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계산된 전개.2022.02.02.
나와 알테어는 별다른 소득 없이 리온의 연구실에서 쫓겨났다.
‘리온이 이렇게 반응할 정도라면 심각한 병은 아닌가 봐.’
도대체 리온이 왜 그렇게 질린 얼굴로 투덜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음 날이 밝아오자 에일스포드 성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오르카 황자의 마차를 고쳐 줄 장인이 바퀴 수리를 시작해, 그의 일행이 떠날 준비로 바빠진 것이다. 그리고 멜리사 일행도 그 소란에 합류했다.
“멜리사가 황자님 일행을 따라간다고?”
놀라서 묻자 소식을 가져온 안나가 기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전하께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수도에 가게 되셨는데, 그 참에 레이디 멜리사를 모셔가겠다고 먼저 제안하셨대요.”
“전하께서 왜…….”
내가 알기로 두 사람은 딱히 친분이 없었다. 수도의 신사들은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친분 없는 숙녀에게 다짜고짜 동행을 청하는 법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인연이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귀찮은 혹 두 개가 한 번에 사라진다니 내게는 반가운 일이다.
‘오르카 황자가 알테어를 악당의 길로 유혹하는 일도, 멜리사가 알테어를 귀찮게 구는 일도 없겠지.’
동시에 폭탄 두 개가 투하되는 바람에 진땀을 뺐지만 어떻게든 상황이 수습되어가는 듯했다. 곧 이어지는 마리의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쭉 그렇게 안심했을 거다.
“저희도 곧 수도로 떠날 테니 두 분과는 금방 다시 만나겠네요.”
“우리가 수도로 떠난다고?”
“네. 실버 쥬빌리를 맞아 폐하께서 모든 귀족들을 수도로 초대하셨다고 하니 저희도 가야지요.”
“실버 쥬빌리…….”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번뜩 기억이 떠올랐다. 실버 쥬빌리. 황제의 즉위 25주년을 축하하는 그 행사는 소설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뤄졌다. 훗날 반역자가 되어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오르카 황자가 당당히 귀환하여 모두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에피소드였다. 물론 등장부터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래전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병약한 황자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실버 쥬빌리를 계기로 황제와 수도 귀족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장성한 황자는 어린 날의 연약한 모습을 찾을 수 없이 당당한 자태를 뽐냈고,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넓힌 견문으로 모두를 감탄하게 했다. 그보다 더 확실하게 화제가 되었던 건 오르카 황자가 황제에게 바친 선물이었다. 오르카 황자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은 신기한 문물들은 황제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특히 험난한 동부 산맥 너머의 신비한 국가에서 어렵게 구해 왔다는 신기한 발명품과 섬세한 예술품들이 화제였다. 이를 계기로 황제는 산맥 너머의 땅을 개척하려는 꿈을 꾸게 되고, 그 선봉에는 자연스럽게 오르카 황자가 서게 되었다. 위험한 마수로 넘쳐나는 험난한 산맥을 넘어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건 미친 짓으로 여겨졌지만 오르카 황자는 그걸 당당히 해냈다. 그의 오른팔, 미친 악역 알테어 공작과 함께 말이다.
‘그 흐름은 일견 우연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계산된 전개였다. 오르카는 황제와 귀족들이 산맥 너머의 문물에 관심을 가지길 바랐다. 그 결과가 개척을 원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무대를 고른 것이다.
“……우리도 폐하께 바칠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나는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면서도 당장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오르카 황자는 실버 쥬빌리를 자신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무대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이 에일스포드가 말이다.
‘우리의 마석을 홍보할 좋은 기회야!’
에일스포드에서 나온 최상급의 마석으로 멋진 세공품을 만들어 황제에게 바친다면…….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석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겠지.’
그럼 에일스포드는 부유해질 거고, 알테어는 영지 운영만으로도 바빠져서 외부에, 특히 오르카 황자 같은 위험한 인물과의 교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질 것이다. 인간이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는 건 보통 내 사정이 궁핍하기 때문이다. 내 사정이 풍요롭다면 굳이 위험한 일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에일스포드를 부유하게 만드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래야 알테어가 오르카와 가까워져 미친 악역 공작으로 각성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나는 어떤 세공품을 선물해야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님. 수도에 가는 게 걱정스러우신 건가요?”
“응?”
“갑자기 말이 없어지셔서요. 역시 바인 후작가에 머무르는 게 마음에 걸리시는 거죠?”
“으응?”
바인 후작가에 머무르다니?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리가 설마 하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 멜리사 아가씨가 오신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바인 후작께서 영주님을 저택으로 초대하셨거든요. 실버 쥬빌리를 위해 수도에 오면 수도에 거처가 없는 에일스포드는 머무를 곳이 없으니 바인 저택으로 오라고요.”
“그렇구나. 확실히 에일스포드는 수도에 거처가 없지.”
보통 지방 귀족들은 영지에 거대한 성을 두고, 수도에는 보다 작은 규모의 타운하우스를 가지고 있었다. 수도에서의 사교 활동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영지 운영만으로도 돈에 허덕이던 에일스포드가 수도에 타운하우스를 마련했을 리 없다.
‘저택으로 알테어를 초대한 것도 그를 배려해서가 아니겠지.’
분명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 부부를 초대한 거다.
“영주님께서 이미 초대를 수락하셨대요.”
마리가 한숨을 내쉬며 내게 조언했다.
“영주님께 바인 저택은 싫다고 말씀하세요. 절대 마님의 의견을 무시할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면 내게 먼저 의견을 물었을 거야. 하지만 벌써 그렇게 결정했다면,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야…….”
“오랜만에 옛집을 보겠구나.”
기분이 아주 묘했다. 악당을 피하려고 서둘러 떠났던 그곳에 악당과 함께 돌아가게 된다니. 어째서인지 몸이 서늘해졌다. 어깨를 떨며 손으로 팔을 매만지자 마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깨에 숄을 둘러 주었다. 그러나 걱정을 안고 있는 마리와 달리 사정을 모르는 안나는 들뜬 표정이었다.
“전 수도가 너무 궁금해요. 수도의 축제는 아주 크고 화려하겠죠? 에일스포드의 소박한 축제와는 비교가 안 될 거예요. 그렇지요?”
기대로 반짝이는 안나의 눈빛에 마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수도의 축제는 확실히 크고 화려해. 하지만 에일스포드의 축제는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비교하기는 힘들지.”
“그럼 곧 답을 찾을 수 있겠네요. 얼마 후면 에일스포드의 축제가 열리니까요!”
안나가 신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에일스포드는 건국제 대신에 수확 기원제를 크게 열어요. 아주 재밌어요.”
“그렇구나. 들은 기억이 나.”
동부 귀족 회합에 참석하기 전, 기사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영지의 축제 역시 마님이 챙겨야 하는 부분인데.’
동부 귀족 회합에서 돌아올 때 사고가 생겨 귀환이 늦어지는 바람에 첫 축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영지 사람들이 즐겁게 즐길 수 있도록 좀 더 신경 쓰라고 해야겠네.’
술과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라고 하고, 더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도 준비하고……. 나는 ‘마님이 해야 할 일’ 목록에 한 줄을 더 추가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파벨을 만나자!’
*** 파벨의 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복도에서 그를 마주쳤다.
“곧 축제라면서요?”
내가 축제 이야기를 꺼내자 파벨이 이어질 화제를 이미 알겠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술과 음식은 넉넉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배도 문제없이 준비되었고요.”
“배요?”
“네. 수확 기원제 첫날, 조각배에 떨쳐냈으면 하는 것을 새겨 호수에 띄운 뒤 불태우거든요. 사람들은 그 배가 나쁜 기운을 모두 안고 사라진다고 생각하지요.”
역시나 수도에는 없는 풍습이었다.
“내가 할 일은 없을까요?”
“이미 준비는 다 되었으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님이 되어 첫 축제인데 이렇게 손을 놓고 있었다니…….”
“뭐, 그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
파벨이 내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축제를 준비하는 건 원래 사내들의 몫이니까요. 아무리 조각배라도 상당히 무거우니, 수확 기원제는 전통적으로 사내들이 준비해 왔습니다. 그날은 요리도 모두 남자들이 하는걸요.”
“정말요?”
수도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에 나는 신기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날은 파벨도 요리를 하나요?”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하니 저도 도와야지요. 그날은 영주님도 예외 없이 차출인걸요.”
“네? 알테어도 요리를 한다고요?!”
냄비를 앞에 두고 불 조절을 하거나, 작은 식재료를 들고 칼질하는 알테어의 모습은…… 정말이지 안 어울렸다.
내가 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파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기사들보다는 솜씨가 나으십니다. 다들 요리하다가 양파 대신 냄비를 썰기도 한답니다.”
“내, 냄비를요?”
“예. 그렇게 버린 냄비가 도대체 몇 개인지…… 물론 그분들 월급에서 냄비값을 차감했으니 문제는 없지만요.”
파벨이 안경 너머로 눈을 번뜩였다.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살림꾼의 의지가 느껴졌다.
“아무튼 마님께서는 배에 무얼 적어 띄울지만 고민하시면 됩니다. 내년에는 어떤 근심 없이 한 해를 보내고 싶으십니까?”
“그런 거라면 너무 많은걸요…….”
소심하고 걱정 많은 나 같은 사람은 배에 빼곡하게 글씨를 새겨도 부족할 거다.
‘그에 비해 알테어는 아주 간결할 것 같아.’
어쩌면 아무것도 안 새길지도 몰라.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찬 내 배와 아무것도 안 적힌 알테어의 배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니 어쩐지 우스워졌다.
“아무튼 축제 준비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파벨이 말끝을 흐리며 내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창 너머에서 반대편 건물 창가에 선 오르카 황자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오르카 황자가 몸을 돌려 창가에서 모습을 감췄다.
‘뭐였지?’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파벨을 바라보니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묘한 침음을 흘렸다.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뭘요?”
“영주님께서 왜 저분을 경계하시는지요. 전하께선 어디든 쉽게 스며드실 수 있는 분 같습니다. 저희 영주님과는 다르게.”
스며들어? 경계해? 알쏭달쏭한 말에 눈을 껌뻑이니 파벨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의 인사는 내가 아니라 나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오르카가 등장한 거다.
‘아.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킨 건 여기로 오겠다는 뜻이었구나.’
나는 뒤늦게 오르카의 손짓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닫고 몸을 돌려 그에게 인사했다.
“전하를 뵙…….”
하지만 인사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오르카가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남작이 내게 빚을 졌습니다, 부인.”