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 정도는 봐줘.2022.01.09.
“도대체 이게…….”
찡그린 알테어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굳어 있던 알테어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입을 굳게 다물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평소라면 가까워진 거리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을 테지만 지금은 몸이 너무 나른해서 알테어로부터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알테어는 탐색하듯 내 목덜미 근처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방에 들어설 때만큼이나 크게 놀란 듯 당혹스러운 얼굴로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게 무슨…….”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인가 싶어 눈을 껌뻑이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향기가 어쩌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나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나는 팔을 들어 살결에 코를 박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의 향에 코가 마비된 건지 특별한 냄새는 찾아낼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시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내게 다가왔다.
“이상한 냄새가 아니라…… 혹시 몸에 향유를 발랐어?”
“네. 마리가 발라줬어요. 요즘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라는데, 아무래도 사기꾼에게 당한 것 같아요.”
“사기꾼에게 당해?”
사기꾼이라는 소리에 알테어의 눈이 매섭게 반짝거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부부 사이를 좋게 하는 마법의 향유라는데,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사기꾼에게 당한 게 분명하죠.”
“……그런 의미라면 사기는 아닌 것 같은데.”
“네?”
“……무슨 이유로 이 향유 덕분에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는 건지는 확실히 알겠으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알테어가 그걸 어떻게 알지? 신기해서 눈을 크게 뜨자 왜인지 알테어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상태가 왜 이런지 몰라? 마리가 발라줬다는 향유 때문이잖아.”
“내 상태요……? 좀 덥긴 한데…….”
“이봐. 그건 단순히 더운 게 아니라…….”
알테어가 말꼬리를 흐리며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덕분에 그의 머리가 엉망이 되어 뒤쪽 머리카락이 위로 비죽 솟아났다. 나는 알테어의 머리를 정돈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그가 휙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했다.
“지금은 안 닿는 게 좋아.”
“왜요?”
“향유에 그…… 미약 성분이 섞인 것 같아. 닿으면 네가 더 곤란해질 거야.”
“네? 미, 미, 미…….”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리가 묘하게 웃었던 것도, 이상하게 체온이 높았던 것도, 알테어가 들어서자마자 곤란한 얼굴로 코를 틀어막았던 것도. 왜 그랬던 건지 모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미쳤어, 마리!’
민망함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체온이 더욱 뜨거워지는 듯했다.
“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필사적으로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결백을 주장하니 알테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 내 순진한 부인이 이런 걸 쓸 위인이 못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알걸.”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이 반응이 칭찬인지 험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도의 귀부인들은 영악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멍청하게 손을 놓고 있다가 제 손에 쥐고 있는 걸 잃는 걸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미묘한 기분이 겉으로 드러난 건지 알테어가 유심히 내 얼굴을 살폈다. 그게 꼭 이유를 묻는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난 그렇게 순진하지 않아요. 머릿속으로는 항상 어, 엄청난 생각들을 한다고요.”
사실 ‘엄청난 생각들’ 따위는 해본 적도 없다. 당장 눈앞의 일들을 해결하고 잘살아보려는 생각뿐이지. 그래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턱을 살짝 치켜들고 괜한 허세를 부려보았다. 하지만 알테어가 헛웃음을 흘리는 걸 보니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엄청난 생각, 뭐?”
“네?”
“항상 엄청난 생각들을 한다며. 그 엄청난 생각, 뭔지나 들어 보려고.”
알테어가 팔짱을 낀 채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까지는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다급하게 ‘엄청난 생각’이 뭐가 있을까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엄청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런 쪽으로는 영 젬병인 데다, 달아오른 체온으로 머리까지 둔해진 모양이었다.
“하아…….”
나는 답답함과 함께 뜨거운 숨을 깊이 토해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알테어가 몸을 움찔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손가락으로 제 팔뚝을 톡톡 두드리는 게 꽤 초조한 기색이었다.
“시녀가 감히 주인의 밤 생활에 관여하다니. 날이 밝으면 혼쭐을 내줘야겠군.”
“마리를 혼내다니, 말도 안 돼요. 귀부인의 시녀들은 원래 그런 일을 하는걸요. 이번 일도 날 도우려고 그런 거예요. 이런 건 귀부인의 일이니까 알테어는 관여하지 말아요.”
“귀부인의 일은 무슨. 이런 게 도대체 왜 필요한데? 이런 게 없어도 난 항상…….”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던 알테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히 알테어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 그가 작게 ‘젠장!’ 하고 거칠게 벽을 내리치더니,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이런 게 없어도 난 항상 당신한테 안달 난 상태라고.”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이 가까운 거리였다. 심장이 쿵쿵 뛰어 눈을 크게 뜨니 알테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이불로 손을 뻗었다.
“어어…….”
왜 그러나 싶어 눈을 껌뻑이고 있는 사이 그가 이불로 내 몸을 둘둘 말아 침대에 얌전히 눕혔다. 순식간에 돌돌 말린 이불에 갇혀 자유를 잃어버린 나는 영문을 몰라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건드려. 이번에 넘어갔다간 매번 그 요망한 시녀가 수를 쓸 거 같으니까.”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누워 이불과 한 몸이 된 나를 끌어안았다.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웠지만, 두꺼운 이불이 방어막이 되어준 탓에 그의 손길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알테어가 이미 마리에게 졌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처음 같이 밤을 보낸 날이요. 그때도 마리가 옷을…….”
“아.”
알테어가 어렵지 않게 그날을 떠올린 건지 미간을 찌푸렸다.
“시작부터 문제였던 셈인가…….”
“그게 왜 문제예요. 저도 원했고, 알테어도 원했으니 문제없어요.”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았다면, 마리가 아무리 손을 썼어도 그런 전개로 흐르진 않았을 거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자 알테어가 잠시 말이 없더니 곧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건 이불 너머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그걸 알면서 왜 갑자기 이런 수를 써.”
“마리는 날 걱정해서 그런 거예요. 멜리사가 왔잖아요.”
“멜리사?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지?”
“그 애는 항상 제가 가진 걸 욕심냈거든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요. 그런데 알테어는 아주 근사하니까, 분명 멜리사가 욕심내서 뺏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최대한 차분하게 상황을 전했지만 알테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좋은 말로 돌려 했지만 결국 알테어가 멜리사와 부정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한 셈이라 기분이 나빠진 걸까?
“알테어를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날 근사하다고 생각해?”
서둘러 변명을 덧붙이려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하죠?”
알테어 정도면 훌륭한 신랑감이다. 외모도 잘났고 아내를 강압적으로 대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거지 남작이었지만, 이제는 마석 광산 덕분에 부자가 됐으니까!’
만약 지금의 조건대로 신붓감을 찾았다면, 감히 나 따위가 알테어와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훨씬 번듯한 아내를 얻었을 거야.’
아름답고, 집안에서도 사랑받고, 사교적이고……. 온갖 좋은 점을 다 모아둔 아가씨들이 줄을 섰을 테다. 그런 생각에 잠시 침울한 기분에 빠지려는 순간 알테어가 다소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 내게 한 적 없어.”
“낯부끄러운 말은 안 좋아하는 거 같아서…… 이런 걸 좋아하면 자주 할게요!”
“누가 좋아한대? 그냥,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을 뿐이야.”
알테어가 황급히 부정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애써 날 외면하는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무튼, 멜리사 그 여자는 걱정하지 마. 어떤 인간인지는 알고 있으니까. 넘어갈 일 없어.”
“멜리사와는 잠깐 마주쳤을 뿐이잖아요. 그걸로 전부 파악한 거예요?”
역시 주요 등장인물의 통찰력! 감탄해서 눈을 반짝이자 알테어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뭐어…… 그런 것도 있고…… 애초에 내가 왜 그 여자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군. 난 여색을 밝히지 않아.”
“멜리사는 예쁘잖아요.”
“예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일부러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무 정신 사납게 생겼는데.”
“어어…… 보통은 그걸 화려하게 아름답다고 해요.”
“전혀 모르겠어. 난 좀 더…….”
알테어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좀 더?”
뒷이야기가 궁금해 되묻는 것으로 대답을 독촉하자, 대신 그의 따뜻한 입술이 쪽- 하고 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오늘은 안 건드린다며? 그런 의문을 담아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정도는 봐 줘. 그래도 되잖아…….”
*** 다음 날이 밝았다. 어젯밤에 일을 치렀을 거라 생각했는지 평소보다 느긋하게 시중을 들러 온 마리가 깨끗한 침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아무 일도 없으셨나요?”
“음…… 알테어는 시녀의 수에 넘어가지 않겠대. 앞으로는 나서지 말라고 했어.”
“어머나.”
내가 대신 알테어의 경고를 전하자 마리는 전혀 겁먹지 않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요. 영주님의 인내심은 대단하네요.”
“멜리사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말랬어. 그 애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다던데.”
“다 알고 있다고요?”
“응. 한눈에 멜리사를 파악하다니. 신기하지 않아?”
“글쎄요. 과연 ‘한눈에’ 일까요.”
마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속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는 모양새였지만 내가 아무리 쳐다보아도 마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과묵한 시녀의 자질을 한껏 발휘할 생각인 듯했다. 마리에게 정보를 얻길 포기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자 그제야 그녀의 입이 열렸다. 물론 주제는 달랐다.
“오늘은 식사하신 뒤에 파벨 집사를 만나보셔야 할 것 같아요.”
“파벨을? 왜?”
“드디어 판매용 마석이 준비됐다고 합니다. 마님께 먼저 보여드리고 싶대요. 아무래도 수도 귀족들이 마석을 잘 아니까요.”
판매용 마석! 오래 기다리던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