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올바른 순서.2022.01.19.
“여기 사용인들은 조용히 다니는 법을 모르나 봐?”
자신을 방해한다고 여긴 건지 멜리사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에일스포드의 사용인들이 오랜 세월 귀족가에서 일해온 바인 후작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성심성의껏 일했다. 멜리사가 나를 멍청하게 여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죄 없는 에일스포드 사람들까지 우습게 보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우스운 마님 때문에 에일스포드까지 우습게 보이는 건…….
‘절대 안 돼!’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사용인들을 대변하려는 찰나. 멜리사의 표정이 조금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런가 싶어 멜리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파벨과 블란이 있었다. 파벨은 영주를 곁에서 모시는 집사요, 블란은 누가 보아도 번듯한 기사였다. 멜리사가 마음껏 패악을 부릴 수 있는 사용인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니 함부로 분풀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파벨과 블란이라면 호락호락한 사람들도 아니다.
‘알테어와 이야기를 마치고 온 거구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할 시점에 멜리사라는 불청객이 와 있으니 어떻게든 이 애를 쫓아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멜리사가 몸을 완전히 틀어 파벨과 블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쟤가 또 뭘 하려고…….’
황급히 멜리사의 뒤를 쫓아갔지만, 내가 멜리사를 말리는 것보다 그 애가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이쪽은 집사고, 이쪽은 누구지?”
멜리사가 오만하게 웃으며 파벨과 블란을 차례로 훑었다. 특히 오늘 에일스포드로 귀환해 처음 마주치는 블란에게 큰 관심이 있는지 그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왜 대답이 없어? 내가 물었으면 답을 해야 할 거 아냐?”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를 보고 어리둥절하게 눈을 껌뻑이던 블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선 파벨에게 속삭였다.
“야. 이 정신 나간 여자는 누구냐?”
말이 속삭인다는 거였지, 멜리사의 뒤에 선 내게도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저, 정신 나간 여자라니!”
당연히 멜리사는 불같이 화를 내며 블란에게 삿대질을 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딴 소리를 해?”
“당신이 누군지는 당연히 모르죠.”
매서운 멜리사의 분노에도 블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담담한 태도에 멜리사는 물론이고 나까지 입이 떡 벌어졌지만, 정작 블란은 평소에 잘 보이지도 않는 삐딱한 자세로 불량스럽게 멜리사를 훑어볼 뿐이었다.
“당신이 뭔데요? 내가 왜 자기 이름도 안 밝히고 다짜고짜 길을 가로막는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어야 합니까?”
“하. 에일스포드의 손님 대접은 이따위인가 보지? 아주 무례하고 무식해! 수도에 돌아가서 이 이야기는 꼭 하겠어!”
사교계를 목숨처럼 여기는 수도 귀족들에게는 제대로 먹힐 협박이었지만, 그런 곳과 거리가 먼 블란에겐 딱히 와닿지 않을 이야기였다.
“손님 대접?”
역시나 블란은 시큰둥한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코웃음을 흘렸다.
“손님 대접을 받고 싶으면 손님답게 굴어야지. 손님 주제에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무례하고 무식한 게 누구인지 도대체 모르겠네.”
“이잇……!”
적나라한 비난에 멜리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기사인 블란에게는 너무 눈에 보이는 공격이었는지, 그는 살짝 뒤로 물러서는 것만으로 그녀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 버렸다. 덕분에 중심을 잃고 휘청하는 멜리사를 바인 가의 시녀가 황급히 지탱해 주며 블란을 노려보았다.
“이분은 레이디 멜리사이십니다! 바인 후작의 외동딸이시고,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의 사촌이신데, 어찌 이렇게 무례하십니까?”
시녀의 소개에 멜리사가 턱을 치켜들고 블란을 노려보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어서 사죄하고 설설 기어라!’는 뜻이 분명했다. 하지만 블란은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런 귀한 분이셨다면 진즉에 소개부터 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제대로 예의를 갖췄을 텐데요, 레이디 멜리사.”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있지만 전혀 공경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멜리사가 이번에는 타깃을 바꿔 나를 노려보았다.
“야! 네 아랫사람이 저렇게 무례하고 방자한데, 넌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
“……블란 경은 기사야. 딱히 내 아랫사람이 아닌걸.”
“무슨 헛소리야? 가문의 기사는 마님의 아랫사람이지! 당장 나한테 사죄하라고 해!”
“기사는 영주의 명을 따르는 에일스포드의 검이야. 내가 사사로이 사죄를 명령할 수 없어.”
“뭐?”
내가 자신의 말에 반발할 줄은 몰랐는지 멜리사가 눈을 부라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멜리사의 기세에 가만히 지켜보던 시녀가 나서 그녀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짧은 이야기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 멜리사가 한결 가라앉은 얼굴로 자세를 바로 하더니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네가 사죄해.”
“뭐?”
“고작 남작가의 기사가 후작가의 레이디에게 무례를 범했으니 누구든 사죄해야지. 하지만 기사에겐 사죄하라고 할 수 없다며. 그러니까 마님인 네가 대신하렴.”
“…….”
멜리사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는지 블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본인이 사과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블란의 행동을 막았다.
“마님.”
블란이 조심스럽게 날 불렀지만 나는 그를 외면한 채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멜리사는 여유롭게 코웃음을 흘리며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고, 블란은 이를 바드득 갈며 멜리사를 노려보았다.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 너무도 명확했다.
“멜리사. 너에게 사죄할 수는 있어.”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내게 사죄를 받기 전에, 너도 블란 경에게 사죄해 줘야겠어. 그게 순서에 맞지.”
“뭐, 뭐라고? 내가 왜?”
“넌 정식으로 서임 받은 기사를 하인처럼 대했어. 기사는 곧 가문의 명예를 대변하지. 너는 에일스포드의 기사를 무시함으로써 에일스포드의 명예를 짓밟았고, 그에 대한 사죄는 받아야겠어. 내 사과는 그다음이야.”
내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멜리사가 입을 떡 벌렸다. 당연했다. 바인 후작가에서는 항상 멜리사에게 한 수 접어줬으니까. 하지만 에일스포드는 다르다. 마님이 우스운 취급을 당한다는 이유로 죄 없는 에일스포드까지 싸잡혀 멜리사의 아래에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지 않는 것이 제대로 된 남작 부인의 역할이리라. 소심한 성격 탓에 손이 벌벌 떨렸다. 아마 목소리도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을 거다. 잠시 당황했던 멜리사도 그런 우스운 내 꼴을 보고 자신감을 되찾은 건지 다시 코웃음을 흘리고 허리를 폈다.
“허. 이딴 시골 남작가에 명예는 무슨 명예?”
멜리사의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했는지 복도에 무슨 명예, 무슨 명예, 무슨 명예,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다소 난처하게 날 바라보던 블란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파벨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멜리사 본인도 과한 자신감에 발언이 선을 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차- 하는 표정을 하곤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그러게. 이딴 시골 남작가에 명예는 무슨 명예.”
싸늘하게 식어버린 복도에 분위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알테어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싸늘한 얼굴로 뚜벅뚜벅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알테어가 왜? 갑작스러운 등장에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그의 등 뒤로 안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의기양양하게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곤란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안나가 구원군으로 알테어를 데려온 듯했다. 마주친 눈동자가 ‘저 잘했죠!’라고 말하고 있는 듯해서 나는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안나의 얼굴에 뿌듯함이 퍼져나갔다.
“어, 어머나, 영주님. 드디어 뵙네요.”
멜리사는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알테어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알테어를 만나게 해 달라고 떼를 쓰더니, 정작 지금은 알테어의 등장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테어는 멜리사의 인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깨끗하게 무시하고는 블란과 파벨을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제가…….”
블란이 고개를 숙이며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여기서 그가 제 잘못을 인정하게 둘 순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멜리사가 먼저 우리 기사에게 무례하게 굴었어요.”
파벨과 블란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알테어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몸이 얼어 버릴 것 같은 눈빛에 어깨를 움찔하자 기분 탓인지 알테어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든 것도 같았다.
“그랬나, 레이디 멜리사?”
하지만 나를 지나쳐 멜리사에게 닿은 눈빛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걸 보면, 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는 것도 모두 나의 착각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 방금 발언은 실수였어요. 저와 대화하시면 확실하게 사정을 알 수 있으실 거예요.”
멜리사가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차가운 기세에 놀란 건지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대화? 내가 왜 당신과 대화를 해야 하지? 상황은 내 아내와 내 기사, 내 집사에게 들으면 되는데?”
“그, 어, 마침 영주님을 뵈어야 할 일도 있었거든요. 아버지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럼 줘.”
“네?”
“편지 달라고.”
알테어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멜리사는 허둥대며 시녀를 바라보았고, 시녀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워낙 중요한 편지라 후작께서 은밀히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이니 후작께서 말씀하신 ‘은밀히’ 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지금 줘.”
알테어가 흔들림 없이 손을 내민 상태로 멜리사를 재촉하자 그녀가 잠시 시녀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쭈뼛대며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금박으로 바인 후작가의 문양이 찍힌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였다.
‘……정말로 편지가 있긴 했던 건가? 어떻게든 알테어를 만나 괴롭히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아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알테어가 봉투를 받아 안에 든 편지를 살폈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알테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예상했던 대로의 내용이군.”
알테어가 편지를 그대로 블란에게 넘겨주었다.
“살펴보고 미리 이야기 나눴던 방향으로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블란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과시하려는 듯한 행동에 멜리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늘 막무가내로 구는 멜리사도 그가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 영주의 측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과시였다.
“저…… 기사님?”
눈치를 살피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멜리사가 두어 번 헛기침하며 블란을 불렀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무례했던 것 같아요. 누군지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고압적으로 굴어서 미안했어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딴 시골 남작가에 명예는 무슨 명예’ 아닙니까. 앞으로도 똑같이 대해 주십시오.”
블란이 평소처럼 싱긋 웃으며 멜리사의 실언을 상기시켰다. 덕분에 멜리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블란은 그런 멜리사를 깔끔하게 외면한 채 알테어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저는 마님께서 파벨과 저를 데리고 논의할 일이 있으시다 하여서…….”
“그래. 이만 가 보도록 해라.”
“예. 그럼 가시지요, 마님.”
블란이 다정한 기사님으로 돌아와 나를 에스코트했다. 그 옆으로 파벨이 서둘러 따라붙었다. 멜리사와 알테어만 남겨진 것이 신경 쓰여 뒤를 힐끗대자 파벨이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되는군요.”
정확히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요. 멜리사는 성격이 보통이 아닌데…… 알테어를 얼마나 곤란하게 할지…….”
“네?”
내 이야기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파벨이 블란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님. 제가 걱정하는 쪽은 영주님이 아니라, 그 레이디 쪽입니다.”
“벼르고 계셨을 텐데 마침 상대 쪽에서 빌미를 던져줬으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셨을 겁니다.”
전혀 신난 얼굴은 아니었는데. 멜리사와 알테어의 상황이 짐작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도 걸음은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쪽 일은 영주님께서 해결하실 겁니다. 저희는 저희가 할 일을 하지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마님?”
이어진 블란의 질문에 그쪽의 상황은 깨끗하게 잊혔다. 그의 말처럼, 이쪽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