아의 것을 가로채 왔다. 이런 자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16551110941674.png‘어차피 걘 봐줄 게 얼굴뿐이잖아?’

맹한 것이 예전부터 얼굴만은 반반해서, 선대 후작 부부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 완전히 몰락한 뒤에도 나디아를 지정해 꽤 괜찮은 곳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물론 그런 좋은 자리는 후작이 모두 쳐냈다. 그 애가 기세등등해져 가문을 다시 찾으려고 할지도 모르니, 애초에 일어날 기회를 주면 안 된다고 했다.

16551110941674.png‘그런데 이걸 어떻게 빼앗지?’

결혼식을 치르기 전이었다면 훨씬 편했을 텐데. 이미 나디아와 남작은 신성한 혼약으로 묶인 관계였다. 이 자리를 뺏으려면, 먼저 두 사람이 갈라서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남작을 유혹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나디아가 알아서 떠나게 만들면 된다.

16551110941674.png‘나디아 고 계집애를 쫓아내는 건 아주 간단하겠지. 아주 쉬울 거야.’

그러니 후자를 선택하는 게 맞다. 하지만 서늘한 냉기가 흐르던 미남의 얼굴을 떠올리니……. 멜리사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생각을 정리했다.

16551110941674.png‘스스로 떠나는 것보다는 버림받는 쪽이 더 비참할 거 아냐.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지.’

태어나면서부터 운 좋게 후작 영애였던 것도 모자라서, 운 좋게 좋은 남편감을 만나 호강하다니. 절대 안 될 일이다. 이런 좋은 자리는 운 좋은 자가 아니라 노력하는 자가 가져야 옳다. 멜리사는 상상 속에서 자신의 곁에 잘생긴 남작을 세워 보았다. 역시 선남선녀였다. 다정한 둘을 바라보는 절망적인 나디아의 얼굴까지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16551110941674.png“어휴. 괜히 열을 냈네.”

멜리사는 코웃음을 흘리며 엉망이 된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너무 짜증이 나서 죄다 집어 던졌는데, 이걸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부서진 물건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16551110941674.png“소중하게 대해야지. 결국 다 내 것이 될 건데.”

멜리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소중하게 주워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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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알테어와 터덜터덜 복도를 걸으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조금 화난 기색이 느껴졌다.

16551110972032.png“미안해요.”

우물거리며 건넨 사과에 알테어가 걸음을 멈추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16551110972035.png“뭐가 미안하지?”

16551110972032.png“멜리사요. 엄청 무례했잖아요.”

16551110972035.png“그러니까, 그 여자가 무례한 걸 왜 네가 사과하느냐고. 딱히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16551110972032.png“어어…… 하지만 내 사촌이고…….”

16551110972035.png“난 발하일이 미친놈이라는 이유로 너한테 사과하지 않았는데?”

16551110972032.png“그, 그거랑은 다르죠!”

16551110972035.png“뭐가 다른데?”

알테어의 이어지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로 멜리사의 무례를 내가 사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16551110972035.png“그것 봐. 그 여자가 미친 인간이라는 걸 왜 네가 사과해? 다른 데서도 걔가 미친 인간이라는 걸 대신 사과하지 마.”

16551110972032.png“미친 인간…….”

적나라한 평가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항상 멜리사를 볼 때마다 뭐라고 이 애를 평가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미친 인간’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오늘에서야 시원한 정답을 찾게 됐다.

16551110972032.png“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요.”

16551110972035.png“미친 인간을 미친 인간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불러? 너도 불러 봐.”

16551110972032.png“네?”

16551110972035.png“한번 불러 보라고. 미, 친, 인, 간.”

16551110972032.png“그…….”

알테어가 따라 해 보라는 듯 한 글자씩 끊어 발음했다. 나는 어색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16551110972032.png“미……미친 인간…….”

16551110972035.png“그래.”

16551110972032.png“걔는 미친 인간이에요. 정말로요.”

두 번째는 조금 더 쉬웠다. 시원하게 욕을 하고 나니 괜히 속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속이 확 트이니 꽁꽁 묻어놨던 이야기도 술술 나왔다.

16551110972032.png“진짜 그 애가 얼마나 미쳤는지 모를 거예요. 내가 뭘 가지고 있는 꼴을 못 보거든요. 전에는 내 머리 장식이 마음에 든다고 머리채를 잡고는 그걸 빼앗아 갔다니까요. 사용인들은 그걸 보고 웃고…… 진짜 너무 민망했어요.”

16551110972035.png“…….”

16551110972032.png“내가 뭘 먹고 있으면 또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그릇을 엎어 버리질 않나, 드레스도 다 찢어놔서 겨울에 여름 드레스를 입었던 적도 있고…… 또…….”

16551110972035.png“…….”

주절주절 떠드는 동안에도 알테어는 말이 없었다. 내가 신이 나서 너무 험담을 했나 싶어 얼른 입을 다물자 알테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16551110972035.png“왜 말을 하다 말지?”

16551110972032.png“아니에요. 다 했어요.”

16551110972035.png“흐음. 네가 그렇다면야.”

알테어가 묘한 침음을 흘리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평소처럼 마구 헤집는 것과는 느낌이 조금 달라서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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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알테어의 손길을 피하며, 마침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파벨을 바라보았다.

16551110972032.png“멜리사를 방에 데려다주고 왔나 봐요.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할지 파벨이랑 이야기해야 하니까, 알테어도 이제 일하러 가요!”

16551110972035.png“그렇게 급하게 갈 필요는…….”

알테어가 날 붙잡으려고 했지만 계속 자리를 지켰다가는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기분에 실수를 할 것 같아서, 애써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파벨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하게 제 앞으로 다가온 날 보며 파벨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1111064831.png“마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16551110972032.png“갑자기 손님이 왔으니까요. 함께 정해야 할 것들이 많잖아요.”

16551111064831.png“그건 제게 맡기셔도 되지만…….”

16551110972032.png“음…… 그 애는 미친 인간이라 대충 준비하면 사용인들이 괜히 곤욕을 치를 거라서요. 제대로 내가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6551111064831.png“……예? 미친 인간……?”

파벨이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려 그의 귀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주었다.

16551110972032.png“네. 미친 인간이요.”

16551111064831.png“그……렇군요. 미친 인간이시군요, 그분이.”

16551110972032.png“네!”

나는 얼떨떨하게 대꾸하는 파벨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떨어진 곳에 선 알테어를 힐끗댔다. 허망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던 알테어가 잠시 제 손을 바라보다 등을 돌려 복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알테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파벨에게 고개를 휙 돌려 계속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그에게 꺼냈다.

16551110972032.png“그리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알테어한테는 묻기가 좀…… 힘든 이야기라서요.”

16551111064831.png“예. 편히 물으십시오. 제가 아는 선에서는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16551110972032.png“선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예요.“

알테어는 아직도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두 분이 돌아가신 공간을 그대로 버려두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16551110972032.png‘그러니까 알테어가 아니라, 그가 신뢰하면서도 이 일을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에게 묻는 게 좋겠지.’

파벨이라면 그 기준에 딱 맞다. 나는 주제를 듣고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는 파벨을 향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진짜 질문을 던졌다.

16551110972032.png“혹…… 두 분의 죽음이 타살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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