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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꼬리가 길면 잡힌다. (98/170)

64화. 꼬리가 길면 잡힌다.2022.01.12.

마석은 상단과의 계약금만으로도 영지의 사정을 완전히 바꿔 놓는 귀한 재산이다.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일스포드에 돈이 돌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용하던 시골 영지에 많은 자유민들이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돈을 벌어 새로운 터전을 일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희망은 틀린 게 아니었다. 막 개발을 시작한 마석 광산에는 언제나 인력이 부족했다. 광산에 들어갈 인부도 중요했지만, 인부들의 식사를 준비하거나 그들이 사용할 장비를 제공하는 등 생각보다 다양한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몰려든 인력을 따라 가족들도 함께 에일스포드로 이주해 영지는 날이 다르게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인구는 곧 경쟁력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이 몰리니 돈 냄새를 맡은 장사꾼들이 자연스럽게 몰려 왔고, 장사꾼들이 몰리기 시작하니 당연한 것처럼 영지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낙엽만 굴러다니던 가난한 시골 영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16551111942346.png‘그러니 마석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야지.’

워낙 많은 곳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이니 허투루 할 수 없다.

16551111942351.png“어떠십니까, 마님?”

나는 파벨이 탁자 위에 늘어놓은 마석을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어느 것이 에일스포드의 마석이고, 어느 것이 다른 영지의 마석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16551111942346.png‘순도 높은 마력을 보유한 마석일수록 영롱한 빛을 낸다고 알려져 있지.’

왼쪽에 쌓여 있는 마석들은 맑은 수정처럼 찬란한 오색 빛이 감도는 반면, 오른쪽에 쌓여 있는 마석들은 광택이 돌긴 하지만 반짝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에일스포드의 마석은 당연히 왼쪽의 맑은 빛을 내는 것이었다.

16551111942346.png“확실히 차별점이 느껴지겠어요.”

16551111942351.png“예. 시각적으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시각적인 효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다. 그러니 이렇게 시각적으로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건 긍정적인 요소였다.

16551111942351.png“온갖 좋은 것들이 모인다는 수도에서도 이런 순도 높은 마석은 찾기 힘들어요. 아마 황실을 비롯해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집안에서나 쓸 수 있지요.”

희귀한 것은 상위에 있는 자들이 독점한다. 당연한 이치다.

16551111942346.png‘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지.’

권력자들은 남들이 쓰지 않는 특별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함을 드러내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 ‘특별함’이 사라지면? 에일스포드의 마석 광산에서는 이런 순도 높은 마석이 매일 쏟아지고 있다. 순도가 높다는 건 효율이 높다는 뜻이지만, 과시하기 좋아하는 자들에게 효율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당연히 공급량을 조절해 시중에 풀리는 수량을 조절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예전만큼의 특별함은 줄어든다. 좋은 마석을 앞에 두고 어두운 표정을 지은 탓에 파벨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굳이 숨길 이야기도 아니라 나는 솔직하게 나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내 의견을 경청하던 파벨이 그런 생각은 못 했다며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16551111942351.png“역시 귀족들이란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가격에 효율 좋은 마석을 쉽게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은 일일 것만 같은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최상위층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니요.”

16551111942346.png“정점에 선 자들에게는 편리함이나 효율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마련이니까요.”

16551111942351.png“그렇다면 저희는 어떤 방향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게 좋을까요?”

16551111942346.png“흔히 취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전략이죠.”

나는 빛이 나는 마석을 하나 집어 들어 영롱한 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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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11942346.png“하나는 최상위층 소비자는 포기하고 그 아래의 시장을 노리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효율과 편리함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될 테니, 우리 마석이 상당히 매력적이겠죠. 시장이 크고 대중적으로도 크게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거예요.”

16551111942351.png“다른 하나는요?”

16551111942346.png“반대로 나머지 시장을 버리고 최상위층 소비자에게만 마석을 공급하는 거지요. 시장은 작고 대중적으로도 이름은 알릴 수 없지만, 오히려 수익은 이쪽이 클 거예요. 최상위권은 소비하는 금액 자체가 다르니까요.”

16551111942351.png“흐음.”

내 이야기에 파벨이 생각에 잠겨 마석을 바라보았다. 둘 중에 어떤 전략이 더욱 좋은 선택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16551111942351.png“저라면 전자를 택하겠습니다.”

오랜 고민이 끝났는지 파벨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16551111942346.png“어째서요?”

16551111942351.png“우리 마석은 대량으로 생산되니, 아무리 공급을 조절해도 특별함을 유지하는 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상위층 소비자들에겐 영업하는 것도 꽤 비용이 들어갈 것 같고요.”

16551111942346.png“맞아요. 하지만 수도 귀족들의 유행은 최상위층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황실의 입맛을 따르죠. 제대로 귀족들에게 장사하고 싶다면 황실이 우리를 선택하게 해야 해요.”

16551111942351.png“그럼…… 전자는 버리고 후자를 택하시는 겁니까?”

16551111942346.png“음. 꼭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할까요?”

먼저 두 가지 방향을 제시했던 내가 애매하게 질문하자 파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1111942346.png“편리하게 선택하자면 둘 중 하나를 취하면 돼요. 하지만 조금 어렵더라도 둘 다 취하는 게 상책이죠.”

16551111942351.png“가능하다면 당연히 그게 좋겠지만…….”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16551111942346.png‘당연히 생각을 해 뒀지.’

마석 광산이 발견된 후로 쭉 이 부분을 고민해왔고, 나름의 해답은 찾은 상태였다.

16551111942346.png“자, 파벨. 이걸 봐요.”

나는 파벨에게 손짓해 그를 테이블 앞으로 이끌었다. 테이블에는 수많은 마석이 쌓여 있었다. 파벨이 준비한 것이니 당연히 수십, 수백 번을 보았을 것이다.

16551111942346.png“크게 분류하면 에일스포드의 마석과 다른 영지의 마석이 다르죠. 이건 확연해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 에일스포드에서 채굴한 마석도 미묘하게 달라요. 예를 들면, 이 마석보다 이 마석의 빛이 더욱 영롱하죠?”

나는 마석 더미 속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과 덜 반짝이는 것을 골라 파벨 앞에 내밀었다. 눈으로도 확연히 보이는 차이였기에 파벨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이게 왜 중요한지는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조금 더 명확하게 핵심을 짚어 주기로 했다.

16551111942346.png“내 말은, 에일스포드의 마석들 사이에서도 등급이 갈린다는 거였어요. 우리 마석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고급품과 하급품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죠.”

16551111942351.png“아……!”

그제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챈 듯 파벨이 눈을 크게 뜨며 안경을 고쳐 썼다.

16551111942351.png“보석처럼 마석에도 등급을 매겨 최상위층에게 공급하는 물품과 일반적으로 유통할 물품을 구분하자는 말씀이시군요?”

16551111942346.png“정확해요.”

16551111942351.png“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입니다. 마석에 등급을 매긴다니요.”

광물에 등급을 매기는 건 흔한 일이다. 가장 귀한 보석이라는 다이아몬드도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최고급의 다이아몬드는 상상하기 힘든 가격을 자랑하고, 최하급의 다이아몬드는 루비나 사파이어보다도 못한 가격을 받는다. 그러니 마석에도 똑같이 이런 방식을 적용할 수 있을 테다.

16551111942346.png“여태까진 그럴 수가 없었죠. 마석이 워낙 귀했으니, 그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공급량이 많아지면 그 사이에서도 분명히 등급을 나눌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마석의 등급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과 이를 정확하게 판단해 줄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다.

16551111942346.png“그래서 우리가 마석 등급도 새로이 정립하면 어떨까 해요. 직접 등급을 매겨서 보증서도 발행하고요. 그럼 에일스포드는 명실상부한 마석 산업의 중심에 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기준에 따라 분류한 가장 뛰어난 마석을 황제에게 선물로 보내면…….

16551111942346.png‘엄청난 이슈가 될 거야!’

상상만 해도 즐거운 상황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파벨을 바라보니 그가 조금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6551111942346.png“……파벨?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홀로 세운 계획에 뭔가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나 싶어 걱정스럽게 파벨을 부르니 그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16551111942351.png“아뇨. 조금 신기하다 싶어서요.”

16551111942346.png“뭐가요?”

16551111942351.png“마님은 평소에 조용하고 나서는 법이 없으신데, 이런 사업 이야기를 할 때면 다른 사람처럼 이야기를 잘하십니다.”

16551111942346.png“그, 그거야……!”

소심한 사람은 사람 대하는 걸 어려워할 뿐이지 바보는 아닌걸! 계획을 세우고, 검토하고, 고민하는 건 나의 특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사교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16551111942346.png‘오래 고민하고 세운 계획이니 떨지 않고 말할 수 있어.’

물론 이야기를 꺼내는 상대가 낯선 사람이었다면 잔뜩 쫄아서 입도 못 열었을 테지만……. 상대는 파벨이니까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에게 낯을 가리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16551111942346.png“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고요.”

평소의 내가 파벨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깨닫자 괜히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16551111942346.png“물론 이건 의견일 뿐이고, 알테어가 추가로 검토해서 확실한 계획을 세우겠죠.”

누군가의 앞에 나서서 지휘하는 건 리더인 알테어의 몫이다. 나는 이렇게 뒤에서 의견을 내고 서포트하는 것으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16551111942346.png“참, 파벨. 블란이 돌아왔다면서요.”

16551111942351.png“아.”

적당히 마석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돌리자 미소 짓고 있던 파벨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16551111942351.png“네. 이제 막 돌아와서 영주님께 보고 중입니다.”

  *** 알테어는 진지한 얼굴로 블란과 마주하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블란도 평소와 달리 화사한 미소는 지운 채 심각한 태도로 보고를 시작했다.

16551112063175.png“수도에서 조사하는 동안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16551112063179.png“어떤 점이 마음에 걸려서 예정된 복귀까지 늦추면서 조사를 한 거지?”

사실 알테어가 지시한 조사는 한참 전에 끝난 상태였다. 알테어는 바인 후작가에서 나디아가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상속 과정에서 바인 후작이 그녀의 권리를 침해한 것은 없는지 알아보라는 명을 내렸고, 블란은 유능하고 착실하게 그 부분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 해답은 이미 서면을 통해 간단한 보고가 끝난 상태였다. 바인 후작은 조카였던 나디아를 하인보다 못하게 대우하며 그녀를 박대했다. 작위를 상속받는 과정에서 불합리하게 나디아의 개인 재산을 착취한 것 역시 명백했다. 그 서면 보고를 읽고 알테어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감히 내 부인을,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을 그따위로 대우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당시의 나디아는 알테어의 부인도,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도 아닌 완벽한 타인이었지만,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블란이 돌아오면 더욱 자세한 정황을 물어 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작정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귀환이 늦어졌다. 허투루 수도에서 뭉개고 있을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신중하게 말을 아끼며 귀환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알테어의 매서운 눈빛이 추궁하는 부분을 블란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항명이라 여길 수도 있는 부분이니 충분한 이유가 필요했고, 블란은 자신이 가져온 이야기가 모든 추궁을 벗어날 열쇠라 확신했다.

16551112063175.png“바인 후작은 작위를 상속받기 전에 엄청난 빚이 있었다고 합니다. 운 좋게 상속을 받으면서 그 빚이 모두 해소되었는데, 이상한 건 그가 빚을 청산한 후에도 후작가의 재산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16551112063179.png“그건 나디아의 개인 재산을 착취했기 때문 아닌가?”

16551112063175.png“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빚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려서 계속 뒤를 파다가…….”

16551112063179.png“파다가?”

조심스럽게 말꼬리를 흐리는 블란의 태도가 답답하다는 듯 알테어가 질문으로 재촉하자, 그가 어렵게 입을 뗐다.

16551112063175.png“선대 후작 부부 앞으로 막대한 사망 보험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16551112063179.png“뭐?”

16551112063175.png“수령인은 선대 후작의 딸인 우리 마님이 아니라, 동생인 현 바인 후작으로 되어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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