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언제 생기는 걸까.2022.01.23.
“우선 듣는 귀가 없을 만한 곳으로요.”
곧장 진지해지는 나의 얼굴에 블란도 심각함을 인지한 모양인지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딱딱해졌다.
“그럼 서재로 가시지요.”
생각지도 못한 무거움을 감지하고 굳은 블란 대신 파벨이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목적지는 그의 말처럼 서재였다. 에일스포드는 오래된 귀족 가문답게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규모는 바인 가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선조들이 대대로 신경 써서 지식을 축적해 왔다는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인 후작가에서 지낼 때는 서재에 자주 틀어박혀 책을 읽었는데.’
오랜 세월의 무게가 주는 안정감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에일스포드에 온 이후로는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감당하느라 좋아하는 여유를 만끽할 시간이 없었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장소에 들어선 덕분인지 무겁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블란을 향해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얼마 전 에일스포드에 새로 온 의사 선생님인 리온의 부친께서…….”
선대 후작님의 주치의였다더라. 그분께서 돌아가신 선대 후작 부부의 상태를 살폈는데, 분명한 타살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리온은 겨우 목숨을 건져 타국에서 증오를 키우고 있었다고 하더라. 리온은 그 사건의 범인으로 알테어를 의심 중이고…….
“말도 안 됩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블란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크게 반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의 영주님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어떻게 부모를 죽이고 이득을 취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분께서 선대를 빨리 잃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뭔가 의심을 확신할 만한 정황이 있었으니 리온이 그렇게 여긴 게 아닐까요? 더 묻고 싶었지만 그 주제로 대화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있어서 더 묻지 못했어요.”
“그랬군요. 갑자기 영지에 의사가 왔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그런 이유가…….”
블란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그 부분은 제가 은밀하게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주님을 의심하고 있는 자가 어떻게 우리 영지에 올 생각을 했죠?”
“아.”
“그리고 복수랍시고 영주님을 노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이어지는 블란의 의문은 정당했다. 하지만 나는 리온이 그런 식으로 복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설 속 그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온은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아주 강한 인물이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약을 개발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런 사람이 복수를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건……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럴듯한 변명을 찾아내다, 나를 재촉하는 듯한 블란의 눈빛에 못 이겨 머리를 떠도는 이야기를 대충 던져 놓았다.
“그…… 영혼이 맑아 보여서…….”
“…….”
“…….”
블란과 파벨이 할 말을 잃은 듯 눈을 껌뻑이며 날 바라보았다. 황당함이 서린 그들의 눈빛에 나는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이비 종교를 따르는 신도 같은 소리잖아……!’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찰나 블란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물었다.
“제 영혼은요?”
“네?”
“제 영혼은 어떻습니까, 마님?”
“어어…… 그게…… 아주 맑고…… 강한 기운이…… 느껴져요……?”
더듬거리며 대충 말을 지어냈더니 블란이 만족스럽게 씨익 웃으며 어깨를 활짝 펴더니 과시하듯 파벨을 바라보았다.
“들었지?”
“…….”
파벨은 내가 영혼이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 더욱 황당한 얼굴이 되어 블란을 향해 혀를 차더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를 외면하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마님께서 그의 사람 됨됨이를 긍정적으로 보셨다면 저 역시 믿습니다. 영주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고 적국에 머무르던 의사를 데려온 것이겠지요.”
“리온이 진행 중인 연구도 우리 영지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앞으로도 더 큰 일을 하게 될 사람이죠. 그러니까 반드시 오해를 풀고 에일스포드 사람으로 만들었으면 해요. 가장 중요한 건 선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는 거지만요.”
나의 이야기에 파벨이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스포드의 과거도, 현재와 미래도, 모두 중요하지요. 그런 중요한 문제를 이 녀석에게 맡기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걱정 마십시오, 마님. ‘영혼이 맑고 강한’ 제가 철저히 조사해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영혼이 맑고 강하다는 소리를 강조하며 의지를 불태우는 블란의 모습에 파벨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게 마치 ‘이런 녀석이라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파벨과 블란의 관계가 부러워졌다.
‘난 외동이었으니까 저런 관계에 대해 잘 모르지.’
하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보인다. 알테어도 형제가 없어서 더 많은 짐을 홀로 감당해야 했고.
‘역시 아이들에게는 형제자매가 있는 편이…….’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녀 계획으로 흐르자 나는 화들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닌데 괜히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민망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은걸.’
후계자의 탄생이야말로 내가 알테어와 에일스포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애초에 알테어가 나와 결혼한 것도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니까,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었다.
‘언제 생기는 걸까.’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 그 시각. 덩그러니 복도에 남겨진 멜리사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알테어를 보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시녀와 머리를 맞대고 세웠던 계획은 크게 틀어졌지만…… 어쨌든 알테어와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첫날에는 알테어를 일개 기사로 오해하는 바람에 실수하고 말았으나, 지금은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으니 잘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남작님.”
멜리사는 화사하게 웃으며 무뚝뚝하게 서 있는 알테어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알테어가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 느껴져 멜리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너도 남자구나? 아무튼 예쁜 건 알아가지고.’
멜리사는 자신이 남자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남자 앞에서 어떻게 웃어야 할지, 어떻게 관심을 끌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호감을 살지. 모두 제 손바닥 안이라 여겼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수도 사교계에서 멜리사가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건 바인 후작가라는 후광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녀의 약삭빠른 행동도 지분이 꽤 있었다.
‘남자란 뻔하지.’
적당히 띄워주고 이야기에 맞춰주면 헤벌쭉 웃으며 넘어온다. 가장 중요한 건 이 ‘남자’의 관심사가 뭔지 파악하는 거다. 남자들의 관심은 대체로 카드 게임이나 승마, 사냥, 사업, 정치, 여자 안에서 모두 해결되었다. 상대를 파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거리가 무너지면 경계가 흐려지고, 경계가 흐려지면 입이 쉽게 열린다. 멜리사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결코 노골적이지 않게,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그의 팔에 손을 감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풍만한 몸이 느껴지도록 바짝 밀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작님. 아버지께서 답장을 꼭 받아 오라고 하셨어요. 언제쯤 답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저, 저, 저어…… 레이디…….”
팔을 붙잡힌 남작이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숫총각처럼 말을 더듬으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후훗.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까지 달라졌네.’
멜리사는 ‘빈약한 나디아를 상대하다 날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모양이지?’라고 생각하며 청초한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시야에 가득 들어찬 낯선 얼굴에 화들짝 놀라 집어 던지듯 남자의 팔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어, 어머나!”
분명 알테어의 팔을 붙잡고 몸을 들이댔다고 생각했는데. 멜리사 앞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얼굴이 붉게 물든 채 바짝 굳어 있었다.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당황한 멜리사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하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알테어가 팔짱을 낀 채 비죽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내 아내의 사촌이라도 하인을 유혹하면 곤란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 제가 하인 따위를 왜……!”
“하지만 지나가던 이 녀석을 붙잡고 가슴을 들이댄 건 레이디 아니신가?”
“제가 붙잡으려던 건!”
멜리사는 발끈해서 소리치려다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대놓고 ‘널 붙잡고 수작을 부리려고 했다!’고 외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남작이었는데, 어쩌다 저 하인이 되었느냔 말이야!’
멜리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부들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지만, 알테어는 그녀의 뻔히 보이는 수작이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뛰어난 무인이었다. 상대의 움직임 따위야 간단히 예측할 수 있었고,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영애라면 더 쉬웠다. 그래서 복도를 지나가던 하인을 낚아채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멜리사 앞에 슬쩍 끼워 넣었고,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멜리사는 졸지에 하인을 유혹하려고 몸을 던진 셈이 되었다.
“너. 레이디께 잡아먹히기 전에 얼른 가라.”
알테어는 픽 웃으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하인을 향해 명령했고, 하인은 허둥대며 자리를 벗어났다.
“레이디. 사정이 급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대놓고 행동하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군. 바인 후작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알테어의 말에 멜리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더욱 붉게 물들었다. 당장 수치스러운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공개된 복도라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을 통해 ‘바인 후작가의 아가씨가 남자에 몸이 달아서 하인에게 몸을 던졌대!’라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끔찍해!’
수도의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 영식들에게도 내어줄 듯 내어주지 않으며 고고한 레이디의 자리를 지켜온 멜리사다. 고작 하인 따위와 엮여 명예를 실추시킬 수는 없었다.
‘여기가 시골 깡촌이라 다행이야.’
바인 후작가에서 데려온 시녀들의 입단속만 잘 시키면 자신이 우스운 꼴을 볼 일은 없을 테다. 게다가 그 아이들은 전부 자신의 사람들이니 입단속쯤은 큰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은 멜리사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푸흡.”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멜리사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존재를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은 은발의 미남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멜리사와 알테어 쪽으로 다가왔다. 멜리사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미남의 존재에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도, 도대체 이 영지는 뭐야?’
어디서 이런 미남들이 튀어나오는 거지? 물론 그녀의 의문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황자 전하. 본관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아. 마차 바퀴를 고칠 장인이 드디어 도착했다기에 응접실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재밌는 광경을 보게 되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은발의 미남이 멜리사를 바라보며 다시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남자의 미모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멜리사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자, 잠깐…… 황자라고? 이런 외모의 황자라면…….’
3황자 오르카!
“요즘 레이디들이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라는 건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다소 질책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오르카의 시선에 멜리사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