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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부부 사이를 위한 묘약. (96/170)

62화. 부부 사이를 위한 묘약.2022.01.05.

멜리사의 요청에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시녀의 얼굴에 화사하게 웃고 있던 멜리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삐딱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16551111458559.png“왜? 영주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후한 대접을 받은 손님이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건 문제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게 예의였다. 하지만 시녀는 멜리사의 행태를 쭉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안하무인으로 짜증을 부리던 귀족 영애가 이렇게 갑자기 정석대로 예의를 차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디아는 아니었다.

16551111458566.jpg‘정말 마님의 말씀이 맞았어.’

시녀는 나디아가 당부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감탄했다.

16551111458566.jpg‘레이디 멜리사가 분명 영주님을 찾을 거라고 하셨지.’

그럴 경우의 대처법도 분명히 알려주었다. 물론 나디아가 당부한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디아는 식사 자리에서 멜리사가 잡았던 트집거리들을 모두 예상하고 있었고, 덕분에 사용인들은 까다로운 레이디의 불평에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었다. 덕분에 멜리사를 상대하느라 곤욕을 치르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멜리사를 시중들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시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상황을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예의 바른 사용인답게 고개를 조아렸다.

16551111458566.jpg“문제가 있을 리가요. 하지만 영주님께서는 사용인들에게 일정을 잘 공유하지 않으셔서, 저도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모릅니다. 방에서 쉬고 계시면 제가 영주님께 레이디의 의사를 전하고…….”

16551111458559.png“흥. 그래놓고 ‘오늘은 영주님께서 바쁘셔서 안 되신답니다’ 하고 피하려는 거지? 누가 모를 줄 알고?”

멜리사가 속셈이 뻔히 보인다는 듯 코웃음을 흘리며 시녀를 밀치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16551111458566.jpg“레, 레이디!”

당황한 시녀가 재빨리 뒤를 따라붙었지만 멜리사는 개의치 않았다.

16551111458559.png“됐어. 이 코딱지만 한 성 따위, 누가 안내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다닐 수 있으니까.”

16551111458566.jpg“하지만 레이디. 보시는 것보다 에일스포드 성은 규모가 크고, 또 내부도 복잡해서…….”

16551111458559.png“복잡하긴 뭐가 복잡해? 난 바인 후작가의 대저택에서도 길 한 번 안 잃었어.”

16551111458566.jpg“그렇지만 레이디. 정말로 에일스포드 성은…….”

16551111458559.png“됐다니까 왜 자꾸 귀찮게 하니? 설마…….”

멜리사가 씩씩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시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16551111458559.png“혹시 너희 마님이 당부했니? 날 영주님과 만나게 하지 말라고?”

16551111458566.jpg“그럴 리가요!”

의혹 가득한 질문에 시녀가 서둘러 부정했지만 멜리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16551111458559.png‘흥. 꼴에 마님이라고 날 경계하는 거야?’

수도에서도 모든 남자들의 관심은 멜리사의 차지였다. 부유한 바인 후작의 외동딸. 그녀와 결혼하면 바인 후작이 될 수 있으니 집안의 상속에서 밀려난 차남, 삼남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녀의 관심을 구걸했다. 한때는 나디아가 사교계에서 받았던 그 관심이, 바인 후작이 바뀌는 것과 동시에 멜리사 쪽으로 넘어온 것이다. 물론 소심한 나디아는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들의 애정 공세를 직접적으로 마주한 적이 없었으나, 얼굴도 모르는 귀족 자제들로부터 선물이나 편지는 많이 받았었다.

16551111458559.png‘내가 그걸 얼마나 부러워했었는지…….’

같은 ‘바인’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 나디아와 멜리사의 입지는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선대 바인 후작이 급사하고 멜리사의 아버지가 뒤를 이으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16551111458559.png‘이제 좋은 건 전부 내 차지라고. 끈 떨어진 그 계집애가 상대나 될 거 같아?’

사실 바인 후작가의 상속녀라는 배경을 떼어놓고 봐도 멜리사 본인이 더 경쟁력 있지 않은가? 멜리사는 화려한 외모를 아름답게 꾸밀 줄 알았고, 소심한 나디아보다 훨씬 사교적이었다. 늘 방에 틀어박혀 음침하게 굴었던 나디아 바인이라니. 경쟁 상대도 못 된다. 이렇게 시녀를 앞세워 자신을 경계하는 것도 결국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나디아가 방어적으로 나오니 멜리사는 더욱 기세등등해져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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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1111488498.png“그래서? 멜리사가 종일 성을 돌아다녔다고?”

16551111488501.jpg“예, 마님. 그 넓은 성을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결국 길을 잃었대요. 자기가 ‘코딱지만 한 성’이라고 무시한 탓에 자존심을 세우느라 끝까지 도와달라는 말을 못 해서…… 겨우 방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기절하듯 잠들었답니다.”

나디아는 마리를 통해 오늘 멜리사가 무엇을 했는지 전해 들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녀를 통해 멜리사를 자극하고, 그녀 스스로 시녀의 안내를 거절하게 만드는 것이 나디아가 생각한 대처법이었는데, 정말로 그게 통했다. 오랫동안 멜리사와 함께 지내며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6551111488501.jpg“며칠은 자존심을 세우겠지요. 하지만 계속 만남을 차단하긴 어려울 겁니다.”

16551111488498.png“응. 그렇겠지.”

16551111488501.jpg“마님. 혹시 영주님께서 멜리사 님을 만나는 게…… 신경 쓰이시나요?”

16551111488498.png“당연히 신경 쓰이지!”

너무 당연한 질문에 나는 왜 그런 걸 묻냐는 의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1111488498.png“멜리사는 날 언제나 아래로 봤어. 내 물건을 빼앗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나와 가까운 사람은 마구 괴롭혀서 고생시켰지. 마리도 많이 당했잖아.”

16551111488501.jpg“대체로 사용인들에게 박한 분이셔서…… 꼭 저만 당한 건 아니었어요.”

16551111488498.png“그래도 특별히 더 괴롭힌 건 맞잖아.”

나는 멜리사의 고약함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차라리 나만 괴롭히면 마음이 편할 텐데. 나와 가까운 사람까지 표적으로 삼은 탓에 마리가 특히 고생했었다.

16551111488498.png“물론 알테어가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괜히 부딪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멜리사가 내게 했던 것처럼 알테어를 때리거나 하진 못할 테지만, 그 애는 여러모로 사람의 신경을 긁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내 대답이 영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다.

16551111488501.jpg“저는 그런 이유보다도…… 멜리사 님의 욕심이 신경 쓰입니다.”

16551111488498.png“멜리사의 욕심?”

16551111488501.jpg“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이 마님께 가는 걸 못 견뎌 하셨잖아요. 마님과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생기면 꼭 그 상대를 유혹해서…….”

마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생전에 부모님께서는 내게 맞는 짝을 찾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쓰셨다. 나와 결혼한 남자가 바인 후작이 되기에 특히 신경 써서 신랑감을 골랐는데, 그런 상대와 혼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멜리사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었다.

16551111488498.png“어…… 그러니까 마리의 말은…… 멜리사가 알테어도 유혹하려고 할 거라고?”

16551111488501.jpg“가능한 이야기지요.”

16551111488498.png“하지만…… 알테어는 엄청 무섭잖아.”

알테어가 싸늘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해도 상대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얼어붙는다. 멜리사가 겁을 모르는 레이디이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귀족 영애였다. 거칠게 싸움터를 구른 사내의 기백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리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16551111488501.jpg“맞아요. 영주님은 무서우시죠. 하지만 마님과 가까워지시면서 상당히 기세가 부드러워지셨어요. 표정도 많이 편안해지셨고요. 무시무시한 기세와 차가운 표정을 빼면 영주님은…… 조금 차가운 인상의 엄청난 미남일 뿐이라고요!”

16551111488498.png“그, 그런가?”

16551111488501.jpg“그럼요. 시녀들도 영주님이 멋지다며 수군대는걸요. 엠마 양은 ‘다들 영주님의 예전 모습을 몰라서 저러는 거예요!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번 보면 저런 말은 절대 못 할걸요?’라고 했지만요.”

마리가 엠마의 말투를 따라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16551111488501.jpg“어쨌든 멜리사 님은 예전 영주님을 전혀 모르고, 그러니까 접근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죠. 영주님을 괴롭히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영주님을 가지고 싶어서요.”

16551111488498.png“어어…….”

그건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내게 알테어는 사람의 목을 뎅겅 자르는 무시무시한 악역의 느낌이 강했다.

16551111488498.png‘결혼식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아주 무서웠고…….’

함께 지내며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다들 첫인상은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이젠 타인이 보기에도 한결 누그러진 기세라고? 얼떨떨하게 눈을 껌뻑이니 마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11488501.jpg“이러니 제가 늘 걱정이지요. 멜리사 님은 성격은 별로지만, 얼굴이나 몸매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이상향 그 자체예요. 영주님도 남자이니 그런 여자가 작정하고 덤비면 장담할 수 없다고요.”

16551111488498.png“설마 알테어가……?”

16551111488501.jpg“원래 아닐 것 같은 사람이 제일 밝히는 법입니다. 지금도 밤마다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시잖아요? 절대 방심하면 안 됩니다, 마님.”

알테어가 멜리사의 유혹에 넘어간다고? 내 상상력이 빈약한 탓인지 그런 모습이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는 이런 문제에 해박한 시녀이니 아예 틀린 조언도 아닐 테다.

16551111488498.png“그렇지만 이런 건 내가 방심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유혹을 당하는 대상인 알테어의 마음가짐이 문제지. 그러나 마리의 생각은 달랐는지, 그녀가 다시 한번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16551111488501.jpg“다른 쪽으로 눈 돌릴 틈을 안 주면 되지요.”

마리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은밀하게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니 맑은 분홍빛의 액체가 든 작은 병이었다.

16551111488498.png“이게 뭐야?”

16551111488501.jpg“귀부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소문이 돌고 있는 향유입니다. 부부 사이를 좋게 하는 마법의 향유래요.”

16551111488498.png“마리……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 사기당한 게 분명해!”

나는 볼을 부풀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16551111488498.png“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서 환불받자!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술로 사람을 낚다니…….”

영민한 마리가 걸려들 정도라면 보통 사기꾼이 아닐 거다.

16551111488498.png‘마리가 내 걱정에 판단력이 흐려진 게 틀림없어.’

나는 미안한 마음에 더욱 환불 의지를 불태우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마리는 내 반응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액체가 담긴 병의 뚜껑을 열었다.

16551111488501.jpg“마님. 제가 그런 사기에 당할 사람인가요. 시녀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다면 정말 확실한 물건이에요. 하지만 제가 계속 말해도 납득 못하실 테고…….”

마리는 익숙하게 액체를 덜어 내 목과 어깨, 팔과 다리에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좋은 향기가 코를 자극하고 몸이 살짝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몽롱하고 나른한 느낌에 ‘으음’ 하고 낮은 침음을 흘리자 마리가 역시 틀리지 않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16551111488501.jpg“효과는 직접 체험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이걸 환불받아야 할지, 마님께서 알려주세요.”

16551111488498.png“내일 아침? 부부 사이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리가 없잖아. 그 사기꾼이 그렇게 장담하면서 이걸 팔았어? 역시 제대로 속은 게…….”

16551111488501.jpg“마님. 내일 아침이요.”

마리가 쉿- 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마리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

16551111488498.png‘왜 이렇게 덥지?’

나는 침대에서 뒤척이다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계속 몸에 열이 올라 견디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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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11488498.png‘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기침도 안 나고, 무엇보다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힘없이 열이 오르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열이 오르며 힘이 넘치는데, 뭔가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게 문제였다.

16551111488498.png“하아…….”

나는 더운 숨을 토해내며 슬립을 벗어 던졌다. 덕분에 가장 기본적인 속옷만 입은 상태가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51111488498.png‘마리를 불러서 시원한 물이라도 마셔야겠어.’

그런 생각으로 설렁줄을 당기려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16551111582277.png“윽!”

고개를 돌리자 알테어가 문 앞에 서서 차마 들어오지 못한 채 커다란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16551111582277.png“방 안에 왜 이런 향기가 가득…….”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리던 알테어가 침대 위에서 설렁줄을 당기기 위해 기어가고 있던 날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평소라면 속옷 차림으로 기어가는 모습을 보였으니 부끄러워서 펄쩍 뛰었을 텐데. 어쩐지 오늘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16551111488498.png“알테어…….”

나른하게 알테어의 이름을 부르며 헤헷 웃음을 흘리자 코와 입을 막고 있던 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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