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매운맛. (99/170)

65화. 매운맛.2022.01.16.

보험은 그리 오래된 문화가 아니다. 당장 하루 먹고 살기 힘든 평민들은 도대체 그게 왜 필요한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수도의 부유한 귀족들은 이런 최신 문화를 누구보다 먼저 즐기는 걸 좋아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유행이었다. 유행에 크게 관심 없는 알테어도 풍문으로 각종 보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이니 신기하고 색다른 유행이긴 했다. 그러니 수도 사교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바인 후작 부부라면 보험을 들어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령인이 선대 후작의 외동딸이 아니라 동생이라는 건…… 누가 들어도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다.

16551112174107.png“명백하게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어째서 이 부분이 문제가 안 됐지?”

16551112174113.png“선대 후작께서 보험사와 직접 계약하신 내용이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16551112174107.png“선대 후작께서 직접?”

16551112174113.png“네. 보험사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지급을 거부하려고 혈안인데, 그들이 순순히 보험금을 지급한 걸 보면 절차에는 문제가 없었던 걸로 생각됩니다.”

16551112174107.png“과정은 적법했지만, 상황은 의심스럽다……라.”

상대는 고위 귀족이니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 문제를 키울 수 없었을 거다.

16551112174107.png“들을수록 의아하긴 하군.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는 걸 보면 그리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은 아닌 듯한데, 단순히 운이 좋아 이런 식으로 어려운 상황을 피해 갔다는 건가.”

16551112174113.png“확실히 냄새가 나지요?”

블란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알테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12174107.png“선대 후작 부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지금의 바인 후작이 얻은 이득이 너무나 크군. 우연이 겹쳐 생긴 행운치고는 너무 크지.”

16551112174113.png“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정황을 정리하는 알테어에게 블란이 조심스럽게 중요한 정보를 덧붙였다.

16551112174113.png“그 보험은 마님 앞으로도 들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6551112174107.png“뭐? 나디아 앞으로도?”

16551112174113.png“예. 선대 후작 부부께서 들었던 것과 동일한 보험입니다. 수익자 역시…… 지금의 바인 후작이고요.”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알테어의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여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것이다.

16551112174107.png“……나디아 역시 선대 후작 부부께서 마차 사고를 당하실 때 함께 타고 있었지.”

16551112174113.png“네. 혼자 살아남으셨지요.”

블란이 조사 과정에서 품었던 의심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는 선대 후작 부부가 사망한 마차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수도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알테어는 블란의 검에는 약간의 의문-사실 누구나 알테어의 기준에서는 의문스러운 실력이겠지만—을 품고 있었으나, 첩보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높은 점수를 주었다. 첩보에 통달한 기사의 직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16551112174113.png“명령을 내리신다면 그 사고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하겠습니다.”

16551112174107.png“명령이 필요한가?”

한마디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알테어의 눈빛에 블란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16551112174113.png“아뇨.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모두 알겠습니다.”

16551112174107.png“그쪽에서 작정하고 묻었다면 밝히기 쉽지 않을 거다.”

16551112174113.png“그게 권력의 무서운 점이지요.”

그래서 고위 귀족과 엮이면 일이 피곤해진다. 그러나 블란은 절대 기죽지 않았다.

16551112174113.png“하지만 밝혀낼 수 있습니다. 에일스포드의 기사는 한 번 물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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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란은 알테어에게 보고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복도에 서서 집무실이 열리길 기다리던 파벨과 마주쳤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형제였지만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과정은 없었다.

16551112174113.png“들어가도 돼. 내 볼일은 끝났어.”

블란이 살짝 옆으로 이동하며 길을 터주었지만, 파벨의 목적은 알테어를 만나는 게 아니었다.

16551112230046.png“영주님께 볼일이 있는 게 아냐.”

16551112174113.png“어? 그럼 나?”

블란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16551112174113.png“설마…… 오랜만에 만났다고 안부라도 물으러 온 거야? 제발 아니라고 해줘. 그럼 소름 돋아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잔뜩 질린 얼굴로 제 팔을 마구 쓰다듬는 블란의 모습에 파벨이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그의 옷을 질질 잡아끌었다.

16551112230046.png“소름 돋는 것 따위로 인간은 안 죽어.”

16551112174113.png“내가 최초의 사례가 될지도 모르잖아.”

16551112230046.png“헛소리는. 내가 그따위 용건으로 찾아왔을까 봐?”

16551112174113.png“혹시나 했지.”

16551112230046.png“역시나 아니니까 부산스럽게 굴지 마. 마님이 잠깐 보자고 하셔.”

16551112174113.png“어? 마님께서?”

그렇지 않아도 알테어와 나디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온 참이라 뜨끔해서 어깨를 움찔하니 파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16551112230046.png“……반응이 이상한데.”

첩보에 능한 기사도 혈육의 통찰은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을 술술 털어놓기는 곤란한 상황이라, 블란은 파벨이 이상하게 여길 걸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16551112174113.png“오랜만에 봐서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16551112230046.png“아직 공유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소리군.”

파벨이 태연하게 안경을 고쳐 쓰고 상황을 평가했다. 하필 그게 정답이라 블란이 요란하게 헛기침하자, 파벨이 다시 혀를 차며 제 형님을 위아래로 훑었다.

16551112230046.png“이렇게 티가 나는데, 본업은 어떻게 문제없이 하는 거야?”

16551112174113.png“밖에서는 멀쩡하게 일하거든?”

16551112230046.png“오. 안에서는 멍청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로군.”

16551112174113.png“야!”

시답잖은 대화에 버럭 했던 블란이 곧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파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16551112174113.png“마님께선 갑자기 날 왜 찾으시는데?”

16551112230046.png“……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파벨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말을 아꼈다.

16551112230046.png“마님께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16551112174113.png“음. 심각한 문제일 거라는 예감이 마구 들고 있는데.”

16551112230046.png“뭐…….”

반쯤은 농담으로 꺼낸 말에 파벨이 부정하지 않자 블란의 얼굴에도 진지한 기색이 서렸다.

16551112174113.png“정말 심각한 일이라고?”

파벨은 두 번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는 말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단호한 그의 태도에 정말로 심각한 일임을 직감한 블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16551112295463.png‘지금쯤이면 보고는 끝났겠지?’

나는 블란이 오기를 기다리며 파벨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를 종이 위에 정리해 보았다. 알테어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파벨과 나눴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석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준과 기관을 만드는 방안도 덧붙이다 보니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졌다.

16551112295463.png‘확실히 나는 글이 편해.’

말은 한 번 내뱉으면 끝이지만, 글은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으니 혹여나 실수하지 않을까 늘 걱정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 제격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는 동안 내 머릿속도 함께 정리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16551112295463.png‘그러고 보니 이 마석 관련해서도 소설 속에서 이야기가 더 있었지.’

소설 속의 알테어는 마석의 사업성을 다른 방향에서 찾아냈었다. 그가 선택한 방식 역시 ‘과시욕’을 자극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생각한 등급제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마석은 일종의 건전지라 마도구에 장착하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마석을 써도 겉으로 ‘내가 이렇게 좋은 마석을 쓰고 있답니다!’ 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16551112295463.png‘그래서 알테어는 좋은 마석을 쓰고 있다는 걸 과시할 수 있도록 마석을 노출할 수 있는 마도구들을 개발했었지.’

변방의 귀족이 빠르게 부유해진 이유는 단순히 마석 광산의 발견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다.

16551112295463.png‘그런 전략이 없었다면 견고한 수도 귀족 사회에서 마석을 팔긴 힘들었을 거야.’

중요한 건 내가 읽었던 소설 속의 시점에는 그런 마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여럿 존재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장인들은 모두 에일스포드 공방 소속이라, 그들은 마석 뿐만 아니라 마도구로도 큰 수익을 얻은 것으로 기억한다.

16551112295463.png‘나는 인위적으로 마석의 발견과 판매를 앞당긴 상태라 그런 장인들을 찾는 것까지는 시도하지 못했지만…….’

이건 소설 속 악당 알테어가 직접 벌였던 사업이니, 내가 살짝 힌트만 흘리면 그가 빠르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석을 과시할 수 있는 마도구의 개발은 마석의 등급제와 맞물려 더욱 시너지를 낼 수 있을 터.

16551112295463.png‘느껴진다. 대성공의 향기!’

나는 알테어가 빠르게 이 사업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종이에 ‘마도구 장인 육성’ 항목을 적어 넣었다. 신나게 펜을 놀리는 사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1112324616.png“마님. 저어…… 밖에…….”

16551112295463.png“응. 들여보내!”

당연히 파벨과 블란이 온 것이라 생각하고 방문객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고 등장한 건 멜리사였다. 오늘은 바인 후작가에서부터 데려온 자신의 전속 시녀까지 대동한 채였다.

16551112295463.png“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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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의 모습에 얼떨떨하게 몸을 일으키니 멜리사가 가소롭다는 듯 날 훑어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16551112324634.png“이게 무슨 마님이라고.”

비웃음이 담긴 혼잣말이 다소 컸던 탓에 문을 열어 준 안나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16551112324637.jpg“길 막지 말고 비켜.”

멜리사가 바인 후작가에서부터 데려온 전속 시녀가 다소 짜증스럽게 안나를 밀어냈다. 마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좀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잠시 성을 비운 상태였다.

16551112295463.png‘수도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가 왔다고 했지.’

마리가 자리를 비워도 되겠냐고 묻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 중요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허락했는데. 하필 멜리사가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16551112295463.png‘안나가 상대하기엔…… 이쪽이 너무 맵지.’

나는 안나가 곤욕을 치르기 전에 얼른 가보라는 듯 눈짓했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그녀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안나를 보내고 자세히 상황을 살피니 멜리사가 데려온 시녀는 나도 잘 아는 아이였다. 달리 말하면, 오래도록 바인 후작가에 있었던 시녀이고, 내가 바인 후작가에서 당했던 취급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나를 바라보는 시녀의 눈빛에 무시가 가득했다. 괜히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시녀의 무례한 눈빛을 외면하고 멜리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16551112295463.png“무슨 일이야, 멜리사?”

16551112324634.png“그걸 몰라서 묻니? 네가 날 방해하고 있는 걸 모를 줄 알아?”

16551112295463.png“방해?”

16551112324634.png“그래! 내가 네 남편을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

16551112295463.png“멜리사. 무슨 소리인 줄 전혀 모르겠어. 난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준비하고 융숭하게 대접한 것밖에 없는걸.”

나는 멜리사가 에일스포드에 온 이후 그녀의 취향에 맞춰 모든 것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에 멜리사도 민망한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물론 멜리사는 그런 진실에 굴복할 애가 아니었다.

16551112324634.png“늘 시녀를 붙여 감시하다니. 숨이 막혀 죽겠어.”

16551112295463.png“감시가 아니라 널 제대로 안내하려는 거지. 에일스포드 성을 잘 모르잖아. 어제도 알아서 돌아다니겠다며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며.”

16551112324634.png“그, 그거야!”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가 나오자 멜리사가 발끈했다.

16551112324637.jpg“아가씨.”

멜리사가 폭발하듯 짜증을 내려는 걸 그녀의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리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그런 시녀에게 먼저 소리쳤을 멜리사인데, 지금은 어쩐 일인지 순순히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짜증을 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16551112324634.png“아무튼 네 남편을 만나야겠어. 자리를 마련해 줘.”

16551112295463.png“응. 이야기는 전할게. 하지만 워낙 바쁜 사람이라 시간 내기가 힘들 수도 있어.”

16551112324634.png“반드시 시간을 내야 할걸? 아버지께서 남작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내게 서신을 맡기셨거든. 꼭 직! 접! 전하라고 했어.”

16551112295463.png“그런 게 있다면 왜 첫날 바로 말하지 않았어?”

16551112324634.png“그, 그건…… 잠시 잊었을 뿐이야!”

이건 핑계다. 거짓말이다. 누가 봐도 명백했다. 하지만 진실을 확인하고 거절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16551112324634.png“마침 편지를 가져왔으니 네가 직접 안내해. 워낙 중요한 편지라, 남작님께서도 기꺼이 시간을 내주셔야 할 거야.”

내가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다 안다는 듯 멜리사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녀의 시녀가 가소롭다는 듯 날 향해 코웃음을 흘리는 순간. 복도가 묘하게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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