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사르르 녹아내렸어.2022.01.30.
생각이 벼랑을 만난 듯 뚝 끊어졌다. 생각과 행동에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한 적은 없었는데. 어째서 이 간단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토록 찾아내기 힘든 걸까? 알테어는 찌푸려진 미간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난 생각보다 독점욕이나 소유욕이 강한 편인지도 모르겠군.’
애초에 그런 건 없다고 여겼지만, 아니, 오히려 그런 것 따위는 없다고 믿었지만……. 나디아가 오르카 황자에게 활짝 웃으며 ‘팬이에요!’라든가 ‘좋아해요!’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내 아내’가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걸 참을 수 없는 걸 보면 여태까지 자신을 너무 몰랐던 게 틀림없다. 지나친 독점욕과 소유욕은 지양해야 하는 감정이다. 알테어는 넘실거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누르려고 애썼다. 검을 든 순간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았다. 손에 검을 쥐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테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연무장으로 가 검을 휘둘러야 이 넘실거리는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알테어가 채비를 마치기도 전에 침실 문이 먼저 열렸다. 나디아가 돌아온 것이다.
“……알테어?”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테어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뚝 끊어졌다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뭐든 휘둘러 열을 발산해야 가라앉을 것 같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르르 녹아내려서는…….
‘허.’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급격히 변할 수도 있는 건가? 고작 나디아를 봤을 뿐인데? 그 급격한 감정 변화에 알테어는 스스로가 황당해 눈썹을 꿈틀거렸다.
*** 나디아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화들짝 놀라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침실 안은 기묘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날카롭고 매서운 기운이었다.
“……알테어?”
흠칫 놀라 그의 이름을 부르자 서늘한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알테어의 눈빛이야 언제든 서늘하지만, 그래도 평소와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왜 그런가 싶었지만 곧 그럴 만한 이유를 떠올렸다. 멜리사와 알테어만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으니, 그 애가 알테어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틀림없었다.
‘그 애는 사람을 박박 긁는 재주가 뛰어나니까, 분명 알테어도 못살게 굴었을 거야.’
나는 알테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쪼르르 곁으로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기분 상했어요?”
조심스럽게 알테어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시 단단히 화가 난 거다.
‘어떻게든 멜리사와 알테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였는데…….’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축 처졌다.
“미안해요. 다 내 탓이에요.”
“…….”
알테어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 복잡한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눈빛이 분노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 어리둥절해졌다. 알테어가 말을 아끼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뭐가 네 탓인데?”
“네?”
“난 하나도 화 안 났어.”
“하지만…… 분명히 화난 것 같았는데…….”
우물거리며 알테어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랬지. 조금 전까지는 확실히 좀 짜증이 났던 거 같아. 그런데…….”
알테어가 말끝을 흐리며 허리를 굽혔다. 덕분에 알테어와의 거리가 무척 줄어들어,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어째서인지 알테어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왜 얼굴을 보자마자 그게 가라앉느냔 말이야.”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에 나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지 않아도 거리가 가까워져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알테어가 말없이 노려보기까지 하니 식은땀이 줄줄 흐를 것 같았다.
“난 언제나 논리적이었어. 무슨 행동을 하든 다 이유가 있었다고. 그런데 왜…… 어째서…….”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졌다.
“나디아.”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잔뜩 긴장해서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번에는 분명히 내게 말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어.”
“네?”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화가 났을 때도, 그게 식어 버렸을 때도. 그냥 이유가 없었어. 있다면 그냥…… 네가 이유지.”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래. 맞아. 넌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런데 내가 왜 이러느냐고.”
알테어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더니, 곧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평소와 다른 알테어의 모습에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알테어. 혹시 아파요?”
“아프냐고?”
알테어가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만 돌려 시선을 마주쳐 왔다. 걱정을 가득 담아 고개를 주억거리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심장이 좀 아픈 것 같기도 한데.”
“네? 심장이요?!”
나는 놀라서 펄쩍 뛰며 날 강하게 끌어안은 알테어를 황급히 떼어냈다. 낑낑대며 자신을 밀어내는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알테어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 주었다.
“심장이 어떻게 아픈데요?”
“뭐라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누가 꽉 쥔 것처럼 뻐근하고, 찌르르 아팠다가, 미친 듯이 쿵쿵 뛰고…….”
나는 이어지는 알테어의 설명을 들으며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벼, 병에 걸린 거 아니에요? 심장 질환은 심각하다고요.”
“나디아. 내가 병에 걸릴 사람처럼 보여?”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물론 알테어는 건강해 보인다. 그것도 엄청나게 건강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연사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안 되겠어요.”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알테어의 손을 붙잡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키가 작은 내게 붙잡혀 끌려오느라 알테어가 어정쩡한 자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딜 가려고?”
“당연히 리온에게 가는 거죠!”
그제야 행선지를 알아차린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알테어가 작정하고 걸음을 멈추니 내가 끌고 갈 방법은 없었다. 원망스럽게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디아. 난 병에 걸리지 않았어.”
“심장이 아프다고 했잖아요.”
“그건…….”
“병에 안 걸렸어도 진찰은 받을 수 있잖아요. 부탁할게요.”
무어라 반박하려던 알테어가 부탁한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더니 손으로 심장 근처를 움켜쥐었다.
“……또 찌르르.”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 모습에 알테어가 심장 질환이 있다는 나의 의심은 거의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것 봐요! 그냥 두면 안 된다니까요!”
당당해진 나는 큰소리를 치며 다시 알테어의 팔을 잡아끌었다. 알테어도 순순히 내게 끌려왔다. 우리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겨 순식간에 리온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나는 지체할 것도 없이 그대로 문을 두드리며 리온을 불렀다.
“리온. 안에 있죠? 잠시 환자를 봐줄 수 있을까요?”
“환자라니…….”
알테어가 작게 반발했지만 나는 문을 두드리는 데 집중했다. ‘환자’라는 소리에 놀란 건지 문 너머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리온이 고개를 뺐다. 묘하게 경계심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어떤 환자입니까?”
리온이 나와 알테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 둘 중에는 환자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당당히 내게 붙잡혀 있던 알테어를 앞으로 떠밀었다.
“환자예요.”
“……이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
리온이 믿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알테어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도 리온을 따라 서둘러 알테어를 살폈는데…….
‘음.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긴 하지…….’
그러나 알테어가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심장이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대요.”
“뭐라고요?”
내 설명에 리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역시 심장 질환은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닌 거다!
“어떤 식으로 통증이 느껴졌죠? 간격은요? 두통이나 소화불량 증세는 없었습니까? 아,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죠. 서둘러 상태를 봐야겠습니다.”
리온이 질문을 쏟아내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연구실 내부가 훤히 드러나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나는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제자리에 굳어 눈을 껌뻑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내가 눈을 껌뻑이며 얼떨떨하게 먼저 온 손님의 이름을 부르자 리온이 ‘윽’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마리가 이 안에 있다는 걸 숨기려다 환자에 정신이 팔려 그걸 깜빡한 듯한 모양새인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을 껌뻑이고 있는 사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마님. 영주님.”
흠잡을 곳 없는 정중한 인사였지만, 그걸 받을 정신도 없었다.
‘마리는 분명 성 밖에 용무가 있어서 나간댔는데…….’
왜 리온의 연구실에 있는 거지? 어색한 침묵이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마리였다.
“선생님. 제 약은 내일 찾으러 오면 될까요?”
“약이요……?”
리온이 답지 않게 멍청한 얼굴로 되묻자 마리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리온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마리 양의 약…… 아아…… 그렇지. 그 약이요. 네. 내일 찾으러 오면 됩니다.”
어딘가 뚝뚝 끊어지는 어색한 말투였다.
‘갑자기 왜 저러지?’
이상한 리온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리가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왔다.
“요새 머리가 아파서 의사 선생님께 약을 처방해 달라고 했어요, 마님.”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의사를 찾을 정도로 두통이 심각한 거야?”
외출을 나갔던 사용인이 성으로 복귀하면 가장 먼저 주인에게 복귀를 알리는 게 보통이었다. 마리가 그런 법도를 모를 리 없으니, 그 절차보다 우선할 정도로 그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의미겠지. 걱정을 가득 담아 묻자 마리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찰해 보니 심각한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약을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요. 그렇지요?”
“아, 네, 뭐.”
마리가 동의를 구하자 리온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마리가 사용인이라는 이유로 리온이 성심성의껏 진료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짧게 당부의 말이라도 꺼내려는 그때, 리온이 알테어에게 자리를 권했다.
“우선 영주님의 상태를 볼까요. 이쪽에 앉으시죠.”
나는 그제야 이곳에 급히 온 이유를 깨닫고 얼른 알테어를 자리에 앉혔다. 어째서인지 알테어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마리와 리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눈빛에 묘한 의심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크흠.”
그 눈빛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는지 리온이 크게 헛기침하며 알테어의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대며 물었다.
“증상을 자세히 말해 보실까요.”
“심각한 건 아니다. 누가 꽉 쥔 것처럼 심장이 뻐근하고, 찌르르 아팠다가, 미친 듯이 쿵쿵 뛰고…… 그런 정도지.”
증상을 설명하는 알테어의 말이 길어질수록 리온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리온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워낙 심각한 병이라 쉽게 말을 못 꺼내는 건가?
“……혹시.”
걱정스럽게 리온을 보고 있으니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염장 지르려고 오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