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듣고 싶은 말.2022.01.26.
‘아, 아니지. 상대는 3황자잖아.’
잠시 당황했던 멜리사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차피 3황자는 수도에서의 영향력이 미미했다. 황족이지만 수도에 머무르는 시간도 적다.
‘황제나 황후, 다른 형제자매들과도 별로 사이가 안 좋댔어.’
말 그대로 외톨이 황자. 그러니 이곳에서 보고 들은 어떤 이야기도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질 일이 없을 거다. 한시름 놓은 멜리사는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고 빙긋 웃으며 3황자 오르카에게 인사를 올렸다.
“바인 후작가의 멜리사입니다, 전하.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레이디 멜리사. 정말로 오랜만이군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그대가 레이디가 되기 전이었던가요.”
부드럽게 건넨 인사에 멜리사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레이디’란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가문의 안주인이나 영애를 부르는 칭호였으니, 멜리사는 태생부터 ‘레이디’는 아니었다. 그건 멜리사가 특히 예민하게 여기는 약점인지라 상대가 황자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뾰족하게 대꾸했다.
“예. 그건 정말로 오래전의 일이지요. 뭐, 전하께서는 좀처럼 수도에 발붙이지 못하시니 새로운 사교계 동향에 익숙하지 않으신 건 이해할 수 있지만요.”
오르카가 지지기반이 미약해 수도에서 제대로 대접 못 받는 부분을 제대로 비꼬는 말이었다. 감히 황자에게 할 언사는 아니었지만 상대는 뒷배 없는 황자다. 멜리사는 거침없이 오르카를 깎아내리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고, 오르카는 공격당한 사람답지 않게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알테어는 흥미롭게 둘을 지켜보는 관찰자였다. 양쪽 모두 얄미운 면이 있으니 어느 쪽이 망신을 당하든 즐거운 관찰이었다. 뜨거운 불 같은 멜리사와 고요한 산들바람 같은 오르카.
‘당장의 승패는 당연히 불 쪽이 우세해 보인다지만…….’
사실 무서운 쪽은 오르카 같은 타입이라는 걸 알테어는 알고 있었다. 무작정 달려드는 상대보다 고요하게 기회를 기다리는 상대가 더 까다롭다. 산들바람이 언제 태풍으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다가오는 건국제에는 수도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꼭 참석하라고 서신을 보내셔서요. 아무래도 실버 쥬빌리의 건국제는 특별하니까요.”
실버 쥬빌리. 황제가 즉위한 지 25주년이 되는 해라는 뜻이다. 황제의 즉위 일과 건국기념일은 딱 일주일 차이라 그 기간 내내 축제가 열리곤 했는데, 올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만큼 더욱 성대한 행사가 계획된 듯했다.
“아마 제국 전역의 귀족들을 초대할 계획이신 것 같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오르카의 시선이 멜리사를 지나 알테어에게 닿았다. 아마 그에게도 곧 초대가 올 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알테어 역시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다. 수도에서 블란이 가져온 소식 중에는 황제가 대대적인 실버 쥬빌리와 건국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바인 후작께서 레이디 멜리사를 통해 언질을 주셨습니다. 수도에 오면 꼭 바인 후작가에서 머물러 달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가?!’
편지를 전하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그 내용은 전혀 모르고 있던 멜리사가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저는 후작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 아내의 친정이기도 하니, 한 번쯤 제대로 봐두고 싶었거든요.”
“아. 그건 그렇겠군요.”
오르카가 묘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오르카 역시 바인 후작의 찜찜한 부분을 알고 있는 걸까? 아무리 수도와 거리를 두고 지낸다지만 바인 후작가는 유력한 가문이니, 황자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 귀를 열어두고 있었을 거다. 알테어는 탐색하듯 오르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늘 그랬듯 오르카는 묘하게 웃는 것으로 능숙하게 모든 정보를 차단시켰다.
‘역시 얄밉군.’
매사를 무던하게 넘기는 알테어로서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두 남자가 묘한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멜리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자연스럽게 알테어의 곁에서 그를 꼬드겨 낼 기회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곧 수도로 가신다니 저도 그 길에 따라가면 되겠네요!”
멜리사의 명랑한 목소리에 알테어와 오르카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미남과 부드러운 미남. 결이 다르지만 눈이 황홀하다는 점은 똑같은 두 미남의 시선에 멜리사는 잠시 넋을 놓을 뻔했지만 겨우 정신줄을 붙잡았다.
“혼자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찌나 험하던지…… 돌아가는 길은 고생하지 않겠네요.”
이 말은, 알테어 일행이 수도로 떠나는 날까지 여기서 손님 대접을 후하게 받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에일스포드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물론이고 수도로 향하는 길에도, 또 바인 후작의 저택에서도 내내 알테어를 꼬드길 기회를 엿볼 수 있을 터.
‘너무 완벽한 계획이야!’
멜리사는 스스로의 영특함이 기특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 뿌듯함이 얼굴 밖으로 모두 뿜어져 나와 알테어는 물론이고 오르카까지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아가씨는 자신이 매우 영특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데, 사실은 매우 허술하고 모자라다. 지금까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건 주변 사람들이 위세 높은 바인 후작의 이름을 의식해 그녀에게 한 수 접어줬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오르카와 알테어는 그런 후작의 위세에 겁을 먹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푸흡.”
결국 오르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알테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그에게로 바짝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골치 아픈 상황에 말려든 것 같군요, 남작.”
“…….”
놀리는 건가 싶어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르카를 보자 그가 싸울 의도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내 말은, 이 귀찮은 짐을 내가 치워주겠다는 겁니다.”
“어째서요?”
“음. 이 귀찮은 짐이 ‘내 팬’에게도 짐이 될 것 같아서? 난 엄청난 스타인 형님들과 달리 팬이 몇 없거든요. 소중하게 여겨야죠.”
“팬?”
“아. 모르셨나요. 남작 부인이 나의 열렬한 팬이라고 고백했는데. 남작에겐 말하지 않았나?”
전혀 모르는 이야기다. 알테어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찡그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게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라 오르카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잘 지켜보세요. 내가 제대로 치워드릴 테니까.”
귀찮은 짐을 치워준다니 알테어는 굳이 말릴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려고? 의문과 의심이 뒤섞인 알테어의 눈빛을 뒤로하고 오르카가 멜리사 앞으로 나섰다. 알테어의 대답을 듣기 위해 그를 바라보고 있던 멜리사가 가까운 기척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오르카가 화사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숙녀께서 먼저 요청하셨는데 거절하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요. 내가 돌아가는 길에 레이디 멜리사도 함께 모셔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에? 무슨 말씀을…….”
멜리사는 당황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가만히 자신의 말을 되짚어 보니, 누구에게 부탁하는 건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요청에는 주어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저, 전하. 제가 동행하겠다고 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멜리사는 오해를 풀기 위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오르카가 다정하게 멜리사의 손을 붙잡는 게 먼저였다.
“레이디 멜리사 덕분에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겠군요. 그렇지요?”
황홀한 미소에 멜리사의 이성이 싹 날아갔다.
“네에…… 분명 그럴 거예요…….”
멜리사는 멍한 얼굴로 입을 떡 벌린 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오르카가 이것 보라는 듯 알테어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고, 알테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제국의 황자가 이렇게 당당하게 미남계를 쓰다니. 알테어의 황당함을 알아챈 건지 오르카가 여유롭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난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사용하자는 쪽이라. 그건 아마 남작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너는 나의 동류라는 선언에 알테어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사실 알테어 역시 오르카를 볼 때면 그런 기분에 빠지곤 했었기 때문이다. 외모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와 자신이 같은 부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원래 비슷한 사람들은 끌리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동족 혐오도 있지만. 오르카는 굳이 그 이야기까진 꺼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멜리사를 에스코트했다.
“자, 그럼 같이 여정을 의논하시죠. 제 부하가 일정을 자세히 알려줄 겁니다.”
“네. 여정을…… 네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멜리사가 놀라서 알테어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오르카는 곁을 지키고 있던 부하에게 자연스럽게 멜리사를 넘기고 그녀를 붙잡고 있던 손을 옷에 스윽 문질렀다. 마치 더러운 것을 닦아내는 듯한 행동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과 함께 오르카의 머릿속에도 생각이 흐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남작 부인의 사촌이라지. 재밌는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귀찮은 짐을 대신 해결해 줬으니 남작에게도 빚을 지운 셈이고.’
오르카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알테어는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생각이 머물러 있는 곳이야 뻔했다. 조금 전 오르카 황자와 대면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다. 오르카 황자는 내내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며 알테어의 신경을 긁어댔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
‘모르셨나요. 남작 부인이 나의 열렬한 팬이라고 고백했는데.’
나의 열렬한 팬이라고 고백……. 나의 열렬한 팬이라고 고백……? 나의 열렬한 팬이라고 고백……! 그렇게 말하던 오르카 황자의 얼굴에 묘하게 수줍은 홍조까지 올라와 있어 더욱 열이 받았다. 나디아가 오르카 황자의 팬이라니? 정말이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알테어가 아는 나디아는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분명하게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마 그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오르카 황자에게는 그의 팬이라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한 것이다! 팬이라는 게 뭔가. 상대를 동경하고 좋아한다는 뜻 아닌가?
‘나디아가…… 그 산들바람 같은 황자를 좋아한다고……?’
팬으로서 좋아하는 건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좋아한다’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런 어떤 의미로든 나디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그걸 깨닫는 순간 머릿속이 딩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게 왜 그렇게 대단한지, 왜 이렇게 충격적인지도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뱃속에 커다란 구렁이 수십 마리가 뒤엉켜 마구 몸을 비틀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니 뱃속의 구렁이들은 더욱 요동치며 가슴까지 뻐근하게 만들었다.
‘난…… 나디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나디아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거지?
‘그건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