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상종하기엔 격이 떨어져. (95/170)

61화. 상종하기엔 격이 떨어져.2022.01.02.

16551111178488.png“타살이라니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하던 파벨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16551111178488.png“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으셨습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가 아니라 ‘그걸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냐’는 반응이다. 둘의 차이는 아주 크다.

16551111178499.png“……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16551111178488.png“…….”

한숨 쉬며 꺼낸 소리에 파벨이 다소 난처한 얼굴을 했다.

16551111178488.png“사용인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돌긴 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다들 에일스포드를 떠나고 없는 사람들이지만요.”

파벨이 도대체 이야기가 어디에서 새어 나온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는 서둘러 그의 의문을 해결해주기로 했다.

16551111178499.png“이번에 에일스포드에 온 의사, 리온이 선대 때 주치의였던 분의 아들이에요.”

16551111178488.png“네? 그런…….”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파벨의 눈동자가 평소답지 않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처럼 동요하는 파벨은 에일스포드에 온 이후 처음 본다.

16551111178488.png“선대의 주치의라면 알고 있습니다. 화재 사건 이후 일가가 급히 영지를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분의 아들이라고요.”

16551111178499.png“네. 그 사람의 입에서 타살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16551111178488.png“그건…… 주치의이셨던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겠군요?”

16551111178499.png“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파벨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16551111178488.png“그렇다면 타살이라는 이야기가 단순한 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16551111178499.png“리온은 부친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살해당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만든 건 알테어라고 믿고 있어서…….”

16551111178488.png“네?”

생각에 잠겨 있던 파벨이 화들짝 놀라 내게 바짝 다가왔다.

16551111178488.png“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영주님께선 어린아이였다고요!”

놀란 와중에도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게 파벨답다면 파벨다웠다.

16551111178499.png“알아요. 당시에 알테어가 성인이었더라도, 결코 그런 무서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그러니까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리온을 데려온 거다. 물론 리온이 개발할 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이득이나 오르카 황자와의 인연을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도 중요했지만 말이다. 나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꺼낸 이야기였는데 의외로 파벨이 묘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런가 싶어 눈을 껌뻑이며 파벨을 보자 그가 평소처럼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16551111178488.png“조금 신기해서요. 영주님께서 발하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잘 아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다니요.”

16551111178499.png“그거야…… 발하일은 가족이 아니었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 뭔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발하일은 알테어의 사촌이니, 크게 보면 가족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16551111178499.png“물론 친척이기는 하지요.”

나는 황급히 이야기를 덧붙여 내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려고 애썼다.

16551111178499.png“하지만 제가 말하는 가족이라는 건, 사전적인 의미의 가족이라기보다는, 좀 더 끈끈하고, 신뢰로 이어져 있고, 또…….”

내 안에 두루뭉술하게 그려진 개념을 전달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횡설수설하며 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파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11178488.png“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마님과 영주님은 가족이시죠. 기사단과 영주님도 가족이고요.”

16551111178499.png“네, 맞아요! 파벨과 알테어도요!”

뜻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기뻐 활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파벨이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16551111178488.png“저까지 가족으로 포함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16551111178499.png“필요가 아니라 사실이 그런걸요.”

나는 생각지 못한 겸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1111178499.png“오히려 나와 알테어보다 파벨과 알테어가 더 가족 같은걸요. 기사단과 알테어도 아주 끈끈하고…… 오랜 인연이 있죠.”

그저 사실을 늘어놓고 있을 뿐인데.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파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16551111178488.png“마님. 세상에 부부보다 가까운 가족은 없습니다.”

16551111178499.png“그런가요…….”

다들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런 건 서로 사랑하는 진짜 부부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 아닐까?

16551111178499.png‘하지만 나와 알테어는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귀족답게 서로의 이득을 고려해 결혼했고,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연인들처럼 불타오르는 것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 단지 필요에 의한 부부 사이다. 알테어는 후계자가 필요했고, 나는 비극이 정해진 소설의 이야기로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16551111178499.png‘도망치려다 오히려 소설 속 인물들과 더 깊게 엮이고 있긴 하지만…….’

애초의 의도는 그랬다. 지금도 딱히 그런 의도는 변하지 않았을 테다.

16551111178488.png“마님?”

생각에 잠겨 있느라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했는지 파벨이 걱정스럽게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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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서둘러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16551111178499.png“아무튼 난 알테어의 결백을 믿어요. 하지만 리온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 같지도 않았거든요.”

알테어는 결백하고, 리온이 헛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라면 답은 하나다. 선대의 죽음은 타살이 맞지만 범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다. 길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영민한 파벨은 내 이야기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16551111178488.png“조사가 필요하겠군요. 그런데 왜 영주님이 아닌 제게 이런 이야기를……?”

16551111178499.png“정말로 타살이라면 알테어에겐 큰 슬픔일 거예요. 진상을 파악하려고 나서는 동안에도 내내 괴롭겠죠. 조금이라도 그 괴로운 시간을 줄였으면 해서…… 너무 우스운 생각인가요?”

멋쩍게 웃으며 묻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파벨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1111178488.png“아닙니다. 확실히 영주님께는 괴로운 일이 될 테지요. 아직도 화재 사건이 벌어졌던 곳엔 발걸음도 못 하시니…… 하지만 저는 운신의 폭이 좁아서 이런 일을 주도적으로 조사하긴 어렵습니다.”

시간 대부분을 알테어를 보조하는 데 쓰고 있으니 그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건 더더욱 어려울 테고 말이다.

16551111178488.png“괜찮으시다면 블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조사를 부탁하면 어떻겠습니까?”

16551111178499.png“블란이라면 당연히…….”

좋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그가 임무를 위해 에일스포드를 떠난 상태라는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16551111178499.png“알테어가 맡긴 임무를 처리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16551111178488.png“이제 곧 돌아올 겁니다. 대충 조사가 끝난 모양이더군요. 시골 촌뜨기가 화려한 수도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잔뜩 신이 나서 귀환을 미루고 있는 거라면서, 영주님께서 투덜거리며 당장 돌아오라는 서신을 보내셨지요.”

16551111178499.png“수도에서 뭘 조사하는데요?”

흐르는 대화에 자연스럽게 던진 질문인데, 파벨이 급히 입을 다물며 내 눈치를 살폈다.

16551111178499.png‘아. 여기부터는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알테어가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겼는데 내가 너무 캐내려고 한 모양이다. 나는 실수를 수긍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파벨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16551111178499.png“미안해요. 내가 실수했어요. 기사단의 첩보 임무는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닌데.”

16551111178488.png“아. 그런 이유가 아니라…….”

16551111178499.png“괜찮아요.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파벨이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더 이상 그가 곤란하지 않도록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16551111178499.png“아무튼 지금은 손님 접대가 중요해요. 멜리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수도로 돌아가서 어떤 소문을 퍼트릴지…… 책잡히지 않도록 신경 써야겠어요.”

다행히 화제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파벨은 멜리사를 떠올리기라도 한 건지 질린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1111178488.png“우리가 어떻게 대접하든 돌아가서 헛소문을 퍼트리실 분 같았는데요.”

16551111178499.png“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멜리사를 정확하게 파악한 게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16551111178488.png“우리가 후하게 대접하고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면 멜리사가 거짓말을 한 게 되지만, 정말로 박하게 대접했다면 멜리사의 이야기가 진실이 되는 거죠.”

수도 귀족들은 사교계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긴다. 그곳에서의 삶이 그들의 전부다. 그러다 보니 누가 헛소리를 하고 진실을 말하는지 금세 간파하곤 했다. 물론 그것조차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도 많았지만, 어차피 그들은 고려할 필요도 없는 잔챙이들이다.

16551111178499.png“멜리사와 함께 온 사용인들의 입도 무시할 수 없지요. 은연중에 소문이 쫙 퍼질 거예요. 원래 사용인들이 모든 소문의 근원이거든요.”

16551111178488.png“멀리 사교계의 소문까지 신경 쓰시는 겁니까.”

16551111178499.png“이제 곧 마석을 판매하게 될 텐데, 주된 고객은 부유한 수도 귀족들이겠죠. 그들과 원만하게 거래하려면 우리가 상식적이고 귀족적이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아무래도 수도 사람들은 동부 귀족들을…… 음…….”

내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파벨이 다 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대신 이야기를 이었다.

16551111178488.png“거칠고 무례하다 생각하지요. 상종하기엔 격이 떨어진다고요.”

16551111178499.png“그…….”

이렇게까지 날것의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다. 하지만 정말로 수도 귀족들은 동부 귀족들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어라 반박하기도 애매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날 보며 파벨이 이해한다는 듯,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16551111178488.png“마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최선을 다해 손님을 모시겠습니다.”

  ***

1655111132931.png‘흐, 흠잡을 게 하나도 없어…….’

멜리사는 완벽하게 차려진 식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패악을 부려 나디아를 곤란하게 해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완벽해서야 도저히 테이블을 엎을 수가 없었다.

1655111132931.png‘어떻게든 트집거리를 찾아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멜리사 앞에 바삭하게 구워 나온 라트몽 요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하는 생각에 그녀의 눈이 번쩍였다.

1655111132931.png“뭐야. 라트몽 구이를 내놓으면서 에탐 소스를 내놓지 않는 거야?”

멜리사가 눈을 부라리며 에일스포드의 시녀를 노려보았다. 라트몽 구이에 에탐 소스를 내놓는 것은 오랜 전통이지만, 말 그대로 전통이었다. 에탐 소스는 만드는 방법도 까다롭고 재료도 워낙 고가라 고위 귀족이 아니면 제대로 내놓기 힘들었다. 그러나 전통은 전통. 트집 잡기엔 충분하다. 멜리사는 당장 테이블을 엎을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1655111132931.png“이딴 식으로 손님을 대접하다니! 지금 당장 나디아를 불러와서 이 어이없는 무례를…….”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해!’라고 외치려는 순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시녀가 재빨리 트롤리에서 작은 그릇을 꺼내 라트몽 구이 옆에 내려놓았다.

16551111329325.jpg“혹시 찾으실까 봐 준비해 두었습니다. 에탐 소스입니다.”

1655111132931.png“무, 뭐어?!”

멜리사는 놀라서 그릇을 바라보았다. 향이며 색이 완벽한 에탐 소스였다. 바인 후작가에서도 구하기 힘들어 잘 먹지 못하는 소스가 왜 여기에……? 다소 당황했지만 멜리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트집거리를 찾아냈다.

1655111132931.png“하. 에탐 소스에는 신선한 길란 허브가 올라가야 하는 거 몰라?”

길란 허브는 재배 조건이 까다로워 금보다 비싼 식재였다. 에탐 소스의 정석은 길란 허브로 마무리하는 것이지만, 겨우 소스에 그런 호사를 부리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멜리사도 황실 주관 연회에서나 맛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딴 촌구석에서 길란 허브가 나올 리는 없지. 멜리사는 당당해져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1655111132931.png“이딴 것도 모르고 손님을 대접하다니 에일스포드의 수준이…….”

16551111329325.jpg“길란 허브는 향이 강해 원하지 않는 분도 계셔서 따로 준비했습니다. 지금 올리겠습니다.”

멜리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녀가 트롤리에서 신선한 길란 허브를 꺼내 에탐 소스 위에 풍성하게 얹었다. 황실 연회에서 보던 것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1655111132931.png“이…… 그……! 그래! 버터! 나는 버터는 향긋한 딜 허브가…….”

16551111329325.jpg“들어간 것만 드시는 걸 아시고 마님께서 미리 주방에 지시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트롤리에서 딜 버터가 담긴 접시가 튀어나왔다. 그 뒤로도 온갖 트집을 잡으며 ‘이게 없다!’라고 소리쳤지만, 그럴 때마다 시녀는 기다렸다는 듯 멜리사 앞에 그녀가 말한 것을 내어놓았다.

1655111132931.png‘왜, 왜 자꾸 튀어나오는 거야?!’

결국 트집 잡기를 포기한 멜리사가 뚱한 얼굴로 라트몽 구이를 썰어 입안에 욱여넣었다. 이 와중에 귀한 재료로 신경 써서 만든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더 짜증이 났다.

1655111132931.png‘나디아 이 계집애는 매일 이런 맛있는 걸 먹고 산다는 거야?’

제대로 꾸며진 성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요리까지 이렇게 훌륭한 걸 보니 제대로 돈벼락을 맞은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1655111132931.png‘바인 후작가에서는 딱딱하게 마른 빵이나 먹던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1655111132931.png‘아니. 아니지. 하수처럼 굴지 마, 멜리사 바인.’

멜리사는 이를 바드득 갈며 표정을 갈무리하고 식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시녀는 멜리사가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나 싶어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생각과 달리 멜리사의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트집을 잡으며 짜증을 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시녀가 의아한 기분에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멜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하게 말했다.

1655111132931.png“영주님께서 분에 넘치는 귀한 식사를 준비해 주셨으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 영주님께 안내해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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